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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어디로 갈까 묻는 남편에게 멀리는 갈 수 없고 근교산을 찾자니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어서 남편한테 선택권을 전적으로 주었더니 경주남산으로 가자고 했다. 여느 때 같으면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 보면서 정보를 미리 수집도 하고 목적지 산에 대한 스케치를 마음 속으로 하며 출발하는데 오늘은 그냥 무작정 따라 나섰다.

 

일찍 집에서 나섰지만 이것저것 볼 일을 보느라 오늘 산행 시간은 좀 늦어졌다. 어느새 정오가 다 돼간다. 울산 IC를 지나 경주로 가는 길, 경주 IC를 지나며 길을 묻는다.

 

“경주 남산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첫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경주 가까이 오면서 멀리 조망되던 그 산이 역시 남산이었나 보다. 멀리서 보아도 산 전체가 나무들 사이로 바위들로 뒤덮여 있는 것이 특이해 보였다. 용장마을에 도착하자 12시 40분이다. 천우사 임시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멘트 임도를 따라 조금 걷다보니 곧 등산로표시판이 친절하게 써진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바위 비탈에 선 남산의 푸른 소나무들

 

 

마른 모래 섞인 흙길은 발밑이 미끄럽다. 등산로에 들어서자 곧 경사 높은 길이 이어진다. 가풀막을 오르면서 벌써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두 사람과 마주친다. 산길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돌이나 바위들은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서인지 모 없이 둥글둥글하다. 한참동안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500미터도 채 안되는 산이라 만만하게 보았는데 처음부터 만만치 않고 산행로는 제법 험한 길이다.

 

남산의 공룡능선이라 불리는 암릉구간이 바로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바위들 틈에 뿌리를 내리고 비탈에 선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그 생명력 한 번 힘차고 강인하다. 위태위태한 바위, 흙도 거의 없고 뿌리를 깊이 내릴 만한 토양도 부족한 바위와 바위 사이, 비좁은 비탈에 기대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뎠을까.

 

 

계절은 겨울... 낙엽송으로 가득한 산야들은 모두 잎새 없이 앙상하게 침잠해 있는데 어쩌자고 소나무들은 이토록 사시사철 푸른빛으로 서 있을까. 높이 올라갈수록 소나무들은 몸이 굽어 키가 작다. 비바람을 견디며 이리저리 굽어 낮은 키로 서 있다. 한겨울에도 푸른 소나무 우거진 숲, 온통 푸른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산길을 오르는 것은 또 다른 신선함으로 와 닿는다.

 

소나무의 이름은

솔이야

그래서 솔밭에

바람이 솔솔하고

대답하며

저렇게 흔드는거야

- 이문구, 동시 '소나무'

 

소나무들은 거대한 암봉, 크고 작은 바위들 사이, 혹은 비탈에 몸을 기대어 서 있다. 나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마냥 푸른 소나무의 젊음, 그 청청한 기개가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지금은 겨울 한 복판, 봄이면 마른 나뭇가지들이 새순을 틔우고 연두빛 어린 잎새들을 꽃처럼 툭툭 터뜨리면서 완연한 봄으로 펼쳐놓다가 봄꽃으로 절정을 이루면 신록 무성한 여름이 시작된다.

 

푸름이 절정에 달할 즈음 온 산을 붉게 물들이며 가을로 이어지다가 겨울로 들면서 나무들은 화려하게 자신을 수식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침묵의 겨울로 침잠하는데 계절이 바뀌어도 언제나 푸른 소나무의 젊음은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한데, 오늘 뜻밖에 만난 그 푸름은 신선하게 와 닿는다.

 

경주남산 공룡능선을 넘다

 

 

공룡능선은 계속되는 암릉 구간이다. 안전밧줄을 의지해 크고 높은 바위를 하나 넘고, 다시 밧줄을 의지해 내려가 몇 걸음 걸으면 또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아 밧줄을 잡고 바위를 타고 올라간다. 바위능선은 어디까지 이어진 것일까. 여섯, 일곱 번 높은 암릉을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 힘이 쭉 빠진다. 아침엔 입이 까칠해 밥을 먹지 않고 숭늉 한 그릇으로 가볍게 먹고 나왔던 나는 산행하기 전에 샌드위치 하나 먹은 것이 전부다.

 

힘겹게 바위능선을 타고 올라오니 어느새 속이 허전해진다. 갈증이 나서 물을 가끔 마실 뿐, 늦게 시작한 산행길이라 갈 길은 멀고 마음이 바쁘다. 남산 공룡능선에서 몇 번이나 밧줄을 잡고 암벽을 타고 오르고 또 올라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한다. 우리가 왔던 길을 돌아보니 공룡바위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쌍봉과 금오봉, 고위봉 정상이 조망된다.

 

 

눈에 들어오는 남산 전체가 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다. 등산로 초입에서 하산하던 두 사람을 만난 뒤로 산 벗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적요감이 감돈다. 이따금 까마귀가 높이 날며 까악, 까악 소리 내며 산정 주변을 배회할 뿐이다. 귀 기울여보면 멀리서 두런두런 얘기소리 들리는 듯한데, 40여개의 계곡과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는 경주남산은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잠시 휴식하며 땀을 식힌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걷는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순하고 숲은 소나무들로 청청하다. 햇살이 바위 위에 하얗게 튄다. 계속되는 바위구간을 지나자 호젓한 산길이 나온다. 흙길을 걸으니 발걸음이 편한가 싶은데, 다시 앞을 가로막는 우뚝 선 암봉이 앞을 가린다. 밧줄을 잡고 바위를 타고 넘고 또 다시 앞에 버티고 서있는 바위를 넘는다.

 

“아이고 무시라, 뭣이 이런 산이 다 있담! 당신 뻥 친 거 아니에요? 494미터 산이 맞아요?”하고 나는 비명을 지르듯 남편한데 묻는다.

“맞아~!”

“경주남산에 공룡능선이 있다는 말 안했잖아요!”

“공룡능선이 있다고 하면 당신이 안 올까봐 일부러 말 안했지! 아까 등산로 입구에 써 있는 글 당신 못 봤지?”

“뭐라고 써 있었는데요?”

“겨울에는 위험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상대방 체력은 생각지도 않고, 얄밉게시리, 아이고~힘들어!”

 

 

정말이지 494미터 산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룡능선 구간은 아주 힘든 구간이다. 꼴랑 샌드위치 하나 먹고서 적 먹던 힘을 다해 올라온 것 같다. 그만큼 힘에 부친다. 경주남산 금오봉 쪽은 유물과 유적답사 위주의 산행이라면, 이쪽 고위봉 방향은 남산의 경치와 역동성을 즐길 수 있는 코스라 한다.

 

암릉을 타고 올라가는 고위봉 공룡능선은 꽤 힘든 구간이지만 이 암릉 높은 곳에서의 조망은 탁월하고 자연경관은 빼어나다. 하지만 노약자나 어린아이들과 올라오기엔 무리인 코스다. 하여튼 여섯, 일곱 번 정도의 밧줄을 타며 암봉을 넘고 또 넘어 앞으로, 앞으로! 가다보니 정상이 가깝다. 헬기장에 도착, 그 위에 바로 정상이다. 오후 2시 40분이다.

 

꽁꽁 얼어붙은 산정호수에서 썰매라도 타 볼까?!

 

고위봉(494미터) 정상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조망이 없다. 정상표시석 옆구리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남기는 것은 발자욱, 가져가는 것은 추억뿐!’ 늦게 시작한 산행, 갈 길은 멀고 마음은 바빠져 걸음이 자연히 빨라진다. 오늘은 거의 산악회 수준으로 잰걸음으로 걷는다. 이제 우린 온 길을 버리고 칠불암 쪽으로 가는 능선을 탄다. 흙길인데다 완만하고 호젓한 길이다.

 

오솔길 따라 이정표가 잘 되어 있는 능선길을 걷는다. 백운재 도착, 칠불암, 봉화대, 백운암, 청룡사지 등의 갈림길이다. 산정호수 방향으로 길을 든다. 이 길에선 소나무들 외에 다른 나무들도 섞여 있다.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조용한 흙길 따라 서 있다. 그리고 바윗길, 조릿대길 등 다양한 모습으로 길을 내고 있다. 산정호수에 도착, 호수는 꽁꽁 얼어붙어 있다.

 

 

얼음 두께가 얼마나 될까. 한 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어서 딛고 보니 제법 얼음이 두껍다. 내 몸을 얼어붙은 호수 위에 실어본다. 내 몸무게를 부담 없이 호수는 받아들인다. 어릴 적 하던 것처럼 썰매라도 쌩쌩 타고 싶어진다. 산정호수를 지나 계곡 길을 걷는다. 산정호수 밑에서부터는 계속해서 계곡 길로 이어진다. 계곡엔 제법 물이 흘렀던 것 같은데 물은 흐르다가 두껍게 얼음으로 변해 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엔 얼음이 얇고 얼음 밑으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3시 30분, 설잠교 앞이다. 설잠교는 매월당 김시습을 기려 설잠교라 이름한 다리이다. 우린 계곡을 따라 바로 하산할 것인가, 아니면 용장사지탑까지 올라갔다 갈 것인가 망설이다 시간이 좀 늦어져도 한 번 가보자고 마음을 모은다. 설잠교를 지나 잠시 용장사터(3:50)를 찾는다.

 

설잠교~용장사곡삼층석탑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초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곳으로 유명하다. 용장사터는 용장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장소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용장사터를 지나 이제 경주남산 용장사곡삼층석탑으로 간다. 공룡능선에서 멀리 조망되던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곳이다. 길은 아주 가파르다.

 

얼마쯤 가파른 길을 오르니 다시 바위구간이 나온다. 밧줄을 타고 오르고 또 다시 밧줄을 타고 올라간다. 오늘은 산행 길 내내 바위를 탄다. 힘들게 올라가니 용장사곡삼층석탑이 우뚝 속아 있는 바위봉우리에 도착한다. 오후 4시 05분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용장사터로 추정되는 저 아래에서 금오신화를 썼던 것일까.

 

 

이곳은 마주보이는 고위봉과 쌍봉, 공룡능선과 계곡, 용장리 등 두루두루 조망이 좋은데 여기서 쓴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고요하고 경치가 빼어나다. 용장사곡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 위쪽으로 더 올라가니 넓은 바위가 있어 마주보이는 고위봉과 공룡능선, 그리고 쌍봉 등을 바라보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

 

모처럼 조금 긴 휴식을 취한다. 어느새 해는 서쪽 하늘가에 있다. 이젠 하산해야 할 시간, 올라올 때의 험한 바위를 다시 밧줄을 타고 간다. 밧줄 타기는 올라올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든 것 같다. 밧줄타고 내려오는 바위구간을 지나 급한 경사로를 내려간다. 급경사 길을 내려서자 조금 완만한 길로 접어든다. 설잠교를 지나 계곡을 끼고 쭉 걸어간다.

 

 

계곡엔 저녁그늘이 들어 서둘러 발걸음 하여 천운사 옆을 지난다. 이젠 거의 다 왔다. 임도를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 20분이다. 아래쪽 유료주차장에 우리처럼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사람들이 보인다. 저들은 40개도 넘는 계곡과 거미줄처럼 수많은 산길 그 어느 길로 해서 돌아온 것일까. 수많은 갈래길이 있는 경주남산, 한 번 보고 어찌 그 속내를 알 수 있으랴.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만나야 할 것 같다.

 

 

<산행수첩>

1.일시:2009년 1월 20일(화).맑음

2.산행기점:천우사 임시주차장

3.산행시간:5시간 40분

4.진행:천우사임시주차장(12:40)-천우사입구(12:50)-조망바위(1:50)-남산공룡능선-헬기장-고위봉 정상(2:35)-백운재(2:55)-산정호수(3:00)-설잠교(3:30)-용장사터(3:50)-용장사지삼층석탑(4:05)-늦은점심 식사 후 하산(4:50)-설잠교(5:00)-천우사입구(5:15)-천우사임시주차장(5:20)


태그:#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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