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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새해 벽두, 그러니까 지금부터 11년 11개월 전 일이다. 긴급 운영위원회가 열린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8층 언론노련 사무실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연말 신한국당의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처리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민주노총은 물론 한국노총 등 노동계는 총파업 돌입을 선언해 놓은 상태였다. 언론노련도 파업 돌입 여부를 논의했다. 한 방송사 노조 위원장이 전면 파업 돌입을 제안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다걸기' 할 때라"고 역설했다. MBC 노조위원장이었다.

 

처음에는 설마했다. 그 누구도 언론사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결의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생색내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언론 현안이 걸린 사안도 아니었다.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이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기자와 PD들이 실제 파업까지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당시 참석자들의 반응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1997년 새해 벽두를 흔든 언론사 총파업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착각이었다.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언론노련은 별 준비 기간도 갖지 않은 채 파업에 돌입했다. KBS와 MBC, CBS, EBS 등 4개 방송 노조가 앞장섰다. 곧바로 파업찬반투표에 들어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4개 방송노조가 7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결코 흉내내는 정도의 가식이 아니었다. 기자와 PD를 비롯해 대다수 노조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불가피하게 취재 현장에 나가야 했던 일부 방송 기자들은 노조에 '확인증'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시청자들과 청취자들은 방송노조가 '사고'를 친 것을 즉각 알아 챌 수 있었다.

 

이들 방송 노조의 파업은 곧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방송·신문·통신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언론노조의 파업은 사무금융노련 등 이른바 넥타이 부대들이 총파업에 적극 참여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파업에 참여한 기자와 PD들은 직접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최루탄이 터졌다.

 

김영삼 정부와 신한국당은 결국 굴복했다. 언론사 노조까지 적극 참여한 전사회적 거센 저항에 직면해 후퇴해야 했다. 날치기 통과 시킨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다시 개정하겠다고 약속하고 겨우 정국을 수습할 수 있었다.

 

1997년 1월 16일 탑골공원에서 열린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언론노련은 총파업에 돌입한 이유를 "날치기로 유린당한 국민 주권과 질식당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라고 밝혔다. 그 때 한 노조 위원장은 지금이야말로 언론노동자들이 사회에 진 빚을 갚을 때라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굳이 빚을 갚고 말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양식 있는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공분할 만한 일이었으므로.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11년 만의 파업, 11년 전보다 후퇴한 정부

 

그런 그들이 11년 만에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얼핏 보면 이번에는 그 때와는 정반대인 것도 같다. 방송의 문제, 바로 자신들의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기본적으로는 언론의 다양성 등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11년 전과 큰 차이가 없다. 또 '날치기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 또한 그 때와 닮은 꼴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 때보다 훨씬 엄중해 보인다. 그 때는 그래도 국민적 저항이 있으면 정직하게 후퇴라도 할 줄 아는 정권이었다. 권력 내부에서 자신들의 오만하고 경솔한 행보에 대한 자성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거센 촛불민심에 잠시 고개를 숙였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더 보복적 탄압에 나서고 있는 정권이다. 그 때는 정권이 끝나가는 때였지만, 지금은 그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정권이다. 그 때는 강력한 야당이 있었고, KBS노조가 파업 대열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C노조 등 언론노조가 전면 파업에 들어간 것은 달리 선택의 방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박성제 MBC 노조위원장이 "방송을 지키기 위해 방송을 끊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도 말한 것 역시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번 파업은 언론노조로서는 '최후의 방법'이 될 개연성이 크다. 여기에서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정부 여당은 결코 물러설 태세가 아니다. 권력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언론노조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퇴로는 없어 보인다.

 

그런 만큼 '비상한 각오'가 요구된다. 당장은 방송을 지키기 위해 방송을 끊어야 하는 '역설'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가 그 첫 번째 관건이다. 11년 11개월 전 그 때의 '뜨거운 기억'의 재생이 필요하다. 파업 그 자체가 얼마나 강력한 메신저가 될 수 있느냐가 그 두 번째 분수령이 될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 식을 벗어나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가령 정부 여당과 일부 언론의 전방위적 공세에 대응하자면 그 전선을 지구촌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언론 정책과 관련해 정부 여당과 일부 언론이 주장하고 있는 온갖 해괴한 주장과 논리를 지구촌에, 특히 세계 주요 언론계에 널리 알리는 일은 시급하고 효과적인 대응일 수 있다. 지구촌의 관심과 연대를 이끌어내는 일이야말로 파업 참가자들이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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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언론노조 파업, #MBC, #최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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