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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풀빵 추운 겨울 군입거리로 풀빵이 오뎅만큼이나 도드라진다. 필자가 풀빵을 처음 맛본 것은 1960년대 후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 박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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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에는 붕어가 안 들어 있다. 그런데도 붕어빵이다. 단지 모양이 붕어같이 생겨서 그랬던 것이다. 그렇다면 풀빵은 왜 풀빵일까? 그것은 풀을 만드는 방법과 비슷하게 빵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공장에서 좋은 풀이 만들어져 나오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냄비에다 밀가루를 물에 개어 푼 다음 끓여서 풀을 만들어 썼다. 그것으로 도배를 하거나 봉투 같은 것들을 붙이는 용도로 썼다. 요즘 지물포 같은 곳에 도배용품을 살 때 나오는 풀이 바로 밀가루 풀이다(물론 지금은 순수하게 밀가루만 개어서 만드는 건 아닐 테지만).

지금 우리가 먹는 풀빵 즉, 국화빵이나 붕어빵은 옛날에는 지금처럼 팥이나 설탕 같은 '앙꼬'를 넣지 않고 단지 밀가루에 소금 간을 하여 쪄서 만들었다, 그때 반죽이 마치 풀을 끓일 때 반죽처럼 묽게 만들었다. 또 만드는 방법도 풀을 만드는 방법과 비슷해서 '풀빵'이라 이름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풀빵'은 풀 만드는 방법과 비슷하게 빵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

물론 그때는 내다 팔겠다는 것보다는 허기를 때우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리고 만드는 방법이 손쉽고, 비용도 적게 들었기 때문에 널리 상용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견한 예로 라면이 굶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대중화가 되었듯이 풀빵도 생활이 여의치 못했던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었지만 모두의 먹을거리가 된 것과 같다.

그런데 풀빵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판매를 목적으로 하게 되면서 주형틀을 만들어 굽기 시작했다. 그때 생긴 형틀이 국화나 붕어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후 속에다 팥 같은 앙꼬를 넣어 더 맛있게 만들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국화빵이나 붕어빵의 탄생이었다.

▲ 풀빵 풀빵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판매를 목적으로 하게 되면서 주형틀을 만들어 굽기 시작했다. 그때 생긴 형틀이 국화나 붕어 모양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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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풀빵을 처음 맛본 것은 1960년대 후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 몹시도 추웠던 날로 기억되는데,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읍내장터를 설빔을 사러 갔었는데, 그날 시장 한 모퉁이에서 풀빵을 만났다. 신기했다. 동그란 빵틀에다 멀건 밀가루를 죽죽 붓고는 'ㄱ'자로 꺾어진 갈고리로 팥 앙금을 조금 떼 넣고는 또 그 위에다 밀가루를 조금 덧씌웠다. 그랬더니 한참 만에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풀빵이 도드라져 나왔다. 연탄화덕이라 불 조절이 잘 안 되는지 빨리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차례를 기다릴 때는 오금이 다 저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래도 내 차례는 아직도 까마득했다. 그새 차례가 되어 더운 김이 솔솔 나는 풀빵을 한 입 베물고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무르팍에 턱을 잔뜩 괴고 한참을 더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되었다. 종이봉지(갱지)에 담긴 풀빵들, 하얀 설탕이 듬뿍 얹혔다. 하지만 이내 푹 사그라져서 서로 엉겨붙어버렸다. 그렇지만 참을 수 있나. 덥석 그중 한 개를 집어 후딱 입안에 넣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웬일. 뜨거워서 어쩔 줄 몰라 벌벌거리며 단박에 도로 뺏어내고 말았다. 너무나 아까웠지만 입천장이 데어서 그날 풀빵 맛은 어땠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별 느낌이 없다. 말 못할 정도로 뜨거웠고,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달짝지근했다는 것 밖에는. 

[풀빵에 대한 추억 하나] 입천장이 데일 정도로 너무 뜨거웠다

▲ 풀빵과 설탕 지금은 그다지 설탕을 좋아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풀빵과 하연 설탕은 마치 찰떡궁합과도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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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필자가 풀빵에 대한 아련한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중학교 때다. 그즈음은 시골뜨기가 용케도 마산이란 대도시(?)학교로 막 전학했을 무렵이다. 학교는 마산 산복도로변 완월동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 가는 길은 가팔랐다. 그래서 늘 종종걸음을 치기 십상이었다. 물론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수월찮게 갈 수 있지만, 이렇듯 우리들이 낄낄대며 걸어가는 목적은 바로 하교 무렵에 만날 수 있는 풀빵에 있었다.

"종국아, 너 돈 있나?"
"없다. 근데 왜 그라는데?"
"아니, 돈 없으면 됐다. 그만 가자."
"자식, 실없기는."
"사실은 학교 앞 가게에서 파는 풀빵이 먹고 싶어서 안 그라나."
"풀빵? 얼마만 있으면 되는데?"
"좀 배부르게 왕창 먹으려면 각자 50원은 있어야 될 거다."
"50원? 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나…."

그 당시 시내버스비는 입석버스(요즘처럼 가로로 좌석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가로만 앉을 자리가 있는 버스, 그러니까 앉아가는 사람보다는 서서가는 사람이 많은 버스다)요금이 8원 할 때니까(그 시절 라면 한 봉지는 18원이었다) 연 사흘은 걸어 다니며 버스비를 모아야했다. 물론 다리가 길어서 잘 걸어 다니는 친구는 별일이 아니었겠지만, 통통하게 생겨 다리가 짤록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결심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겨울 아침 그 찬바람을 무릅쓰고 30분을 더 걸어야하는 등굣길, 하지만 그날 친구랑 덜렁 약속을 하고 말았다. 학교 가는 것은 뒷전이고 풀빵이 먼저였던 거다!

학교 가는 것은 뒷일이고 풀빵이 먼저

▲ 잘 구어진 풀빵 지금 우리가 먹는 풀빵 즉, 국화빵이나 붕어빵은 옛날에는 지금처럼 팥이나 설탕 같은 ‘앙꼬’를 넣지 않고 단지 밀가루에 소금 간을 하여 쪄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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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사나흘 동안 풀빵을 향한 우리들의 의기는 대단했다. 평소 그렇게 늦잠을 자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하던 내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등교준비를 한다고 부산을 떨었으니 어른들이 무슨 일이냐고 뜨악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찬물에 세수를 하면서도, 아침밥을 대충 먹었으나 콧노래가 절로 났다. 눈앞에 한입 가득 풀빵만 떠올랐다. 역시 사내는 사내였다. 친구 인기(가명, 필자의 중학교 때 단짝 친구다)도 결코 결심을 져버리지 않고 날마다 제 시간에 나란히 걸으면서 꼬박꼬박 등교했다. 먼 등굣길이 힘들어도 둘은 그저 신이 났다.

"인기야, 너는 풀빵 몇 개까지 먹을 수 있겠나?"
"음, 먹어봐야 알겠지만 대충 서른 개 쯤은 안 먹겠나. 전에 계란 한 판을 삶아서 혼자 다 먹어 본적이 있거든. 근데 풀빵 한 개가 계란만 하겠나? 그렇지?"
"그야. 풀빵이 양이 적겠지. 그런데 서른 개는 좀 심했다. 너 배가 그렇게 크나?"

"우리 이 참에 내기 하나할까?"
"무슨 내기?"

"풀빵내기를 하는 거지. 우리 사흘 정도 걸어 다니면 풀빵 값은 충분하잖아. 그래서 하는 얘긴데, 풀빵을 누가 많이 먹는지 내기를 하자는 거야. 똑같이 먹으면서 끝까지 하나 더 먹는 사람이 이기는 거고 진 사람이 풀빵 값을 다 내는 것 어때?"
"넌 혼자서 계란 한 판을 다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난 별로 자신이 없다."
"자식, 겁내기는 한번 해보자. 밑져봐야 본전 아니야? 이왕 풀빵은 실컷 먹을 텐데."

"그래, 내기하자.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알았지?"
"종국이 넌 맨날 속고만 살았나. 알았어. 약속해!"

그날 학교수업은 너무 지루했다. 풀빵 생각에 그 좋았던 점심도시락도 채 반을 먹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인기랑 어떻게 하면 풀빵을 끝까지 많이 먹을 수 있을까 작전까지 짰을 정도다. 그래도 시간은 더뎌갔다. 하필이면 지겹도록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까지 겹쳐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예정된 시간은 다가오는 법. 마침내 수업을 마치고 보무도 당당하게 가방을 걸머메고 풀빵가게로 향했다.

▲ 풀빵 앙꼬 주형틀이 만들어지자 팥 같은 앙꼬를 넣어 더 맛있게 만들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국화빵이나 붕어빵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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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게 그리던 풀빵!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풀빵가게에 자리까지 차지하고 앉아 제법 품위 있게 풀빵을 주문했다. 그것도 무려 100원어치나. 가게 아줌마는 섬뜩하니 놀라는 눈치였다. 어린 학생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풀빵을 시키니까 실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인기와 내가 서둘러 돈을 내보이며 다시 주문을 했다. 그랬더니 아줌마는 반기듯 빵틀에 앉아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풀빵을 굽기 시작했다.

보무도 당당하게 가방을 걸머메고 풀빵가게로

빵틀이 뜨겁게 달아있었는지 잠시 후 곱슬곱슬하게 잘 익은 풀빵이 한 오봉이(쟁반) 하얀 설탕을 뒤집어 쓴 채 봉긋하게 담겨 나왔다. 인가와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뜨거워서 한 개씩 호호 불어가며 먹다가 풀빵이 어느 정도 식은 뒤부터는 두 개씩, 그 다음에는 세 개씩 겹쳐서 먹었다. 꿀맛이었다. 또다시 한 오봉이가 나왔다. 그때부터는 처음에 먹었던 것과는 맛이 훨씬 덜했다. 달달했던 뒷맛과는 달리 밀가루냄새가 와락 받혔다. 자꾸만 목구멍이 꺽꺽 맺혔다. 그럴 때마다 찬물 한 잔씩 들이켰다.

'이만큼 먹었는데 그만 둘 수 없지. 풀빵 값 100원이 어디냐? 억지로라도 먹어야 돼. 좀 있으면 인기가 먼저 못 먹겠다고 포기할 거야. 반드시 인기를 이겨야해!'

순간 필자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렇지만 풀빵 먹는데도 한계호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는 법. 마침내 빵빵해진 배를 쓸어가며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데, 인기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애써 괜찮은 듯 한 개를 더 집어서 입에 넣으려는 순간 인기가 배를 움켜지더니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에 가게아줌마도 나도 놀랐다. 인기의 얼굴 표정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아픔을 참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괴롭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도 인기와 마찬가지로 나도 '꺽'하고 쓰러졌다.

그 이후의 일은 어찌됐던 변고였던지는 상상에 맡긴다.

▲ 추억의 풀빵 지금도 그때 그 시절 친구랑 내기했던 풀빵가게가 생각난다. 그 아주머니 지금도 풀빵을 굽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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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참고로 밀가루 음식을 한꺼번에 많이 먹어도 안 되겠지만, 먹으면서 혹은, 먹고 난 뒤에 물을 많이 마시면 치명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뱃속에 들어간 밀가루가 얼마나 팅팅하게 불겠는가. 그날 이후 인기와 나는 풀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요즘 길거리를 지나치다 풀빵가게 앞에 서면 괜스레 풀빵내기가 하고 싶어진다. 병원에 실려가 죽어라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런 객기가 도진다. 사실, 그날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먼저 쓰러진 인기가 이겼다. 왜냐? 병원에서 어느 정도 살만해졌을 때 인기가 나한테 귓속말을 했다.

"종국아, 아나? 풀빵 먹기 내기에서 내가 이긴 것."
"왜? 네가 먼저 못 먹겠다고 쓰러졌잖아?"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난 네가 풀빵을 먹을 때 매번 난 한두 개 더 먹었거든."

<2부> 추억의 풀빵 이야기는 지난 20년 동안 오로지 풀빵 하나로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김상순(60, 창녕읍 교리)씨의 인생역정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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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지필문학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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