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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름다운, 그러나 비극의 땅, 제주에서 유년, 소년 시절을 겪었던 작가가 4.3사태라는 무거운 주제를 밑그림 삼아 쓴 자신의 성장기록이다. 카메라로 찍어낸들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섬세한 필치는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작가란 그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드러내는 것인가. 4.3사태는 오랫동안 왜곡된 채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족이 죽어도 목놓아 통곡할 수조차 없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남은 가족들은 무서워서 숨죽이며 마음놓고 애도할 수도 없었으니 상여 없는 주검들이 그 얼마였을까. 사태 후에도 여전히 무서워 수십 년 동안 맘놓고 울어본 적이 없다던 그들은 사태의 참상을 말하려면 말이 너무 모자라 못한다고 했다.

 

석 달 넘게 산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옷도 신발도 벗어본 적이 없었다던 그들이 겨울 산에서 귀순의 백기를 들고 하산한 것은 총 맞아 죽더라도 햇빛 비치는 대로(大路) 한길을 걸어보고 싶어서였노라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3중고를 겪으면서 그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유격대장의 시신 앞 주머니에 사형 집행인이 꽂아주었다는 숟가락 하나는 오래도록 가슴을 후벼냈다. 이념도 사상도 아닌,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지니기 위한 단순한 몸부림(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소름끼친다는)이 이렇게 잔인하게 막을 내리다니...... 진압과정은 아름다운 자연마저도 왜곡되어 보이게 만들어 버렸다. 토벌대 사령부가 일 계급 특진을 미끼로 내건 목잘라오기 책략은 잔인하다 못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해 분노보다는 차라리 슬픔이었다.

 

하여 작가는 그 사태이후 꽃잎 한 장 한 장 떨어지지 않고 통꽃으로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의 그 잔인한 낙화가 선혈처럼, 아니 목 잘린 채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으로 보인다고 술회한다. 아직도 진혼되지 않은 수많은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으련만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사진을 찍으며 깔깔거리는 호사한 관광객들은 이 땅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알기나 한 것일까.

 

작가는 아버지와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시작으로 하여 50년의 세월 속에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그의 특유한 솜씨로 실타래 풀듯 풀어내서 어린 아이의 순진 무구한 눈을 통해 다시금 숨쉬게 한다. 비극적인 가족사와 함께 굴절된 우리 나라의 역사를 그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도 없이 파노라마처럼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데 그것이 읽는 이의 마음을 더 애잔하게 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에게 아픈 역사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물론 어린 가슴에도 지울 수 없는 죽음의 어두운 이미지와 우울증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폐허로 변한 잿더미 속에서도 시퍼렇게 솟아오른 어린 오동나무를 보고 무조건 자라는 것이 아이의 의무이므로 아이는 결코 과거에 붙들리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정착한다. 그래서 4.3 유복자들은 막무가내로 자라서 4.3의 저 짙은 폐허를 푸른 풀로 덮어 오늘의 아름다운 제주를 만들어낸 것일까.

 

끼니를 거를 정도로 가난했지만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잘사는 집 아이들을 부러워하기는커녕 별종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가난 역시 그의 천성을 어쩌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거의 모두가 가난한 시절에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가난한 자의 당당함마저 누릴 줄 알았으니.

 

등장인물들은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듯 정겨운 얼굴들이다. 그 중에 기억마저 아리고 소중한 어머니의 대범함은 감동을 넘어 숙연해진다. 동생을 업고 밥동냥 온 소년에게, 자신이 동냥해온 밥을 먹고 있는 자식에게서 빼앗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다. 제 자식 굶기고 남의 자식을 먹이는 그게 어디 어미로서 쉬운 일이었을까. 쓰고 질긴 질경이 나물을 차마 씹어 넘기지 못하자 그걸 먹었다고 죽지 않으니 삼키라고 꾸중하는 어머니는 강인한 여성의 힘을 보여준다.

 

그런 어머니가 몸져눕자 외할아버지께서 돼지고기를 사다주며 약이니까 자식들 눈치보지 말고 혼자 먹으라는 이야기는 애잔하다 못해 울컥 눈물이 솟게 한다. 그게 어찌 어미 입으로만 넘어가겠는가. 궁핍했던 그때는 고기가, 과일이 약이었다. 나 역시 아프다니까 엄마가 사주셨던 사과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끔씩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한바탕 벌이는 소동은 유일무이한 오락이자 격렬한 시합 같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미소짓게 한다. 어머니는 이런 지혜로 그 험난한 세월의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을 것이다. 호박 덩쿨이 꽃만 피우고 열매를 맺지 않자 나무라는 모습은 이제는 학설로 정립된 사물과의 대화 장면이다. 굳이 학문으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해내는 지혜로운 이 땅의 여인이었다. 곡식도 잘 자라야 한다는 할 일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게으름피우면 되느냐고 자식을 일터로 내몰던 어머니, 그렇게 매사에 부지런하고 꿋꿋했던 어머니가 소식 없는 남편생각에 울음이 복바치는 모습은 무능한 가장 대신 자신이 강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여인의 애틋한 부부애와 연약함을 느끼게 한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 흙을 뭉쳐 구슬 만들어서 놀았던 기억, 헌 책에 얽힌 추억, 극장의 추억, 몸이 아팠을 때 학교에 대한 그리움으로 못 견디게 외로워하던 모습 등 곳곳에 박혀 찬란한 빛을 발하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나의 이야기였다.

 

늘 외로움과 가난 속에 빠져있던 눈물 많은 섬 소년이 자연의 일부로 살아온 성장기는 한참 읽다보면 마치 나의 유년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아버지는 광기 어린 병으로 밖으로만 돌고, 어머니는 아기를 데리고 외가로 가버리고, 불화로 싸움이 잦은 조부모 밑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늘 외로움에 몸살을 앓았다. 부모의 부재로 인한 그 많은 시간들을 홀로 달래려면 눈물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손자가 안쓰러웠는지 할아버지는 열흘에 한 번 꼴로 하룻밤 자고 오도록 외가 출입을 허가하는데 날이 새면 다시 윗마을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별의 아픔이 잔잔하게 번져 나와 나도 모르게 어느 새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어머니 앞에서도 눈물을 감추는 외로운 아이.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졌을까.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도 외가는 늘 딴 세상이었다. 외로움과 어둠에 오래 시달렸던 그는 외가에만 가면 억눌렸던 어린애의 본성이 살아나 맘껏 뛰놀 수 있었다. 그에게 외가는 자연과 함께 또 하나의 젖줄이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자연과 함께 한 어린 시절이 얼마나 도도한 에너지로 흐르고 있는지.

 

고향의 자연은 그의 자아형성에 매우 중요한 몫을 했음에 분명하다. 유난히 눈물 많고 외로움을 타는 그를 숨쉬고 자라게 한 것은 자연과 더불어 문학과 독서였다. 숨막히는 세상에서 그나마 숨쉴 통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웠던가. 거기서 그는 수없이 방황하고 좌절하고 고뇌하며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해서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지금 자연에로의 귀향연습을 하고 있다.

 

읽고 난 뒤 나를 더 풍성하게 해준 이 책은 아득하게 잊고 있었던 내 유년의 기억을 퍼올려 주었다. 또한 유년의 추억이 얼마나 커다란 에너지로 승화하는지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의 밝은 태양보다도 망각된 과거가 더 중요하다고 했나보다. 그는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무수한 기억들과 그 기억들이 지니고 있는 풍만한 에너지들을 일깨워 주었다. 이런 넉넉함을 맛본 때가 언제였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행복했다. 그러면서 말로는 결코 다해줄 수 없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내 아이들이 읽어줬으면 했다. 먼 역사가 아니라 엄마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유년의 기억이 지닌 그 방대한 에너지를 깨닫기 위해서.


지상에 숟가락 하나

현기영 지음, 창비(2018)


태그:#유년시절,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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