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전충남
당신은 파트너에게... 묵묵쟁이? 고집쟁이? 불평쟁이?
[리뷰] <워낭소리>가 내게 던진 3가지 질문
09.02.11 10:29 ㅣ최종 업데이트 09.02.11 10:29 김학현 (kimh2)
  
소 주인인 노인은 왜 그리 소를 고집할까? 굉음을 내며 옆에 논에서 트랙터와 콤바인이 달릴 때 소의 목에서 가느다랗게 딸랑거리는 워낭소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 스튜디오 느림보
워낭소리

 

“오마이뉴스 창간9주년 기념 <워낭소리> 특별단체관람에 초대합니다.”

 

공짜로 <워낭소리>를 볼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림의 떡이다. 왜냐고? 그건 배보다 배꼽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시골(조치원)에서 서울 중구 삼일로에 있는 독립영화 상영관 인디스페이스까지 가자면 영화 감상비 7000원보다 몇 배는 될 고속도로비와 유류비를 도로에 뿌려야만 한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이처럼 실감날 수가 없다. 가끔 좋은 연극이나 영화 등 문화행사에 <오마이뉴스>는 살가운 손을 내밀지만 그때마다 눈물을 머금고 지나쳐야 한다. 아마 서울 아니 수도권에 사는 이들은 이 심정을 모를 것이다. 이왕에 선심을 쓰는 거(?)라면 단체관람 말고 가까운 상영관을 가라고 티켓을 보내준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눈물만 훔치고 있기에는 <워낭소리>가 몰고 온 영화계의 태풍이 지나치게 예사롭지 않다. 영화 마니아까지는 아니어도 영화를 좀 사랑하는 나로서는 개봉한 지 한 달이나 되어가는 <워낭소리>이긴 하지만 안 볼 수가 없다. 이번 나의 <워낭소리> 관람은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독립영화이지만 개봉관이 확대되어 시골의 극장에서도 쉽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워낭소리>는 너무나 많은 소리를 들려줬다. 그래서 할 말도 많다. 두 차례에 걸쳐 다른 주제로 영화후기를 적을까 한다. 너무 많은 질문과 이야기를 한 번에 뭉뚱그리기가 내겐 너무 벅차다. 먼저 영화가 내게 던진 3가지 질문에 대하여 풀어놓고자 한다.

 

[질문 하나] 정말 존재하는 것이 맞는가?

 

삶의 질펀한 질곡을 그대로 간직한 튼 손이 투박하게 부여잡은 소의 목에서 떨어져 분리된 워낭. 화면에 등장한 소 방울은 그저 제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할 골동품이었다. 그러나 이내 워낭은 ‘딸랑딸랑’ 그 소리 낭자하게 뱉으며 논두렁 밭두렁을 헤집고 다녔다. 이것이구나! 관객들이 바로 이 낭자하게 울리는 워낭소리를 들은 거구나. 그리고 즉각 반응한 거다. 그게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기에 값진 것이라고 가격표까지 붙인 거다.

 

소 주인인 노인은 왜 그리 소를 고집할까? 굉음을 내며 옆에 논에서 트랙터와 콤바인이 달릴 때 소의 목에서 가느다랗게 딸랑거리는 워낭소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힘겨워 잠시도 걷지 못할 것 같은 노인이나 늙은 소 모두 소유를 위한 몸부림은 아닌 듯싶다. 더 소유하려면 트랙터와 콤바인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1974년 에리히 프롬이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를 통하여 현대 산업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 <워낭소리>가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너는 정말 존재하는 것이 맞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소유가 아니고 존재가 맞느냐고?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기에 <워낭소리> 같은 영화에 기대서라도 존재하는 것이 맞는다고 우쭐대고 싶은가 보다. 그게 나만의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야 <워낭소리>가 이리 관객몰이를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저 향수였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난 <워낭소리>의 한계를 보았다. 노인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수의사의 말을 듣고 늙은 소를 끌고 우시장으로 간다. 이내 흥정에 돌입한다. 그러나 값이 맞지 않는다. 이내 포기한다. 송아지를 팔 때도 마찬가지다. 값 때문에 실랑이를 하다 다음 날에야 송아지를 판다. 이 노인이 소유를 위하는가? 존재를 위하는가? 영화가 완전한 존재를 그려내지 못하듯 우리는 적당히 소유를 뒤로 미룰 줄 아는 것만으로도 존재하는 것이 맞는다고 믿고 싶은 시대를 사는 것이다.

 

[질문 둘] 함께 하는 짝이 어떤 존재인가?

 

  
노인은 소를 통하여 농사를 짓는 걸 고집한다. 한편 부인인 노파는 시류를 받아들이고 싶다. 소를 팔자고 성화다. 둘은 어울리는 짝이 아니다.
ⓒ 스튜디오 느림보
워낭소리

<워낭소리>의 영어제목은 <Old Partner>이다. ‘워낭소리’와 ‘Old Partner’는 전혀 뉘앙스가 다르다. ‘워낭소리’가 향수를 짙게 불러일으킨다면, ‘Old Partner’는 관계나 사회개념으로 비쳐진다. 어떤 면에서 동양과 서양의 정서를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하면서도 그 문화권에 너무 적절한 제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워낭소리>에는 여러 짝(파트너)이 등장한다. 노인과 소가 대표적인 짝이지만. <워낭소리>는 이들에게 비중을 두고 있다. 노인의 비틀리고 야윈 다리와 늙은 소의 어긋난 발굽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다. 진한 고난의 세월이 고스란히 그들의 하체에 묻어 있다. 둘의 걸음은 모두 느리다. 올곧지 못하다. 그래도 가고자 하는 길을 간다.

 

노인이 가는 길과 짝인 늙은 소의 가는 길은 항상 같다. 노인의 목표가 곧 소의 목표다. 노인은 소와 함께하기를 고집하는 고집불통이다. 소는 묵묵히 주인을 따르는 우직한 묵묵쟁이다. 둘은 너무 닮아서 소름이 돋을 정도다. 노인은 소와 같이 죽기를 원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둘은 천생연분이다.

 

하지만 노인과 노파는 다르다. 노인은 소를 통하여 농사를 짓는 걸 고집한다. 한편 부인인 노파는 시류를 받아들이고 싶다. 소를 팔자고 성화다. 둘은 어울리는 짝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노파의 입에서는 항상 불평이 튀어나온다. 팔자타령이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대부분의 말은 할머니가 한 말이다. 그녀조차도 말이 없다면 영화는 그야말로 무성영화가 될 뻔했다.

 

노파의 잔소리와 불평은 그저 불평일 뿐일까. 그게 그녀의 사랑의 방식일 뿐이다. 자기 방법대로 할아버지와 늙은 소를 사랑하는 방식. 새로 들여 온 젊은 소와 늙은 소의 파트너십은 어떤가. 적대적 관계다. 먹을 것을 놓고 항상 다툰다. 긴장이 팽팽하다. 인간관계도 이런 경우가 많다.

 

아내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말한다.

 

“여보! 나 이제 감사하기로 했어요. 할머니를 보며 새삼 난 당신에게 어떤 아낸가 생각했어요. 잔소리도 사랑이라는 괴변보다 당신이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했어요.”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하지만 좋아하기에는 이르다. 그럼, 난 내 짝인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영화는 그걸 묻고 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도록(이미 그렇게 희어가고 있지만) 사랑하고 아끼는 그런 짝이고 싶다. 아직은(?) 죽을 때까지 서로 버팀목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니 감사한 일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이 가는….

 

[질문 셋] 불편함을 선택할 수 있는가?

 

우리는 ‘빠름의 미학’ 속에 빠져 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해외여행을 하다가 ‘빨리빨리’라는 말을 여행국의 언어로 착각할 정도가 되었을까. “사장님, 사모님, 빨리빨리!” 이 말은 해외에서도 이국인들의 입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국 사람의 ‘빠름의 미학’을 알아 줄 정도가 되었단 반증이다.

 

‘빠름’은 다른 말로 ‘편리함’을 말한다. 대부분 빠른 것은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워낭소리>는 우리시대의 ‘빠름의 미학’을 역행한다. 영화는 빠름보다는 느림을, 편리함보다는 불편함을 고집하는 고집쟁이 노인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특별한 해석 없이 카메라는 노인과 소, 소와 산야, 노인과 노파, 노인과 트랙터, 자동차와 달구지를 따라간다.

 

지구온난화가 세계적인 빅 이슈다. ‘친환경농업’이나 ‘슬로우 푸드’ 등의 단어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인간이 살길은 이런 유행처럼 번지는 물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병들지 않기 위해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옛날의 불편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악하다. 그리고 한 치도 자신은 양보하지 않는다. 가르치려고는 하는데 배우려고는 안 한다.

 

영화 장면 가운데 자동차 곁으로 노인이 타고 소가 끄는 달구지가 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자동차 안에 내가 탔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가는 달구지가 얼마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인가. 아마 창문을 내리고 그 노인과 소와 달구지를 감상할 것이다. 그러면서 어릴 때 뛰놀던 고향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자동차에서 내려서 걷지는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감상이란 말인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런 감상적인 모습으로 <워낭소리>를 보지 않았을까. 영화가 내게 묻는다. “너는 지구가 인간과 더불어 오래 건강하게 살게 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가?” 감상문을 적고 있는 지금도 대답이 선뜻 되지 않는다. 이런 비극적 상황이 어쩌면 <워낭소리> 관객몰이와 신드롬을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 가슴 한편이 서늘하다.

 

  
자동차 안에 내가 탔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가는 달구지가 얼마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인가... 그러나 결코 자동차에서 내려서 걷지는 않을 것이다.
ⓒ 스튜디오 느림보
워낭소리

덧붙이는 글 |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최원균, 이삼순 주연/ 스튜디오 느림보 제작/ (주)인디스토리 배급/ 상영시간 78분/ 2009년 1월 15일 개봉
*이기사는 갓피플, 당당뉴스 등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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