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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또각 앞에 걷는 여자의 구두소리가 경쾌하다. 힐을 신어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난 아줌마다. 늘 하기 싫은 빨래도 널었다. 뭘 해먹어야 하나 고민하는 저녁 찬거리도 사다놓았다. 집 안에만 있으면 생기는 본능으로 미루어 놓은 청소도 해 놓았다.

난 지금 가지런히 정리된 것 같이 보이는 일상의 틈새를 이용해 한 움큼의 열정을 들여 놓으러 간다. 오늘 따라 하늘은 푸르고 바람도 적당하다. 내 가슴은 이미 미친 듯이 드럼을 후리는 상상을 하고 있다. 10월 1일부터 나는 매일 이런 상상에 빠져 산다.

드럼, 내가 과연 배울 수 있을까?

고무판을 치고 나면 이렇게 개인 연습실을 이용한다
 고무판을 치고 나면 이렇게 개인 연습실을 이용한다
ⓒ 렛츠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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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2호선 신천역 4번 출구. 난 지금 드럼을 배우러 간다. 드럼이라니. 강렬한 남성의 이미지인 드럼이라니. 크크거리며 "네가 이제 별짓을 다하는구나"라는 친구의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맴도는 것만 같다. 둥그렇게 놓인 악기들 속에서 질식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도 생긴다.

하지만 가장 멋진 상상만을 골라 한다. 제일 큰 북과 작은 북과 징 같이 보이는 소리가 요란한 악기들 사이에 앉아서 가장 편안하고 날렵한 동작으로 스틱을 후린다. 몸은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고 머리는 그 사이에서 나만의 세계를 완성한다.

한때 난 드럼에 빠졌었다. 물론 소싯적 20대의 얘기다. 드럼은 왠지 20대와 어울려 보이는 악기가 아닌가. 그렇게 관심을 넘어선 호기심으로 드럼 학원 앞을 지나치지 못했던 그 시절.

난 그 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십 몇 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 안에 몸을 싣고 있다. 걱정도 많다. 사람들이 비웃지나 않을까, 나이 먹은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뭘 하겠다고 끼어들었을까 하고 눈치를 주지는 않을까.

드럼은 나이 제한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곳에선 내 나이가 가장 많겠지 하는 잔걱정 따위로 난 지하철 안에서 한 시간을 우려내고 있었다.

9월 말이었다. 홍대역에서 들리던 드럼의 강렬한 사운드는 젊음은 순간이니 어깨 위를 내리누르는 것들에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바로 이 순간만 느껴보라고, 머뭇거리는 짓 따위는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치열하지 못한 심장을 조준하고 있었고 내 가슴은 뛰었다.

그러나 난 무려 서른여섯이고 지금 내겐 내가 전부인 아이들이 있고 나를 집안의 가구쯤으로 여기는 남편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지된 것만 같은 삶을 사는 평범한 서른여섯의 여자가 있다.

그랬다. 순간뿐이었다. 드럼의 정기 공연을 본 후엔 또 그렇게 단정해 보이는 일상을 만들어 내느라 분주했다. 아이들을 챙기고 청소하고 밥하고 가끔은 나도 살아 있어 하며 소리치는 친구들을 만나고.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계획하지 않는 느닷없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인터넷을 하던 중 홍대역에서 정기공연을 했던 렛츠드럼의 사이트에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본 정기공연 동영상이 바로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드럼을 치기 위해 집을 나서다

사람들이 드럼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사람들이 드럼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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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에서 좌회전, 엘지텔레콤에서 좌회전 그리고 또 횟집에서 우회전. 난 한 발 한 발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가고 있다. 할 수 있을까, 내가 가능할까. 신선한 긴장이라는 것이 내 가슴을 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지하. 드넓은 드럼세트들의 자태가 신비롭다. 지하의 퀴퀴한 냄새마저 경쾌한 드럼비트에 가려진 듯하다. 드럼 앞에 '폼'나게 앉아서 드럼을 후리는 나를 상상하는 것이 현실 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한 시간 가량 상담을 하고 그럼 바로 시작하실래요, 라는 운영자님의 말씀. 난 돈도 내지 않았다고 말 뒤 끝을 흐렸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스틱을 쥐어 주신다. 수강료를 포함해 12만원 그리고 스틱 값 만이천원으로 난 꿈을 찾은 듯 들뜬 마음이 됐다.

스틱을 쥐는 법부터 재미있었다. 드럼을 치기 위해선 바른 자세가 중요하다. 잘 모르는 사람은 손목 힘으로 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손목에 힘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예를 들자면 야구 선수가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공을 던지듯이 손목에 힘을 뺀 채 스냅을 이용해야만 한다.

난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 되었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의외다. 드럼 연습실을 찾아 문을 여는 사람들이 하나 둘 올 때마다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곳을 찾는 이들은 연령대가 나보다도 높았다. 직장의 점심시간을 활용해 오는 중년의 아저씨, 그리고 사오십대로 보이는 주부님들. 그들이 드럼 앞에 앉아 연주하는 모습은 어느 멋진 드러머보다도 근사해 보였다.

대단하다. 무려 서른여섯 아줌마인 내게도 드럼을 배우겠다는 마음 한쪽은 두려움으로 주춤거렸건만 세상엔 나보다 앞선 용기 있는 사람들 투성이다.

드럼 앞에 앉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스틱을 손에 쥐고 내리치는 모양이 어느 정도 완성이 돼야 비로소 드럼 앞에 올라설 수 있다. 하지만 기본자세가 예사롭지 않다며 이번 달 정기 공연을 해보겠냐고 칭찬을 해주시는 선생님!

물론 과한 칭찬으로 드럼에 '올인'해 보라는 나름의 속셈이 있을지라도 상관없다. 이 나이에 새로운 뭔가를 배우고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재미있는 기분이다. 또 생소한 긴장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이미 늦었을지라도...

드럼은 여자들에게 더 인기가 높았다.
 드럼은 여자들에게 더 인기가 높았다.
ⓒ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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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그저 세월의 흐름이 만들어 놓은 의무도 아닌 오로지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흥분을 만들어 주었다.

난 이제 8비트와 4비트를 넘나들며 가벼운 곡을 폼 나게 후린다. 폼은 정말 잘 빠져야 하는 법이라는 나름의 철칙을 고수하며.

아직 똑딱 소리를 내는 메트로놈의 소리에 적응이 덜되 지하 정신병원 같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용기만 있다면 드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악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제 누군가 내게 물었다, 마지막 사랑을 한 것이 언제냐고. 난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았지만 이제 한 달을 넘은 드럼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사랑할 것이다.

잘하지 못하지만 열심히 한다는 것, 그리고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 시작하는 용기와 같이 꾸준할 수 있을 용기를 지닌다는 것. 그것은 이 시대의 중년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리라.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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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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