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쩌라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핸드볼 큰잔치'라는 생소한 단어에, 대놓고 대거리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또박또박 물음표를 찍고 있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유럽에선 인기 종목이라고 해도 한국에선 '한데볼' 취급받는 비인기 종목이 아니던가. 한국에 그런 비운의 스포츠 종목이 어디 한두 개였던가.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막한 핸드볼 큰잔치에 가보자는 선배의 제안에 냉소적인 마음이 먼저 슬그머니 치고 올라왔다.

<우생순>도 안 본 나... 핸드볼? 아무것도 몰라요

 한국의 홍정호가 21일 오후 베이징 국가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올림픽 여자핸드볼 4강전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슛을 시도하고 있다.

온 국민을 울렸다던 올림픽 핸드볼도 안 본 나였다. 사진은 지난해 8월 21일 오후 베이징 국가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올림픽 여자핸드볼 4강전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슛을 시도하는 한국 홍정호 선수. ⓒ 유성호


내가 아무리 오지랖이 넓다고 해도 세상 모든 일에 다 열성적인 관심을 갖고 살 수는 없었다. 내게 스포츠는 행동이기보다 일종의 교양이었다. 원치 않아도 프리미어리그라든지, 올림픽이라든지, 김연아 같은 스포츠 이슈들은 종종 친구들과 대화에서 회자되었고, 나는 대화에 끼어들어 소외되지 않을 정도의 정보만 취하고 있었다. 적절한 추임새와 아는 척을 위한 일종의 의무방어전 용도로 익힌 게 고작인 셈이다.

핸드볼에 대한 정보는 그보다도 훨씬 단편적이었다. 평단과 관객의 극찬을 받으며 400만 명 이상이 봤다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조차도 보지 않았다. 베이징 올림픽 경기도 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유일하게 그 기간 동안 MBC 무한도전에서 방영한 정형돈과 노홍철의 핸드볼 중계를 관심있게 본 게 핸드볼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이었다.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내게 선배는 "집에서 놀면 뭐하냐, 경기장에서 직접 한 번 보고 말하라"고 '경험'을 권유했다. 방학 이후 별 다르게 하는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기도 했거니와 냉소 뒤에 슬쩍 비집고 올라오는 호기심이 발걸음을 부추겼다. 그렇게 지난 10일 오후 1시 40분. 나는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관중의 한 사람으로 몸을 섞고 있었다.

'한데볼'은 '해뜬볼' 될 수 있을까

경기장을 가르는 공기는 밖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표현하기 힘든 낯선 막연함과 약간의 흥분은 기분을 묘하게 들뜨도록 만들었다. 경기장 안쪽에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수들은 한 손에 들어오는 작고 노란 공을 재빠르게 놀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코트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운동화의 마찰음이 그렇게 경쾌할 수 없었다.

이번 시즌은 '한데볼을 해뜬볼로 만들겠다'며 대한핸드볼협회장으로 새로 취임한 SK 최태원 회장의 의욕적인 행보에 답하듯, 개막 첫날 60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몰이의 시작을 알렸다고 했다. 평일 오후인 이날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중석을 메우고 있었다.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은 꽤 많은 관중들로 채워졌다.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은 꽤 많은 관중들로 채워졌다. ⓒ 장일호


연인과 함께 경기장을 찾은 이용진(34·남)씨는 다소 놀라움을 표했다. "관객이 많은 주말에 왔으면 더 재밌었겠지만, 평일임에도 생각보다 관객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6살 난 아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은 황선민(39·여)씨는 소중한 휴가 기간에 경기장을 찾았다. "지난 주말에는 구름관중이었다는데 평일에는 얼마나 많이 올까 궁금했다"던 그 역시 "핸드볼 관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평소에 아들과 함께 야구장 등을 찾는다는 그는 "아이와 함께 오는 관중을 위한 편의시설이 좀 더 확충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오후 1시 40분 여자부 벽산건설-용인시청] 약체팀을 응원하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다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침을 꼴깍 삼키는 사이 선수들이 몸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뒷줄에 앉은 아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수들은 듣지도 못할 훈수를 쏟아냈다.

"막아야지", "들어가야지", "넣어야지" 등 신난 아저씨의 추임새를 해설 삼아 다소 얼빠진 정신으로 코트를 응시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쫓느라 마음은 분주하고 양 주먹은 절로 쥐어졌다.

국가대표 선수를 5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벽산건설에 비해 선수 구성면에서 다소 약체로 평가된다는 용인시청의 경기. 경기는 초반부터 더블스코어로 벌어지고 있었다. 자연히 마음은 용인시청 쪽으로 기울었고, 용인시청 선수들이 어렵게 한 골씩 성공시킬 때마다 응원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내 응원 덕분이었을까.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인 용인시청은 한 점, 한 점 점수를 따라잡더니 전반 30분을 10-10 동점으로 마무리지었다.

규칙도 선수도 모른다... 그런데 재밌다

 용인시청 선수들의 공격을 수비하고 있는 벽산건설 선수들

용인시청 선수들의 공격을 수비하고 있는 벽산건설 선수들 ⓒ 장일호


같이 경기를 관람하던 선배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짚어주며 유명선수 및 유망주의 이름과 올림픽에서 보여준 활약상을 알려주기도 하고, 센터백·레프트백·피봇 플레이어 등 포지션의 역할과 7m드로우 같은 경기규칙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소리'일 뿐. 규칙에 대한 이해가 약한 나로서는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몰라도 '어라? 이거 재밌네?'하고 이미 몰입한 상태. 뭐가 뭔지는 잘 몰라도 몸과 몸이 부딪치는 격렬함과 선수들의 땀이 집중력을 높이고 있었다.

후반전이 시작한 후 벽산건설은 우승후보답게 매섭게 몰아쳤다. 경기 중간 중간 "온아 언니, 파이팅!"을 외치는 앳된 소녀 팬들의 목소리가 관중석에서 힘을 더하고 있었다. 벽산건설의 김온아 선수는 국가대표이자 여자 핸드볼계의 떠오르는 별이란다.

후반 1분을 남겨놓은 시간, 김온아 선수가 파울로 2분 퇴장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점수는 25-20으로 벌어져 있었다. 은근히 용인시청을 응원하고 있던 내겐 아쉬운 결과였지만 결국 승패가 갈려야 하는 냉혹한 승부의 현실이란 이런 거겠지 싶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종종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벽산건설의 승리로 끝난 경기의 MVP는 문필희 선수에게 돌아갔지만, 경기장의 응원소리로는 김온아 선수의 팬이 더 많아 보였다. 김온아 선수가 상대 선수에 밀려 쓰러질 때마다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으며 열심히 응원하던 석민경(17·여)씨는 두산(남자부) 정의경 선수의 팬이기도 했다.

그는 "올림픽 때 핸드볼 경기를 보고 경기장을 처음 찾았다"며 "직접 와서 보니 박진감 넘치고 조마조마하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도 자주 경기장을 찾을 예정"이라며 "여자부는 벽산건설 팬이 많고 남자부는 두산 팬이 많은데 핸드볼이 활성화돼서 다른 팀을 응원하는 팬도 많아져서 응원하는 게 더 재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오후 3시 10분 남자부 경희대-두산] "이건 게임도 안 된다"

 두산 선수들이 경희대 선수의 공격을 막아서고 있다.

두산 선수들이 경희대 선수의 공격을 막아서고 있다. ⓒ 장일호


남자 10팀, 여자 8팀이 참여한 핸드볼 큰잔치는 실업팀과 대학팀이 함께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여자부 경기가 끝나자마자 빠르게 진행된 다음 경기는 남자A조에 속한 경희대와 두산의 대결. 실업팀과 대학팀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론 대학팀에게 훨씬 불리한 것 같았다. 뒤쪽에 앉은 한 관중은 동행에게 "이건 게임도 안 된다"며 경기시작 전부터 두산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스포츠가 인생이라면 예외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13년 만에 국내무대에 복귀했다는 윤경신 선수의 203cm 신장이 유독 돋보여서인지 경희대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였다. 크고 단단해 안정적으로 보이는 윤경신 선수를 상대로 한 몸싸움에서 나가떨어지는 경희대 선수들을 보며 혼자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기도 여러 번.

윤경신 선수를 비롯해 더 노련한 플레이를 보여 주는 두산 선수들 앞에 경희대 선수들은 골문 앞에서 좋은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그렇게 경희대는 경기 시작 8분이 지나서야 첫 골을 터트렸다.

점수는 큰 차이로 뒤질지언정 패기만큼은 뒤지지 않겠다는 듯 경희대 선수들은 의욕적인 몸놀림을 보여줬다. 경희대 선수들의 앙다문 입술과 격렬한 몸싸움에도 불구하고 실업팀의 노련함 앞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예외를 기대했지만 앞선 경기와 마찬가지로 이변은 없었다. 21-28의 스코어로 경희대 패배. 경기 MVP는 두산 박중규 선수에게 돌아갔다.

'훈남'의 땀방울에 흠뻑 빠지다

세계 최고의 선수라던 윤경신 선수의 등번호인 77번을 비롯해 한국 핸드볼 사상 첫 외국인 선수로 영입된 일본인 도요타 겐지도 볼거리 중 하나였지만, 사실 이번 경기는 내용보다 선수들의 외모에 더 눈길이 갔다. 나도 (이름은 이렇지만) 여자다. 운동선수답지 않은 뽀얀 피부 위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몇몇 선수들의 훈훈한 외모는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남자부 경기에서는 특히 여성 팬들의 응원열기가 남달랐다. 두산 박중규 선수 이름을 새긴 '중규 홀릭'이란 손 피켓을 들고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여학생도 눈에 띄었다. 핸드볼계의 훈남으로 떠오르고 있는 경희대 이은호 선수를 비롯해 수많은 팬들의 연호를 한 몸에 받았던 두산 정의경 선수의 외모도 물론 훌륭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두산 선수들이 퇴장하자 환호하는 팬들

경기가 끝난 후 두산 선수들이 퇴장하자 환호하는 팬들 ⓒ 장일호


그렇지만 내 눈에 자꾸 밟히던 선수는 두산 13번 진정훈 선수. 골을 만드는 포지션은 아닌 듯했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골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공을 돌리는 손놀림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경기 일정표를 살펴보니 두산의 다음 경기는 16일 오후 6시 30분 부천실내체육관. 왕년에 아이돌가수 '팬질'을 했던 경험을 십분 발휘해 다음 경기 때 '진정훈남'이라는 손 피켓을 만들어서 다시 한 번 핸드볼 경기장을 찾아볼까 잠시, 아주 잠시 고민했다.

다시 경기장 찾겠다는 다짐은 못하겠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현장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것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줬다. '백문이 불여일견', 옛말 틀린 것 없다는 말을 다시금 실감한다. 규칙을 잘 몰라도 직접 마주한 선수들의 생생한 숨소리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몰입하게 했다. TV중계로는 알 수 없는, 경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런 매력 때문에 사람들이 발걸음을 하는구나 싶었다.

한 달간의 일정이 끝나고 최종전이 열리는 3월 1일까지 또 다시 경기장을 찾겠다는 다짐은 쉽게 못하겠다. 그러나 예전보다 조금 더 관심어린 눈으로 스포츠뉴스의 핸드볼 소식을 챙겨보게 될 것 같다.

2009 SK 핸드볼 큰잔치는 1차 대회 2월 8~13일까지 잠실학생체육관 및 16~19일 부천실내체육관에서 치른 후, 2차 대회가 21~24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펼쳐진다. 3, 4위전 및 대망의 최종전은 각각 27일과 3월 1일 성남실내체육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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