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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사르트르가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한 지식인에 대한 명제는 아직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식인이란 진리를 억압하고, 가난한 자 편에 서서 권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자를 뜻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 사회에 진리를 억압하고, 가난한 자 편에서 서서 권력-정치, 경제, 언론-에 저항하는 지식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사회에서 저항하는 지식인은 '죽었다'고 선언 한 책이 나왔다. 물론 이 책은 지식인의 죽음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진리와 불의에 저항하는 지식인이 다시 부활을 고민한다. 2007년 4월부터 9월까지 4개월 동안 언론사로서는 처음으로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변론문을 모은 <경향신문>이 펴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다.

 

사르트르 말처럼 지식인이란 태생적으로 저항하는 자이다. 하지만 민주화 20년 동안 우리 사회 지식인은 “이제 사회는 외세에 억눌린 민족을 구원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이끄는 안내자, 민중 이익의 수호자, 위대한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서 지식인을 원하지 않는다”가 되었다.

 

도도한 역사 물결에 저항적인 지식은 휩쓸려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권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지식인이 아니기에 오히려 권력을 위하고, 권력 체제를 지키는 수호자일 뿐이다. 권력 수호 전위대로 초라하게 전락해버린 지식인 사회라고 통렬히 비판한다.

 

저항하는 지식인에서 권력에 순응하는 지식인, 자본에 순응하는 지식인으로서 지식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독재권력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과 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이 도입되면서부터였다.

 

평생 민주주의를 위하여 힘썼던 김대중 정부 시절 학문과 지성을 통하여 권력에 저항했던 지식인을 '신지식인상'을 대처하여 결국 지식인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일 뿐,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었다는 비판은 마음을 아프게한다.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지식인은 '경제권력'과 어울리게 된다. 경제권력에 순응하는 지식인은 결국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 중이며 대기업 연구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23쪽)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저항했다. 시대정신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 저작들, 장준하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 김현의 비평 의식. 이들은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저항했다. 그 저항은 사라졌고, 자본 권력의 도도한 흐름에 휩쓸려버린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양극화되고,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가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없는 데도 지식인은 저항하지 않는다. 신분제 사회로까지 나아가는 현실이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지식인은 죽은 자이다.

 

"한국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상 중 상류층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 고착화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 박사가 최고곡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 괄호를 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야할 화두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라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 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56쪽)

 

지식인들은 ‘지식인의 죽음’을 부른 요인을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 ‘자본종속과 시장논리지배’ ‘서구 학문 중심주의 및 의존’이라고 말하다. 서구학문 중심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 서울대 사회과학대 경제학과 교수 34명 중 31명, 정치학과 11명 중 10명, 외교학교 11명 중 10명, 사회학과 14명 중 9명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지적은 우리대학 현실이 얼마나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인지 알게 한다. 보수와 진보가 별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양성한 지식인이 없다. 우리를 말하고, 우리 사회를 말할 수 있는 지적 풍토는 없고, 껍데기라도 미국에서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자생적 지식인의 학문 성과가 더 탁월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지식인사대주의'도 보수와 진보할 것 없이 팽배해 있다는 비판은 진보지식인들이 새겨할 내용들이다.

 

특히 5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제권력과 지식인'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지식인들이 이제는 자기 신념을 자본에 팔아버렸다는 강한 비판은 경제권력이 정치 권력 우위에 자리잡았음을 알게 한다.

 

“심각한 문제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인의 신념을 팔아 버린다는 데에 있다. 기억 프로젝트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버리면서 무리한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다.” 128쪽)

 

이는 지식인 개인문제가 아니라 ‘기업문화’의 변화에 기인함을 지적하고 있다. 기업은 이제 돈만 버는 조직이 아니다. 돈만 버는 조직으로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사회적인 사업을 통하여 기업이 이윤을 남기는 시대이다. 물론 궁극적 목적은 이윤이다.

 

기업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만 이윤은 사회와 나눔으로 말미암아 이윤만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사회와 공익을 위한 기업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기업 발전이 우리 사회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이데올리기를 심어줌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가 먹혀 들어가고 있다.

 

“기업의 영역이 정부는 물론 전 사회로 확장되고 있고, 기업 없이는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불가능하다는 담론이 확고해진 상황에서 지식인 개인으로서 택할 수 있는 길은 기업에 속하든지, 아니면 척을 지든지 둘 가운데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재벌에 좋은 것이 한국에 좋은 것이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로 들어섰기에 지식인은 이제 재벌에 좋은 것이 한국에 좋은 것이라는 이 이데올로기적 지배장치의 생산 기술자로 전락했다는 지적은 충격이다.

 

하지만 비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지식인은 죽었지만 대중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은 대중 지식인들이 지식을 나누는 공간이며, 지식인들이 독점했던 지성을 논쟁과 물음을 통하여 대중지성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으로 통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성공간인 인터넷을 통하여 우리는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고, 선(善)의지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면 된다. 그 중 하나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제도도 대중지식인을 통한 대중지성을 만들어가는 귀중한 공간이다.

덧붙이는 글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ㅣ 후마니타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후마니타스(2008)


태그:#지식인, #정치, #경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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