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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의 적반하장, 이유가 뭘까?

 

필자가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하는 ‘인권과 교육’ 과목에서 꼭 등장하는 단골 주제 중의 하나인 ‘체벌'은 인권과 늘 부딪히면서도 뾰족한 해결이 아직 제시되지 않는 문제이다. 요즈음의 용산 참사를 보며 필자는 ‘교육’을 위해서 ‘체벌’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와 ‘법치’를 위해서는 ‘강제진압’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묘하게 상통한다 싶어, 서글픈 생각이 먼저 들고,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과 ‘공권력’을 투입하는 이들의 그런 논리가 참으로 미워진다. ‘논리’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우선, 정부는 최근 용산 참사를 자초한 ‘강제진압’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국민의 정당한 요구와 생명마저 빼앗으며 이를 법·질서·공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연대를 외부세력, 테러집단, 좌파로 규정하고 추모집회까지 끝까지 추적하여 주동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전열을 다지고 있다.

 

이러한 적반하장의 발상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검찰, 경찰 그리고 청와대에서 지휘권을 행사하는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이들이 청소년 시절, 곧 군부독재시기에 받은 교육, 즉, 국가안보·반공·경제발전 이데올로기로 온 국민을 세뇌하고 통제했던 그런 교육 탓 아닐까?

 

그리고, 시위세력 진압에 꽤나 자주 동원되면서 막강한 위용을 과시하던 군대의 논리, 즉, 아군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 “시위 세력의 배후엔 분명히 불순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라는 근거 없는 확신,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식의 막무가내 명령, “초전박살!”을 구호로 외치며 속도전을 강조하던 작전, 그리고 제대하고도 대부분 한국 남성들의 뇌리와 감수성과 의식구조 깊숙이 남아있는 그런 군사문화 탓 아닐까?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와 유가족들은 지난 9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앞에서 '오늘 검찰은 죽었습니다'라는 검은 현수막과 고인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용산철거민 참사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 발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법치주의의 근본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며 그것을 위해 통치자는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선 안 되고 법이 정하는 바에 의해 견제와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일진대, 그것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 배웠기에 이번 강제진압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철거민들의 목숨을 빼앗고도 정부와 검찰, 경찰은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국민들에게 “할 테면 해보라! 한번 끝까지 가보자!”라고 하고 있는 것 같다. 

 

훌륭한 검사를 만든 한마디 “넌 잘  할 거야, 내가 알아”

 

한편, 학생들이 등교하는 학교 정문에는 여전히 복장 위반 혹은 지각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기합과 체벌이 행해지고 있다. “선생님에게서 맞는 것은 부모님에게서 맞는 것처럼 구타가 아니라 사랑의 매다”라는 훈육 이데올로기가 계속 주입되며, 일류대 입학을 위해서는 행복추구권, 신체의 자유, 휴식의 권리 등의 기본 인권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며, 학생들을 인권의 주체가 아니라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입시독재’라고 해야 하나?

 

필자의 수업을 듣는 교사들은 체벌문제에 대해 공통적으로 고민들을 하고 있다.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리지 마라”고 하지만 한국 교육현장에선 체벌이 불가피하다고 하면서도, 모두들 체벌이 아닌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다. 이젠 학생이 맞는 게 아니라 교사가, 때로는 학부모에게, 심지어는 학생에 의해 구타당하고 있으며, 체벌을 안 하려고 교사가 노력하면 오히려 학생들이“재는 좀 맞아야 하지 않아요?”라고 반문하고, 잘못을 저질러서 꾸중 듣는 학생들은 “알았으니까 빨리 때리세요” 아니면, “벌점 먹느니 차라리 맞을게요”라고 오히려 체벌을 재촉하기도 한다고 전한다.

 

그러면, 체벌의 대안은 없는가? 교사들은 교실 청소, 화장실 청소, 혹은 영어 시 구절 외워오기 내지는 한국 시 몇 편 외우기 등을 대안으로 시도한 경험을 말한다. 그런 것들도 좋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래도 가장 좋은 대안은 학부 인권 수업 도중에 어느 학생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그 학생의 경험담인즉슨, 고교 시절에 잘못했다 하여 교무실에 불려가게 되면 담임교사는 그 학생에게 아무 꾸중도 않고 그냥 차 한 잔 같이 마시기만 했고, 또 불려가게 되면, 그 주말엔 그 학생과 함께 등산을 가서 역시 꾸중과는 무관하게 인간적이고 정겨운 얘기들만을 나누었다 한다. 그 후 그 학생은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학생에 대한 ‘믿음’과 교사와 학생 사이의‘소통’이 그 학생을 바꾸었고 믿음을 주면 학생은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로 보답한다는 것, 그리고 학생과 소통하고자 할 때 그 학생은 비로소 스스로 인권의 주체로 대우 받음을 느끼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 더 나아가 교사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와 존경을 갖게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 <벤허>의 그 유명한 전차 경주 장면이 떠오른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채찍 없이 달리게 하는 벤허가 네 필의 흑마가 끄는 전차를 고성능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쳐서 질주하게 하는 적장과의 결전을 앞둔 전날 밤, 그는 마구간으로 찾아가 말들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아마도 “너희를 믿는다,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속삭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날, 벤허와 네 필의 백마는 가혹하게 채찍을 맞으며 분을 못 이겨 악에 바쳐 질주하는 흑마들과 벤허의 전차를 부수려 반칙을 도모하는 적장을 결국 이긴다. ‘믿음’과 ‘소통’이 ‘체벌’보다 훨씬 낫고 위대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지금 새삼스레 든다.

 

아울러, 필자는 오래 전 ‘모래시계’라는 TV 드라마에서의 장면과 대사도 잊히지 않는다. 사법고시를 치르겠다고 내려 온 아들(박상원 분)에게 “넌 잘  할 거야. 내가 알아”라고 격려하던 그 아버지의 그 말씀은 아들을 훌륭한 검사로 키워준 명언이었다.

 

교육 현장에 만연한 “맞아도 싸. 맞아야 싸”라는 식의 체벌 문화, “학생이 무슨 인권? 인권타령은 명문대 들어가서나 해!”라는 식의 입시 풍토, 성적 떨어져서 유서 쓰고 자살하는 초등학생이 생겨나는 교육, 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어나가도 끄떡없이 몰아붙이는 공권력 투입과 재개발 정책, 이런 교육은 이미 교육이 아니며, 이런 공권력은 이미 공권력이 아니다.

 

‘체벌’이 아직 행해지는 것을 국민 앞에, 학생 앞에 부끄러워하는 그런 ‘교육’과, ‘강제진압’이 아직 벌어지는 것을 국민 앞에, 철거민 앞에 부끄러워하는 그런 ‘법치’를 제발, 제발 보고 싶다. 그리고 ‘교육’과 ‘법치’를 바로 잡고자 투신하는 이들과 함께 외치고 싶다. “할 테면 해보라! 한번 끝까지 가보자!”라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녕씨는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검찰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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