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 www.benjamin2009.co.kr

* 기사 내용 중 영화의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12일 개봉되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러닝 타임이 166분에 이르는 대작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미국작가 피츠 제럴드가 1922년에 발표한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사건>을 각색한 작품이다.

<포레스트 검프>의 시나리오를 썼던 에릭 로스와 로빈 스위코드가 각본을 담당했고 <세븐>, <파이트 클럽>, <에이리언3>를 연출했던 묵시록의 스타일리스트 데이빗 핀처가 메가폰을 잡았다.

안젤리나 졸리의 남편으로만 기억하기에는 물오른 연기력을 과시하는 브래드 피트가 벤자민 역을,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케이트 블란쳇이 그의 연인 데이지역을 연기한다.

피츠 제럴드의 원작에서는 남북전쟁 직전 1860년대의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1918년 벤자민의 기이한 출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이름도 '힐데가드'가 아니라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데이지'다.

영화 속으로

1918년 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한 시계공은 아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심정으로 혹은 참전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비는 심정으로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도는 대형 시계를 제작한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그 시계가 역사(驛舍)에 설치되어 역사적인 시간을 시작하는 날, 벤자민 버튼은 태어난다. 출생은 기구하여 그의 목숨은 어미의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고, 태어나면서 이미 죽을 만큼 나이 들어버린 노인의 얼굴과 몸을 가졌다.

아이를 안아든 아비는 기괴한 아기의 모습에 경악하고 곧 숨이 멎을 것 같은 아기의 호흡에서 저주의 영감에 사로잡힌다. 아비는 아기를 버리기 위해 강가를 찾고, 차마 죽일 수 없어 한 양로원의 입구에 버린다. 양로원의 흑인 보모에 발견된 벤자민은 그렇게 노인들 속에서 다행히 기적 같은 성장을 한다.

아이는 양로원의 노인들과 진배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거꾸로 점점 더 젊어진다. 쭈글쭈글하던 피부는 점차 윤기가 흐르고 살갗은 갈수록 팽팽해진다. 몸은 자라고 힘줄에는 힘이 불끈 고인다.

동료 같았던 양로원 식구들과 (길러준) 엄마의 머리칼이 희어질수록 벤자민의 대머리에는 머리숱이 풍성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양로원 식구인 한 할머니의 어린 손녀가 양로원을 방문하고 벤자민은 그렇게 운명과도 같은 연인을 만나게 된다. 데이지다. 재기 넘치고 총기 발랄한 그 소녀는 벤자민의 내면에 감춰진 자기 또래의 소년을 알아본다. 노인과 어린 소녀는 양로원의 지하실로부터 벤자민과 할머니의 방에서 유년의 추억을 쌓아간다. 외모와는 상관없이 소년과 소녀로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시간을 산다.

영화는 임종을 눈앞에 둔 데이지가 벤자민의 일기장을 (벤자민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딸에게 읽게 함으로써 거꾸로 흐른 벤자민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나눈 그들의 사랑을 보여준다. 성년이 된 벤자민은 이제 양로원을 떠나야 하고 소녀에서 처녀로 자란 데이지 역시 자신의 미래를 향해 뉴욕으로 향한다.

항구에서 (노인들이 그러하듯)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벤자민은 우연한 기회에 일용직 선원이 된다. 그로부터 그는 바다에서 청년기를 보낸다. 바닷가 유곽에서 동정을 잃고 생전 처음 술을 마시며 그는 뱃사람으로서의 삶에 길들어 간다. 그 사이 데이지는 발레리나가 되어 있다. 촉망 받는 무용수요 연기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고 러시아 무대 등 세계적인 발레리나로서 명성을 쌓아간다.   

시간은 흘러 태평양전선에 해군으로 참전했던 벤자민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고 이제 그는 헌헌장부가 되어 있다. 긴 항해에서 돌아온 이 선원은 모처럼 평온한 일상의 한 가운데 머무르며 지난 시간을 추억한다. 도버해협을 헤엄쳐 건너려했던 유부녀와의 추억은 무료한 벤자민의 일상을 달래준다.

자신을 선원으로 살게 해준 인정 많은 주정뱅이 선장 또한 잊을 수 없다. 그 사이 그를 버린 아버지는 그를 찾아 용서를 빌고 그의 성이 유래한 단추 공장을 유산으로 물려준다. 그러나 그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데이지다. 그는 어디에 있든, 바다에서나 뭍에서나 데이지에게 편지를 썼고 한시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거꾸로 간 시간, 또한 못 박힌 사랑


다시 만난 데이지는 아리따운 여자로 성숙해 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유년시절의 사랑 속으로 단박에 빠져든다. 그 사랑은 한 순간에 성큼 자란다. 마침내 그들은 같은 또래가 되어 깊은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거꾸로 흐르는 시간은 그들의 사랑을 점차 멀어지게 만들 것이 뻔하다. 그래서 벤자민은 데이지의 고백을 곧 바로 받아들일 수 없고 데이지는 마음속의 사랑을 숨긴 채 그의 곁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운명보다도 깊고 강한 것. 서로를 향한 사랑에 목마른 그들에게 현실의 어려움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점점 어려지는 벤자민도, 점점 늙어가는 데이지도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그들의 사랑으로 채우리라 작정한다.

데이지는 더 이상 유명한 발레리나가 아니고 벤자민은 더 이상 가난한 뱃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의 반대 극점으로부터 심지를 키우고 같은 나이의 접점에서 불같은 사랑으로 타오른다. 또한 데이지는 무대에서 내려오고 벤자민은 뭍으로 올라옴으로써 드디어 같은 사랑의 공간에 머무른다. 꿈같이 행복한 사랑의 시간이요, 사랑처럼 달콤한 꿈의 시간이다.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운명이다. 각자에게 이미 예정된 시간표에 따라 그들은 각기 늙어가고 어려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운명이라 받아들이기에 그들은 물론 그것을 보는 우리들마저 억울하다. 태어나 살다 병들어 죽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과 거꾸로 흘렀을지언정 만나 사랑한 그들의 시간이라는 것이 이미 마련된 예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생도 아니요, 영화는 더욱 아니다. 영화는 늘 판타지이며 또한 살아보지 못한 삶이어야 한다. 소설은 우화여야 하고 영화는 풍자여야 한다.

 르네 마그리트 <못 박힌 시간>

르네 마그리트 <못 박힌 시간> ⓒ www.abcgallery.com

흔히 말하듯 삶이란 유한한 것이고 시간은 영원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진정 영원한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언제나 유한한 것이다. 시간이란 지각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른다. 거꾸로 가든 제대로 가든 시간은 각자가 지각하여 누린 만큼만 시간으로서 유효하다.

양로원의 노인들이 자신들이 키워 가진 시간을 버려야 하듯, 벤자민 역시 이미 자라 있던 자신의 시간을 점차 쓰며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사랑했던 시간이고 치열한 삶을 살아냈던 시간이다.

그래서 데이지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하는 벤자민에게 “영원한 것도 있어” 라고 말한다. 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기억하는 우리의 시간이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느낀 모든 것들을 추억하고 잊지 않는 한 우리들의 시간은 영원하다.

시계 바늘이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화를 보고난 지금 필자는 르네 마그리트의 시간과 마주한다. 그의 화폭에는 벤자민과 데이지, 아니 우리 모두의 시간이 영원의 한복판에서 사랑이자 인생이란 이름으로 못 박혀 있다.

벤자민 시간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데이빗 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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