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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에는 석조전동관이 미술관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이를 계기로 덕수궁이 서울시민의 온전한 미술관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이번 전에는 석조전동관이 미술관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이를 계기로 덕수궁이 서울시민의 온전한 미술관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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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내년 3월 22일까지 열린다. 어려서 그림을 봤던 석조전동관까지 이번 전시에 사용돼 덕수궁미술관의 얼굴이 제대로 살아난다. 게다가 근대화를 연 건물에서 한국근대걸작전을 보니 더 잘 어울린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천경자, 오지호, 구본웅, 이쾌대 등 1910년부터 1960년대 이전 105명의 작가가 총망라되어 있다. 국립미술관이 아니면 기획할 수 없는 전시다. 이 기사는 근대화의 또 다른 주역인 여성이 나오는 인물화를 통해 한국근대미술에 접근하고자 한다.

식민시대의 조류 속 정체성 찾기
 
임군홍(1912-1979) I '여인좌상 캔버스에 유채 126×94cm 1936 국립현대미술관. 김주경(1902-1981) I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캔버스에 유채 97×130cm 1929 국립현대미술관
 임군홍(1912-1979) I '여인좌상 캔버스에 유채 126×94cm 1936 국립현대미술관. 김주경(1902-1981) I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캔버스에 유채 97×130cm 1929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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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910년대를 보면 서양화를 처음 배운 일본유학파 1호 고희동이 한국화단을 주름잡았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서(양)화가 들어온다. 그 유파는 '인상파'다. 오지호와 같이 작업한 김주경의 작품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북한산 풍경(1929)'은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지는 못한다. 양산 쓴 여자는 세련돼 보이나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

1930년대부터는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1931)운동' 등 계몽운동도 시작된다. 그래서 민족적 자의식도 싹트고 우리의 고유정서도 재발견한다. 하지만 그 성과는 별로였던 것 같다. 미술에서는 정착기에 접어들면서 이인성 같은 대가가 혜성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임군홍의 '여인좌상(1936)'은 한복에 구두를 신은 신여성을 그린 것으로 관객의 주목을 많이 끈다. 이 그림에 빠져 있는 최진희(29·천호동)씨에게 소감을 물으니 "옆에 도상봉의 '여인좌상(1933)'와 다르게 공간에 여백이 있고 대비된 색감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최초 여성화가의 가시밭길

나혜석(1896-1948) I '무희(Dancers)' 캔버스에 유채 51×33cm 19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나혜석(1896-1948) I '무희(Dancers)' 캔버스에 유채 51×33cm 19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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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초 미술은 감각적 개성주의로 잠시 기운다. 하지만 41년에서 45년까지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한 암흑기다. '무희'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세계 일주를 하며 몽마르트르의 '캉캉'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제국의 정서인지 아니면 작가의 나르시시즘인지는 몰라도 화려하고 이국적이다.

나혜석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어 4번째로 일본에서 서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작가다. 그는 화가 이전에 문필가였다. 김억, 황석우, 오상순 등과 함께 <폐허>에서 활동하였다. 미술사학자 김미경은 그를 구문화와 신문화가 혼재되고 교차하는 작가로 평한다.

1921년에 '귀국전'을 열고 색채에 신선한 효과를 주는 '인상파 분할묘법'도 선보인다. 남편 김우영과 유럽여행을 하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 33인 중 한 사람으로 삼일운동의 동지였던 최린과 로맨스로 물의를 일으켜 이혼하고 말년을 불우하게 마친다. 그는 여성선각자로 한 시대의 희생자가 된 것인가.

미군정 과도기에 '양색시' 등장

이응노(1904-1989) I '거리의 풍경-양색시' 종이에 수묵담채 50×66cm 1946 개인소장
 이응노(1904-1989) I '거리의 풍경-양색시' 종이에 수묵담채 50×66cm 1946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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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45년 오래 염원했던 해방을 맞는다. 그런데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해방세대와 그 전후(前後)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금 우리사회의 지도층이나, 역설적으로 당시로는 배울 데도 없고 배울 수도 없어 문화적으로는 가장 빈곤층이라고 말한다.

하여간 이응노의 '양색시(1946)'는 주변강대국의 교체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로서 유일한 방패는 여자들의 희생뿐이었다고 말한다. 우선 생존해야 하기에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에 개의치 않는다. 과도한 노출에 신식머리하며 핸드백, 하이힐이 가관이다. 아니 너무 재밌다.
 
섹슈얼리티의 등장과 당당한 여성미

임군홍(1912-1979) I '모델' 캔버스에 유채 90×71cm 1946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1912-1950) I '빨간 옷을 입은 소녀' 캔버스에 유채 45×26cm 1940년대 후반 개인소장
 임군홍(1912-1979) I '모델' 캔버스에 유채 90×71cm 1946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1912-1950) I '빨간 옷을 입은 소녀' 캔버스에 유채 45×26cm 1940년대 후반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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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에 나온 '모델'은 요즘 콘셉트인 '섹시한 여성'이라 놀랍다. 1946년 박두진은 새롭게 도약하는 사회를 '해'라는 시로 비유했지만 이런 작품은 지금까지의 낡고 고리타분한 것에서 벗어나 뭔가 새롭고 참신한 것을 갈망하는 사회의 기류를 읽게 한다.

마티스풍이긴 하나 그가 차분하고 다소곳한 전통적 여성이 아니라 유혹녀처럼 관능적이고 외향적인 여자를 등장시킨 건 확실히 획기적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 시대상황으로 볼 때 한 시대의 터부를 깬 것이다. 시원한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해준다.

이인성의 '빨간 옷을 입은 소녀'는 1940년대 말 작품으로 소년 같은 짧은 머리에 교복 같으나 세련된 상의는 참신하고 귀엽다. 소녀의 내적 자아도 튼튼하고 발랄해 보인다.

비참한 전쟁 속 새로운 미술에 도전

이봉상(1916-1970) I '여인' 캔버스에 유채 105×91cm 1952 개인소장. 박고석(1917-2002) I '범일동 풍경' 캔버스에 유채 39×51cm 1951 국립현대미술관
 이봉상(1916-1970) I '여인' 캔버스에 유채 105×91cm 1952 개인소장. 박고석(1917-2002) I '범일동 풍경' 캔버스에 유채 39×51cm 1951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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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석의 '범일동 풍경(1951)'은 그의 수작으로 작가가 몸소 체험한 피난살이를 담고 있다. 거칠고 투박한 야수파내지 표현파의 화풍으로 검붉은 색이 강력하다. 당시 부산 범일동은 많은 화가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아이 업은 모습에서 지난한 삶이 느껴진다.

굶주림과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이봉상이 그린 '여인(1952)'은 서양화풍을 자기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하고 적용하여 재창조해 보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그는 미술을 독학한 드문 수재로, 과감한 생략으로 그림을 단순화시켜 현대미를 높였다. 그래서 입체파를 닮았다. 질감이 풍부한 염료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고 두꺼운 테두리선이 매력적이다. 1962년부터는 '신상회'에서 이대원, 하종현 등과도 활동하였다.

한국판 성모상, 머리에 짐을 이고 아이를 업고

이달주(1920-1962) I '귀로' 캔버스에 유채 113×151cm 1954 삼성미술관 리움. 박영선(1910-1994) I '향토(A Hometown Utopia)' 캔버스에 유채 194×131cm 1955 한국은행
 이달주(1920-1962) I '귀로' 캔버스에 유채 113×151cm 1954 삼성미술관 리움. 박영선(1910-1994) I '향토(A Hometown Utopia)' 캔버스에 유채 194×131cm 1955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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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에 휴전이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어쩔 수 없이 어머니들이 두 팔을 걷고 나선다. 짐을 머리에 이고 애들을 등에 매고. 이 나라를 지킨 건국의 소리 없는 전사들이다. 이렇게 되자 서양의 '성모상'과 견줄만한 한국의 '모자상'이 더 많이 그려진다.

이달주의 '귀로(1954)'가 그런 대표작 중 하나다. 처연하도록 거룩해 보인다. 박영선의 '향토(1955)' 또한 그렇다. 마치 하늘에서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 강림하는 것 같다.

1957년은 한국미술의 큰 변혁기

한묵(1914-) I '가족' 캔버스에 유채 99×71cm 1957 홍익대박물관. 박래현(1920-1976) I '노점 A' 종이에 수묵담채 266×212cm 1956 국립현대미술관
 한묵(1914-) I '가족' 캔버스에 유채 99×71cm 1957 홍익대박물관. 박래현(1920-1976) I '노점 A' 종이에 수묵담채 266×212cm 1956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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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의 '노점(1956)'과 한묵의 '가족(1957)'을 보니 당시 미술계의 질풍노도를 예감할 수 있다. 그해 반국전을 내세운 대학생중심의 4인전(1956)이 충격이었다. 한묵도 이에 수긍한다. 명동 '할매집'을 드나들던 장욱진, 이중섭, 박수근도 당시의 화단을 우려하였다.

그런 면에서 1957년은 한국미술계에 큰 변혁기다. 한묵이 속한 '모던아트협회'나 나중에 '악튀엘(현시점)'이 된 김창열, 박서보가 참가한 '현대미협'이나 예술의 생활화를 내세운 '신조형파' 그리고 국전중심의 '창작미술가협회' 등이 이때 생겼다.

미술의 제자백가시대라 그런지 한묵의 '모자상'은 이전과는 다르다. 입체적 요소와 따뜻한 추상이 뒤섞여 있다. 한편 박래현(김기창의 부인)의 '노점'은 모성을 탈피하고 여성을 부각시킨다. 그는 출중한 감각으로 해체와 종합을 구사하며 대통령상을 2번이나 탔다.

마침내 한국표 미술의 거장이 나타나다

박수근(1914-1965) I '노상의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32×23cm 1960 개인소장
 박수근(1914-1965) I '노상의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32×23cm 1960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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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려곡절 끝에 한국미술의 거장인 박수근이 나타난다. '노상의 사람들'에서 보듯 전후 힘겨운 서민의 삶을 애정 어린 눈길로 조명한다. 당시로는 그림의 소제가 안 되는 '판자촌', '맷돌질하는 여인' 등을 화강암 같은 마티에르로 조각하듯 그린다. 

박수근은 미술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예수의 삶에서 큰 감동을 받고 거기에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작품을 쏟아낸다. 아내를 극진히 아낀 그는 여성을 남성의 구원자로 봤다. 동네에서 과일을 사더라도 한데서 몰아사지 않는다. 이런 심경이 그대로 작품이 된다.

이번 전을 보고나니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구한 건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여성'으로 혹은 '양색시'로 혹은 삶에 활기를 주는 '대지의 여신'으로 혹은 짐을 이고 아이를 업고 생계를 잇는 '가장'으로 혹은 시대를 앞선 '선각자'로 혹은 '노상의 여인'으로 이 나라를 세운 공로자들임에 틀림없다.

덧붙이는 글 | 덕수궁미술관 서울 중구 정동 5-1번지. 전화 02)757-1800 입장무료.
http://deoksugung.moca.go.kr <한국미술100년 오광수·서성록저(현암사)> 일부참조



태그:#한국근대미술걸작전, #박수근, #임근홍, #나혜석, #고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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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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