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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정문
▲ 돈화문 창덕궁 정문
ⓒ 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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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단풍이 기막히다"는 친구의 전언을 받고 11월 16일 틈을 내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임금님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보던 아름다운 궁궐이다.

임진왜란에 불타버린 궁궐을 광해군이 다시 지었는데, 동아시아 궁궐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인 조형미를 갖춘 대표적인 궁궐이란다. 또한 주변 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건축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가 되었다. 정문인 돈화문(보물 383호)은 현재 남아있는 궁궐정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돈화문으로 들어가 건너가는 금천교는 풍수지리상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르게 하여 그 곳을 들어가는 이들은 그 물에 속세의 때를 말끔히 씻고 들어간다는 뜻으로 유명사찰에도 같은 의미의 다리가 있다. 금천교도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돌다리 중에 가장 오래되었으며 다리 아래에는 벽사의 의미로 해태상과 거북상을 그려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동궐의 정전
▲ 인정전 동궐의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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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문(보물813호)을 지나 인정전(국보225호)으로 들어가 보았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에 해당하는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식과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장소이다.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를 했다. 창덕궁은 경복궁 동쪽에 있다하여 동궐이라고도 불렀다.

임금이 정사를 보던곳
▲ 선정전(청기와), 희정당 임금이 정사를 보던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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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옆 선정전(보물 814호)은 평소에 임금이 국사를 보던 편전이다. 이 건물은 유일하게 궁궐에 남아있는 청기와 건물이다. 이곳에서 임금은 일월오봉도 병풍을 치고 좌우에 신하들과 정사를 보며 사관들은 사초를 쓰고 실록을 편찬했다.

희정당(보물815호)은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고, 대조전(보물 816호)은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과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이 있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그것은 곧 임금이 용이기 때문에 한 나라에 두 용을 둘 수 없다는 뜻에서라고 한다.

석복현, 수강재, 낙선재
▲ 낙선재 석복현, 수강재, 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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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석복현, 수강재, 낙선재가 일직선으로 있는데 이것을 통 털어 낙선재라고 부른다.

낙선재는 헌종의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었던 건물이다. 왕비나 세자빈 간택 시에 왕자나 세손은 참석할 수가 없는 법이지만, 유독 헌종은 삼간택에 참석하여 자기 눈에 드는 여인을 선택코자 했다. 눈에 든 여인이 김씨였는데 왕비간택에서 탈락되자 후일 다시 불러들여 후궁으로 앉히고 은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낙선재는 33세에 홀로된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 윤황후가 거처했고, 윤황후의 배려로 일본에 있던 방자여사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여 그 곳에서 함께 거처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윤황후가 돌아가시고, 방자여사는 정신이상과 실어증에 걸린 덕혜옹주를 평생 돌보아 주었지만 방자여사가 먼저 떠나고 덕혜옹주는 77세까지 살았다.

몰락한 왕가의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는 한때 성북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왕가의 체통을 지키며 홍천사에서 불공을 드리곤 했는데, 그 당시 이승만정부와 싸워서 낙선재를 되찾은 분이다. 그리고 6, 25때는 낙선재에 들이닥친 괴뢰군들에게 “여기는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라고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부용정 단풍
▲ 부용정, 부용지 부용정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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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눈시리게 울창한 단풍숲에 취해 못다한 가을 정취를 만끽해도 좋은 시간,  언덕을 넘으면 흔히들 비원이라고 부르던 후원인데, 천원지방 사상을 담은 부용정과 부용지가 있고, 정조가 지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이었던 주합루가 있으며, 영조어필로 된 현판이 붙은 왕족 휴식처인 영화당이 고색창연하게 대자연의 품에 안겨있다.

그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느라 통 돌을 깎아 만들었다는 불로문을 지나면, 기오헌과 의두합이 나오는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지었다는 이 건물은 청렴결백한 선비의 집처럼 소박하게 단청을 하지 않았다.

효명세자는 순조의 명으로 3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여 안동김씨 세도를 견제하였으나 22세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궁중무용을 정재로 집대성할만큼 예술적인 안목과 재주가 뛰어난 효명세자는 승하후 익종으로 추존이되었지만, 비운의 소현세자에 버금가는 아까운 인재였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실버넷뉴스에도 올림



태그:#창덕궁, #천혜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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