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높은 분이 가장 천한 모습으로 오신 날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성탄절입니다.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 새해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는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기도는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건강한 몸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신데 대해 감사하고, 직장에 다니는 딸과 아내의 건강을 지켜주고 꿈과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지요.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해야 은혜를 받는다고 믿는 분들 중에는 저를 ‘뻔뻔한 사람’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떳떳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감옥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하나같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곱 살 때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와 인연을 맺은 저는 20년 후인 스물일곱 살 때 집사가 되었습니다. '서리' 딱지가 앞에 붙어 다니긴 했지만, 총각이 집사가 된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기독교에서 터부시하는 술과 담배가 저를 죄인처럼 가슴을 옥죄었습니다. 평신도도 아닌 집사가 알코올과 담배 냄새를 풍기며 교회에 간다는 것은 제 자신이 생각해도 용납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축복은커녕 벌을 받을 것 같더라고요.

 

신통한 점도 있었는데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과음한 날도 일요일 아침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했다는 것입니다. 또 교인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고 토요일에 과음한 날은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왔습니다. 

 

주일학교 반사도 열심히 했는데 소풍을 가거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카메라가 귀할 때라서 아이들이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보고 무척 기뻐했는데요. 당시 4학년이었던 개구쟁이들도 이제는 30대 중반이 되었겠네요.

 

헌금과 십일조도 착실히 내는 편이었는데, 십일조를 10만원이나 내면서도 수입금을 하나님께 거짓으로 고하는 것 같아 꺼림칙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달 수입이 300만원 정도 되었으니 30만원을 냈어야 했거든요.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집을 방문하면 꼭 식사대접을 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는 집사임에도 장로님들은 헌금을 성실하게 한다며 "조 집사는 우리교회 장로감이여 장로감!"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머쓱했는지 모릅니다. 실상 저는 장로가 될 자격도 마음도 없었거든요.

 

'총각점쟁이' 말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아들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던 어머니 영향을 받아서인지 등산을 가면 꼭 산사(山寺)에 들러 시주를 했습니다. 법당의 목탁소리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풍경소리가 시주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거든요. 그래도 가슴에는 항상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목사님 설교

 

목사님 설교에 실망한 것인지, 교회에 실증을 느낀 것인지, 시험에 든 것인지, 아니면 사탄에 빠진 것인지, 이순(耳順)이 다 되도록 이해를 못하는 목사님 설교와 교회 관련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첫째, 가깝게 지내는 학교 동창이 있었는데, 그가 다니는 교회와 제가 다니는 교회가 가까워 일요일 예배가 끝나면 길에서 종종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교회가 새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더니 얼마 후 분리해나가면서 형제와 남매 사이도 원수처럼 지내더라고요. 그런 광경을 목격하면서 예수를 믿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헷갈렸습니다.

 

둘째, 5·18광주민주항쟁을 빨갱이들의 난동으로, 군화발에 짓밟혀 죽어간 형제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목사들을 보며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예배 보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절이었는데도 진실을 말하는 목사님도 계시긴 했지만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더군요.

 

셋째,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사상과 이념이 다른 이웃을 비방하는가하면 우리의 전통문화를 폄훼하고, 타 종교를 비하하는 목사들의 설교였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사랑’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실망이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충격적인 부분을 요약하면, ▲ 부모 제사라도 절대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지 말 것. ▲ 이웃집 제사 음식에도 귀신이 붙었으니 먹지 말 것. ▲ 사탄에 빠지기 쉬우니 미신을 믿는 사람을 멀리할 것. ▲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와 교회만이 가능하다 등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집안일보다 교회일이 더 중요하다는 목사님 설교를 들을 때는 '교회에 더 깊이 빠지면 가족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는 싸가지 없는 교인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하나님 말씀이 적힌 성경책은 지금도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남편보다 교회를 더 믿었던 사촌형수 

 

같은 교회에 다니던 외사촌 형수가 있었습니다. 형수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도 새벽기도에 참석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중장비 기사였던 외사촌 형님은 공사현장을 따라 다녔기 때문에 한 달에 며칠씩 집에 머물렀습니다. 

 

하루는 사촌형에게서 놀러 오라는 전화가 걸려와 갔다가 형수님 얘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교회 얘기가 나왔는데 사촌형이 “오랜만에 집에 왔는디도 아침에 라면을 삶아먹고 하루 점드락 혼자 있을 때가 많다니께”라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사촌형이 불만을 터뜨리자 옆에 앉아 있던 형수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지가 춤바람 나서 돌아댕긴 것도 아니고, 교회로 예배보러 갔응께 조금 차려먹으면 되는디 형님은 올적마다 저렇게 신경질을 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해할 줄 알았던 형수가 불만스럽게 얘기하니까 난처하더군요. 당당하고 떳떳한 형수 주장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원만하게 해결해주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나가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객지에 있는 공사장에서 일하다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씩 집에 오는 남편의 아침밥보다 새벽예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촌형수를 보며 ‘좋은 일도 지나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예수도 ’쪼꼼‘만 믿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촌형수를 보며 다짐했던 마음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아침에 눈을 뜨면 건강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가족이 건강하고 꿈과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염치없고 뻔뻔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6절)

 

 


태그:#교회, #예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