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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조금은 긴 여행을 다녀왔다. 가기 전 이런 생각을 했다. 이번 여행은 내 삶에서 두 번째 신혼여행이 될 거라고. 결혼한 지 벌써 6년째. 호주제 폐지 될 때까지 혼인신고 하지 않겠다고 주변에 천명한 뒤로 '진짜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호주제'라는 단단한 벽이 지난해 결국 무너졌건만 이상하게도 혼인신고만은 하기 싫었다. 태생이 반골인 건지, 나라에다 내 존재가 어떻다고 신고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타고난 게으름도 한몫 했겠지만. 

하지만 올해는 마음을 굳혔다. 혼인신고를 하겠다고. 호주제 폐지를 주창했던 나인만큼 그 결과를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더불어 혈연에 얽힌 존재가 아닌, 독립된 자아로 새롭게 서고도 싶었고. 어차피 이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가족등록부에 내 존재를 기록하는 것쯤은 더 피할 일만은 아닌 듯했다.

한 때 떵떵거리며 살았을, 이 집에 살던 사람들 숨결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 99칸 운조루 한 때 떵떵거리며 살았을, 이 집에 살던 사람들 숨결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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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름대로 작은 '의식'을 준비한 것이 이번 여행이었다. 2003년 결혼식을 올리고 푸켓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땐 가이드 말만 따르며 그저 편하게 즐기며 보냈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지역 곳곳에 살고 있는 지인들을 만날 계획을 세운 것. 한때 서울에서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이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마음으로 시골(?)로 내려간 그들을 만나, 나는 과연 어떤 시간들을 보냈고, 어떤 마음들을 가져왔을까?

첫 일정은 전라도 구례. 99칸 집으로 잘 알려진 '운조루'에 먼저 들렸다. 한 때 떵떵거리며 살았을, 이 집에 살던 사람들 숨결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쓴 저 커다란 뒤주를 보면서는, 가진 자들의 어떤 넉넉한 아량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첫날 밤은 지인이 새롭게 마련한 집(전세)에서 지리산 막걸리를 마시며 보냈다. 근처엔 온통 논밭과 비닐하우스뿐인 그곳. 저녁 7시에도 온통 새까맣기만 했는데, 그 깜깜함이 왜 그리 편하게 다가오던지.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도시가 싫어서 그랬을까, 단지 하루 겪을 뿐이라 그랬을까. 옛 조상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던 환경이 저절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조용한 어둠 속이라면 '도'를 닦을 수 있을 것도 같았고.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이 시키는 대로, 길이 나와 주는 대로 걸으면서 구례가 품어내는 향기를 몸과 마음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 인적 드문 구례 거리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이 시키는 대로, 길이 나와 주는 대로 걸으면서 구례가 품어내는 향기를 몸과 마음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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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엔 구례 곳곳을 걸어 다녔다. 길에는 사람이 없어서 마치 그 길을 우리 부부가 전세 낸 기분이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걸어 다니는 맛은 참 좋았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저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이 시키는 대로, 길이 나와 주는 대로 걸으면서 구례가 품어내는 향기를 몸과 마음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걷다보니 길가에 낙엽과 같이 뒹구는 밤송이들이 많이 보였다. 저것도 다 음식인데, 괜히 아까웠다. 인건비도 안 나와서 뒤집어 엎는 것조차 포기한 배추밭도 보인다. 애써 기른 농작물 거둘 인력도 없는데, 저절로 자란 밤송이들까지 주워 낼 여력은 없었을 테지.

구례에서 마지막에 들른 곳은 화엄사. 아는 분이 화엄사 근처에 계셔서 화엄사 이야기며 구례군이 놓인 현실들을 두루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인구 3만이 조금 안 되는 구례 사람들한테 화엄사가 미치는 영향력은 참 크다는 것, 지리산 관광특구라는 것 때문에 유명하긴 해도 구례에 사는 사람들은 자꾸 줄어든다는 이야기까지. 

걷다보니 길가에 낙엽과 같이 뒹구는 밤송이들이 많이 보였다. 저것도 다 음식인데, 괜히 아까웠다.
▲ 낙엽과 같이 뒹구는 밤송이들 걷다보니 길가에 낙엽과 같이 뒹구는 밤송이들이 많이 보였다. 저것도 다 음식인데, 괜히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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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만이 조금 안 되는 구례 사람들한테 화엄사가 미치는 영향력은 참 크다고.
▲ 문화유산이 많은 화엄사 인구 3만이 조금 안 되는 구례 사람들한테 화엄사가 미치는 영향력은 참 크다고.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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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듣자니 구례 사람도 아니면서 은근히 안타깝다. 명산 지리산을 끼고 있는 이곳에 산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자부심 넘치는 일일 텐데. 사람들을 자꾸 떠나게 만드는 농촌 현실이 피부에 와닿는다. 그나마 지난해 이곳으로 내려 온, 전날 만난 지인 가족 덕에 인구 세 명은 늘어난 거 아니냐고, 같이 웃으며 허탈함을 달래 볼 밖에.

화엄사 근처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달려간 곳은 경상남도 하동군. 전 회사에서 절친했던 사내 부부가 지난해 말부터 귀농해 살고 있는 곳이다. 여자 쪽 동료는 하동에서 쭉 자란 사람이기도 하고. 화엄사로 우리 부부를 데리러 온 남자 동료는 가장 먼저 악양면에 있는 산(700m)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산 정상까지 가파른 길을 차로 올라간 뒤, 우리 부부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그만 입을 '쩍!' 벌리고야 말았다.

대 자연 앞에 내가 한없이 작아지지만, 그 느낌이 또 한없이 좋기만 한 이 느낌. 산과 강, 논과 밭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만 같았다.
▲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 하동군 악양면 대 자연 앞에 내가 한없이 작아지지만, 그 느낌이 또 한없이 좋기만 한 이 느낌. 산과 강, 논과 밭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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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만 가깝게 보이는 하동군 악양면의 아늑한 풍경, 부드럽게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 눈물이 핑 돌 만큼 충격이었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어울리지 않았다. 뭐라고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대자연 앞에 내가 한없이 작아지지만, 그 느낌이 또 한없이 좋기만 한 이 느낌. 산과 강, 논과 밭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것만 같았다. 

남자 동료가 말하길 결혼을 앞두고 부인될 친구가 자기를 이곳에 가장 먼저 데려왔다고. 이 엄청난 풍경을 보고는 남자 동료도 이곳으로 내려와 살겠노라고 바로 마음을 정했단다. '너희도 어서 내려오라'는 은근한 흑심이 엿보이는 그 고백이 싫지만은 않았으니. 귀농 생각 미처 못 하고 있는 나지만, 혹 하게 된다면 무조건 이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들 만큼 저 풍경에 압도당한 나였기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 하동군 악양면에 둥지를 튼 동료 부부는 열심히 살 집을 고치는 중이다. 하동군에서는 빈 집을 고칠 때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고 있다(다른 지역도 비슷하게 그러는 줄로 안다). 그나마 일손을 사서 기본 틀은 갖춰 놓았지만 아직 사람이 살기엔 손 볼 곳이 너무나 많아 보이는 이 집을 보며, 우리 부부는 가자마자 팔을 걷었다.

내가 살 집을 하나 하나 손 봐서 만들어가는 일, 옆에서 잠시 거드는 우리도 이렇게 뿌듯한데 그 집에서 살게 된 저 부부는 얼마나 흐뭇할까, 부러웠다.
▲ 집 고치기에 팔 걷어붙인 부부 내가 살 집을 하나 하나 손 봐서 만들어가는 일, 옆에서 잠시 거드는 우리도 이렇게 뿌듯한데 그 집에서 살게 된 저 부부는 얼마나 흐뭇할까,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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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 타일 바르기, 벽에 황토 칠하기. 거친 일이 낯설지 않은 남편이지만 이 일만은 좀 힘든 표정이다. 그래도 하나하나 해보는 과정이 싫지 않은 듯, 바삐 몸을 놀린다. 내가 살 집을 하나하나 손 봐서 만들어가는 일, 옆에서 잠시 거드는 우리도 이렇게 뿌듯한데 그 집에서 살게 된 저 부부는 얼마나 흐뭇할까,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한테 주어진 일은 아궁이에 불 때면서 가마솥에 기름칠하기. 맨 처음 아궁이에 불을 붙였을 땐, 감격스러웠다. 내 손으로 해보는 건 처음이니까. 허나 감격도 잠시, 잘 탄다 싶다가도 어느새 꺼질 듯 아슬아슬해지고, 불씨를 살리려고 아궁이 가까이에서 입 바람을 불면 갑자기 올라오는 매캐한 연기에 깜짝 놀라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몇 시간을 아궁이 앞에서 웅크려있자니 허리는 아파오고, 눈은 맵고, 잔 나무가시에 찔린 손은 따끔거리고, 고생이 말이 아니다. 불씨 꺼트린 며느리는 쫓겨난다던 옛 말이 실감나더라니. 저 아궁이에서 피어나는 불씨는 한 집안에 정말 소중한 존재였을 법도 하다. 방도 떼야 하고, 음식들도 만들어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속담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닌가 보다.

이틀 동안 아궁이 앞에서 보낸 보람은 있어서 처음에 녹으로 가득했던 까만 솥이 많이 반들반들해졌다. 그러는 중에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불쑥 들어와서는 말참견을 하신다. "아니 요새 누가 불을 떼나? 젊은 사람들이…." "솥 더 씻고 기름 발라야지, 이래선 안 돼." 아마도 오랜만에 동네에 피어오른 연기가 그 어르신들도 반가워서 그러셨을 테지?  

곳곳에 펼쳐진 너른 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길, 엄마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산들을 두고 하동을 떠나는 마음은 참 아쉽기만 했다.
▲ 포근하고 아늑한 악양면을 떠나다 곳곳에 펼쳐진 너른 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길, 엄마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산들을 두고 하동을 떠나는 마음은 참 아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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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생고생하며 보낸 이틀. 곳곳에 펼쳐진 너른 들, 좁지도 넓지도 않은 길, 엄마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산들을 두고 하동을 떠나는 마음은 참 아쉽기만 했다. 그나마 큰 발견 하나는 했다. 고작 이틀 지낸 이곳에 그리 쉽게 정이 들었다는 건, 그만큼 나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에 마음을 많이 주고 있다는 방증일 테니까. 오죽하면 "여긴 땅 없어도 돼. 날품팔이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어"하며 슬슬 꼬드기는 동료 말에 어찌나 귀가 솔깃해지던지 말이다.  

4박 5일에 걸친 두 번째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나. 처음 결심한대로 혼인신고 할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가족관계증명서를 뗐다. 내 이름이 먼저 나오고, 부모님 이름이 밑에 나온다. 전에 본 호적등본에는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은 아예 없었고, 조금 지나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 옆에는 '제적'이라는 슬픈 낱말이 써있었다. 결혼한 언니 이름은 아예 빠졌고. 일제시대의 잔재, 악법 호주제는 그렇게 '문서'로 부모자식형제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새로운 가족등록부는 이렇게 그 안타까움을 달래주었다.

2004년 즈음, 혼인신고를 해볼까 고민한 적이 있다. 결국 안 하긴 했지만. 그 때 쓰다 만 혼인신고서가 그대로 있어 2009년판 그것이랑 잠시 비교를 해봤다. 본적 대신 '등록기준지'가 생기면서 '신본적'란은 사라졌고, 자녀의 성, 본을 어머니 것으로 원한다면 할 수 있다는 내용도 생겼다. 문서만 보면 작은 차이 같지만, 저 차이 덕에 (겪지 않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큰 시름 덜 많은 사람들이 생겼을 테다. 특히 여성들. 

문서만 보면 작은 차이 같지만, 저 차이 덕에 (겪지 않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큰 시름 덜 많은 사람들이 생겼을 테다. 특히 여성들.
▲ 새로운 가족관계증명서 문서만 보면 작은 차이 같지만, 저 차이 덕에 (겪지 않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큰 시름 덜 많은 사람들이 생겼을 테다. 특히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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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없고, 이혼 경험도 없는 나로선 호적에서 내 이름을 파헤침 당하는 '기분 나쁜' 경험을 겪지 않게 됐다는 것. 나아가 '내'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가족등록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주제가 폐지 될 때까지 혼인신고를 미룬 보람은 충분하고 또 충분했다.

'결혼'으로 새로운 가족제도를 맞닥뜨린 두려움에 떨던, 어수룩한 새신부로 떠난 첫 번째 신혼여행. 결혼 6년차를 맞는 중견 새댁으로 맞이한 두 번째 신혼여행. 두 여행 모두 참 즐거웠다는 것만은 같지만, 결혼한 뒤로 조금씩 바뀐 내 모습을 걸음마다 느낄 수 있었던 이번 신혼여행이 아무래도 나한텐 훨씬 소중하게 기억될 것만 같다.

우리 부부는 결혼식 때 서로 직접 쓴 혼인서약서를 읽었다. 결혼은 '무덤' 아니라,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아름다운 장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으로 확인시켜준 남편 것부터 다시금 읽어본다. 우리 부부가 함께 지키며 살고자 애쓴 소박한 '원칙'이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온다. 6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우리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갈 바로 그 원칙이.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불어 함께 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합시다. 세상의 변화에 우리를 맞추지 말고, 우리가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의 사랑이 서로의 구속이 아닌 홀로 선 두 사람의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로부터 노력하렵니다. 언제까지나 당신을 존중하며 남편으로서, 인생의 동반자로서, 동료로서, 연인으로서 살아가렵니다.  


태그:#호주제, #신혼여행,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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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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