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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이 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너무나 비정상적인 일을 목도하면서 빈혈이라도 걸린 듯 어지럽다.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가 누더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과 상식은 오간 데 없고 그저 혼란스러운 현실만 존재할 뿐이다.

 

지난 10개월은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기록을 잘 남기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지 파노라마 영상처럼 잘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 기록 유출 문제로 대통령지정기록물 전체에 대해서 영장을 발부하더니, 드디어 쌀 직불금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지정기록물 공개안이 12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원 247명 중 찬성 212명, 반대 9명, 기권 26명으로 통과되어 버렸다.

 

정치권에서 벌어진 '이상한 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13일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한 국가기록원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정말 집요하다.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보물이라도 숨겨두었는지 온갖 곳에서 보여달라고 아우성이다. 필자는 대통령기록물법이 제정될 때 대통령지정기록물이 보호되지 못할지 꿈에도 몰랐다.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다닌 것 자체가 후회스럽다.

 

이번 쌀 직불금 문제와 관련된 대통령지정기록물 공개 논란은 코미디에 가깝다. 이번 사태는 쌀 직불금 문제와 관련해 전 정부의 감사 결과 은폐 의혹을 규명하는 데 핵심 기록인 '참여정부 청와대 관계 장관 대책회의 회의록'을 열람하겠다는 의도로 벌어졌다.

 

쌀 직불금 문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도가 집중되고 있어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여론을 의식해 노무현 전 대통령도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대통령지정기록물을 공개하겠다고 언론을 통해 발표까지 했다. 이것으로 이번 논쟁이 정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나라당에서 "참여정부의 대통령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에 이관돼 있지, 노 전 대통령이 보유하고 있지 않다"며 "또 대통령 기록물은 사유물이 아니고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공개할 권한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대통령기록물법의 예외규정으로 규정되어 있는 "국회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을 얻어 공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국회에서 통과시킨 법안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다. 대통령지정기록물 공개 규정을 두고 있는 대통령기록물법 제17조(대통령지정기록물)에는 "대통령기록관의 장은 전직 대통령 또는 전직 대통령이 지정한 대리인이 제18조에 따라 열람한 내용 중 비밀이 아닌 내용을 출판물 또는 언론매체 등을 통하여 공표함으로 인하여 사실상 보호의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인정되는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대하여는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호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 라고 규정되어 있다.

 

위 법안을 다시 정리하면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고, 열람한 내용을 외부로 공개하면 대통령기록관의 장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을 해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비밀기록을 예외로 하고 있다.

 

애초 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할 때 대통령지정기록물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직 대통령에게만 해제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렇게 법안을 제정한 이유는 대통령 지정기록물 자체가 전직 대통령에게는 보존하기가 아주 부담스러운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대통령지정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않고 개인적으로 보관하거나 파기해 버린 역사만 보더라도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를 만든 취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쌀 직불금 사태와 관련해 논란이 있다면 이는 노 전 대통령이 위와 관련된 기록을 열람하고, 스스로 언론을 통해서 공개하면 쉽게 정리가 되는 문제다. 비밀기록을 규정하고 있는 보안업무규정 특성상 '쌀 직불금 관련 청와대 관계 장관 대책회의 회의록'은 비밀기록으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 위자료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에게 칼이 되는 기록물, 누가 공개할까

 

전직 대통령 스스로 대통령지정기록물을 공개하지 않고 국회 동의를 통해 해제하는 전통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문제가 되는지 짚어보도록 하겠다.

 

우선 대통령지정기록물 자체가 생산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은 ▲ 군사·외교·통일에 관한 비밀기록물 ▲ 대내외 경제정책 ▲ 정무직 공무원 등의 인사에 관한 기록 ▲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기록물 ▲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을 표현한 기록 등으로, 공개할 경우 국가적 혼란 및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기록들이다.

 

전직 대통령에게는 아주 민감한 기록이지만 후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감한 대통령지정기록물이 1년도 보호되지 못하고 국회에서 공개되는 역사를 보면서 어느 대통령이 기록을 온전히 보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의문이다. 관련 기록이 전직 대통령 본인에게 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향후에는 기록 자체를 생산하지 않거나 생산하더라도 무단 폐기 혹은 유출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노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전직 대통령의 기록이 대통령기록관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임 정권이 대통령지정기록물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해도, 기록물을 온전히 생산해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법률에도 규정되어 있지만 대통령지정기록물은 공개될 경우 ▲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험 ▲ 국민 경제의 안정을 저해 ▲ 생명·신체·재산 및 명예에 대한 침해 발생 ▲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기록들이다. 말 그대로 공개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통령지정기록물 공개 자체가 국가적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런 파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기록을 직접 생산한 전직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전직 대통령과 상의 없이 국회에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을 공개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역사적으로 차분히 평가받아야 할 기록이 오히려 국가적 혼란을 일으키는 존재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0년 전 역사도 진실 규명할 수 없는 한국 현실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지난 13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 들어서고 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피해는 모두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국회를 통해 대통령지정기록물을 해제하는 전통이 생기면, 대통령 기록을 남기지 않는 불행한 전통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런 전통의 피해자는 1차적으로 우리 국민과 후세다.

 

얼마 전 최규하 대통령이 서거하는 것을 보면서 10·26, 12·12 및 5·18과 관련된 진실이 묻혀 버렸다. 불과 30년 전의 역사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는 현상이 정상적인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최 전 대통령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외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아 발생하는 국가적 피해는 금액으로 환산도 못할 정도로 막대하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피해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업적이 바로 대통령기록물을 꼼꼼하게 후세에게 남겼다는 점이다. 이 기록은 후세에게 물려줘야 할 우리 사회의 큰 자산이다. 또한 이 대통령뿐만 아니라 후임 대통령들도 노 전 대통령처럼 자신의 기록을 철저하게 남기는 것이, 그리고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다.

 

하지만 국회의 지정기록물 공개 결정으로 앞으로 이런 요구를 하기 힘들어졌다. 어떤 대통령이 1년도 보호받지 못하면서, 본인에게 칼이 될 수 있는 기록을 남기려고 하겠는가? 국회의 이번 공개 결정은 조금씩 정착되어 가고 있는 기록 문화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이 국회에서 해제되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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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진한 기자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www.opengirok.or.kr)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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