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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전면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것은 물자와 병기의 확연한 열세 때문이었다.  일본은 국민들의 생필품에서 물자를 공출하는 한편, 인간을 병기로 만들어 소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의 특공주의는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투 부대원 전원이 전사하는 처절한 일이 비일비재로 발생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은 전체 병력을 합리적으로 통제· 교육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우수한 소수를 선발하여 그들의 특정 능력만을 집중적으로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을 마치 과학 병기처럼 만들었다. 이른바 명인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인은 소수이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육군은 전군을 특공대로 만들기 위해 가혹한 훈련을 강행했다. 그들은 총검이나 수류탄을 들고 적진에 뛰어드는 자살 공격을 전투의 기본 방침으로 채택했다. 그들에게는 자동소총도 없었다. 만들 수는 있지만 탄약을 너무 많이 소모한다는 이유로 장비에서 제외한 것이다.

1943년 5월 29일, 2500명의 일본군이 알류산 열도의 아투 섬에 고립되어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 야마사키 야스요 대령은 부하들에게 최후의 훈시를 남긴다.

"총탄이 없어지면 총검으로 돌진하라. 총검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 대결하라. 주먹이 깨지면 이빨로 적을 물어뜯어라. 그리고 신체가 무너져 심장이 멎으면 혼백이 되어 적진에 돌격하라. 전신, 전령을 다하여 명예로운 황군의 신수를 현현하자."

이와 같이 작전 명령이 '혼백이 되어 적진에 돌격하라'라는 식으로 추상화된 것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군의 정신 교육과 군사 훈련을 뒷받침하는 것은 기합이라는 이름의 집단 린치였다. 그것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손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일상화되어 있었고 혁대나 가죽 슬리퍼로 얼굴을 때리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병기 청소용 쇠꼬챙이, 곡괭이 자루, 텐트 용 말뚝 등,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기합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병들에게는 서로 마주보고 뺨을 때리게 했고, 총검술용 목총으로 상대방을 찌르게 했다. 또한 깍지 끼고 엎드려 뻗치기, 엎드려 뻗쳐 자세에서 발을 침상에 놓게 하여 고통을 가중시키기, 담요로 덮고 여럿이 마구 짓밟기, 기둥에 오르게 하여 한손으로 코를 잡고 매미 울음소리 내게 하기, 군화 두 짝을 끈으로 연결하여 목에 걸고 바닥을 기게 하기 등의 가학적인 기합들이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일본 군대에서는 '군인정신 주입봉'이라는 몽둥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병영에서는 매일 몽둥이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병사들의 엉덩이는 보라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이른바 '빠따'라는 것이었는데, 수십 대 이상 맞아 실신하는 병사들도 부지기수로 나타났다. 그들은 실신한 병사에게 놋쇠 대야에 담아 놓은 물을 끼얹고 다시 때렸다.

어떤 신병 하나는 상처가 심해 훈련을 받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침상 아래로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엉덩이가 썩어서 짓물러 터진 것이다. 매일 그런 일을 당하는 병사들의 엉덩이는 굳은살이 옹이처럼 박이면서 검은 빛깔로 변색되었다.

사람보다 물자와 병기를 더 중시한 일본 군대

물자가 달렸던 일본군은 병기나 군마는 보충할 수가없는 반면 인적 자원은 보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당연히 인간이 병기나 군마보다 열등하게 취급되었다. 일본 군부는 누적되는 병사들의 울분을 적에게 돌려 폭발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내부의 폭력이 외부로 분출하는 억압의 전이적 양태를 띤 것이었다. 그들은 포로를 학대했고 민간인을 학살했다. 마침내 일본군은 인간성을 죄다 잃어가고 있었다.

일본군의 인간 소모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무항복 철칙'이었다. 미군은 최선을 다한 뒤 상황이 악화되거나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하면 적군에게 항복했다. 미군은 항복한 후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명예를 더럽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우선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본국의 가족에게 알리려 했다.

미군 포로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여 생존 소식을 고향 가족이 알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하자, 일본군은 아주 당황해 하며 그런 요구를 하는 미군을 경멸했다. 일본군의 명예는 죽을 때까지 싸우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마지막 남은 한 방의 수류탄으로 적진에 가 엎어지거나 스스로 자결해야 했다. 혹시 부상당하여 포로가 되었더라도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영웅에 대한 과신과 함께 개인에 대한 불신은 이른바 파시즘의 속성이다. 일본 군부가 병사들에게 그리도 가혹했던 바탕에는 바로 파시즘이 있었다. 그들의 정신주의는 기실 병사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또 다른 파시즘의 속성으로서 적에 대한 과장된 흑색선전이 있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이 상륙하면 군인은 탱크로 깔아 죽이고 부녀자는 겁탈하며 노약자는 살해한다고 선전했다.

1944년 10월 23일부터 3일 동안 필리핀 동부 연안의 레이트 만에서는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이미 미국은 7월에 사이판을 빼앗음으로써 B-29 기로 일본 본토를 폭격하게 되었고 다음 달 8월에는 괌을 되찾은 상태였다. 미국은 여세를 몰아 필리핀을 점령함으로써 일본 본토 공격의 거점을 확보하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필리핀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이 필리핀 해전에서 예측대로 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일본의 항공모함 4척과 순양함 10척 그리고 구축함 11척 등 모두 28척의 함정이 침몰했다. 반면 미군의 함정 피해는 3척에 불과했다.

왜 일본군은 죽으면서 적군을 죽여야 합니까

그러나 미국은 대승에도 불구하고 이후 전황을 쉽게 풀어나가지 못한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 방어 작전에 제1항공함대를 참가시켰다. 그런데 바로 이 제1항공함대에는 별종의 특공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정면 대결로 승산이 희박하다고 본 일본군의 최후 발악이었다.

10월 25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일본의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부하 조종사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으로 품고 있었던 작전의 개요를 말하고 그들의 동의를 구한다. 그는 부하들이 미숙련 조종사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비행 기술로 미군의 방공망을 뚫고 폭격에 성공하기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폭탄을 싣고 목표물에 곧바로 돌입하여 부딪치는 일은 미숙련 조종사들에게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들은 미군의 해상 지배에 대항하는 전율스러운 방법을 결행하기에 이른다. 그들에게는 '가미카제'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1274년과 1281년 몽고 쿠빌라이 칸 함대의 침공으로부터 일본을 구한 태풍의 이름이었다.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를 공격하러 가던 여몽연합군을 침몰시킨 계절풍을 신이 만들어 준 바람, 즉 가미카제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10월 25일,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를 출발한 가미카제 비행기 6대는 곧장 북쪽으로 비행하여 미군의 토마스 스플렉 항공모함대를 발견한다. 비행기들은 3천 미터 상공에서 구름을 뚫고 수직으로 급강하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미군은 수직 하강으로 돌진하는 비행기 몇 대를 대공포화로 격추시켰지만 스와니와 산티 두 항공모함은 가미카제 기를 막지 못했다. 폭탄을 만재한 가미카제 기가 폭발하면서 항모의 비행갑판과 격납갑판이 파열되었다. 게다가 혼란의 와중에서 산티 항모는 일본군의 잠수함에 뇌격되기까지 했다.

정오쯤 되었을 때 가미카제 기들이 다시 공격해 와서 3대의 비행기가 두 대의 항모에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또 한 대의 비행기가 세인트로 항모에 격돌했다. 이 공격으로 격납갑판의 폭탄과 어뢰가 연쇄 폭발하면서 끝내 세인트로호는 침몰하고 만다.

가미카제 작전이 소기의 전과를 올리자, 일본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더욱 불살랐다. 그들은 육군에 항공특공대, 해군에 수중특공대를 급조했다. 그들은 남은 병력을 모두 특공화하여 집단 자살하는 형식의 종교적 광증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요타 연합함대 사령관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유구한 대의를 위해 순국하였으니, 그 충렬 만세에 빛날 것이다"라는 군사포고문을 발표했다.

천황도 가미카제 공격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격려 메시지를 군령부총장에게 전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러나 정말 장하다."

그들은 소학교 어린들에게까지 승리의 환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우리 군은 특공대 전법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이 전법은 일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내지에는 아직도 많은 비행기들이 온존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용하여 특공 공격을 감행하면 절대로 전쟁에서 패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며 심신을 단련하면 된다."

닛코에 있던 소학교에서 참모본부 제2부장 아리스에 세이조 중장이 어린이들에게 행한 훈시였다. 그런데 학생 중에는 지금 아키이토 천황이 된 어린 황태자가 있었다.

"왜 우리 일본군은 죽으면서 적군을 죽여야만 합니까?"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약 200회까지 연재됩니다.



태그:#가미카제, #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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