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부질없는 감정들로 난 젊음을 가득 채우기만 했구나.
그때, 그 순간에 나의 감정들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감정들이 하나 둘씩 비껴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이미 너무 멀리 왔다는 것에 후회하고 후회하는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자도 아닌데도 다 알 것만 같았다. 현정의 마음. 사랑의 완성이 코 앞까지 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알 수 없는 무형체라서 현정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사랑은 상대방의 사소한 것들까지도 포착해야만 하는 결코 쉽지 않은 행위라는 것. 상대방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잃어버리더라도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현정은 그런 것들을 깨닫기 위해서, 가깝지만 건널 수 없는 강에 막혀 돌고 돌아 시간을 허비하며 왔지만 그래도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다시 쳇바퀴처럼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잘 익은 열매처럼 이미 성숙했기 때문에.

 연애할 때의 설레임

연애할 때의 설레임 ⓒ 빈장원


<사과>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맛보는 성숙하고 그윽한 사과의 맛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연애나 결혼, 이별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상투적이지만 그것을 내재된 감정에서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은데 이 작품은 세심하게, 그리고 담담히 그것들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리고 이별할 때 느끼는 감정들은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닮아서 한 곳으로 귀결하지 못하고 사방팔방을 향하고 있다. 그런 수만가지의 감정들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기다린만큼 기분 좋은 뿌듯함이 우리 손끝, 발끝에 살며시 다가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모습은 현정, 민석, 상훈처럼 닮아 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할 때, 그 귀중한 시간에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시간이 지난 뒤, 그때의 감정을 스스로 후회하고, 미워하며 다시 자신의 기억의 공간으로 돌려 놓는다. 가끔씩은 상대방과의 마찰을 겪게 되며,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을 보듬어 주다가도 순간 내가 원하던 것이 이것이 아니라고 느낄 때 주저없이 헤어지기도 한다. 도통 알 수 없는 일들이 '사랑'앞에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부질없는 행위였다는 것을 느꼈을 때, 현정처럼 우리도 희노애락을 감싸안을 수 있는 성숙함이라는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 '사랑'이라는 무형체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 '사랑'이라는 무형체 ⓒ 빈장원


결혼적령기에 놓인 현정의 연애담과 이별, 결혼과 그 후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사과'라는 타이틀은 왠지 낯설고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조용한 순간에 갑자기 우리가 생각하는 '사과' 그 자체로 등장해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 결혼 후 임신하고 바쁜 삶을 살고 있는 현정에게 옛사랑 민석이 찾아오고 현정은 묵묵히 그를 배웅한다. 터미널에서 헤어지기 전에 현정은 청사과 하나를 사서 깨끗히 씻어 민석에게 준다.

이 장면은 얼핏보면 제목을 구연해 내기 위한 인위적 냄새가 짙어 보이지만 사실은 영화만큼 성숙하고 세련된 비유를 보여준다. 이미 현정은 안다. 어쩌면 모른다. 왜 민석이 자신을 놓았었는지. 하지만 다 이해한다. 사과를 주는 행위는 남을 배려하는 것,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말없이 지난 날 민석이 자신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서 용서한다. 민석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현정은 그의 말없는 사과를 표정과 눈빛으로 받아들인다. 감독은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를 지나 인생의 맛을 알기 시작해 가는 여고생처럼 풋풋하게 그 감정의 결들을 포착해 낸다.

그 감정의 결을 이 영화는 '눈빛'으로 구체화한다. 상대방을 보며 이야기할 때 서로에게 향하는 눈빛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해 낸다. 눈빛이 흔들릴 때 그들의 사랑도 위태롭다. 영화는 결미에 '네온사인 가득한 빌딩과 고가도로가 보이는 베란다','밤중에 현정과 상훈이 실랑이를 벌였던 놀이터 벤치','호프집','기숙사 가로수길','신혼집'을 차례대로 보여주며 다시 벤치에 앉아 있는 현정을 뒷모습부터 앞모습까지를 슬그머니 담는다.

그런데 현정은 아무 표정을 짓지 않는다. 표정 없는 그녀의 모습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지난날을 형상화한다. 그때, 그 곳에서 난 행복했는가? 내가 그곳에서 있긴 했는가? 그리고 혼자인 현정. 현정은 지나온 인생의 거센 바람들에 스스로 맞써 이겨내고서 지금 자신이 이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성숙하게 열매 맺은 사과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자신이 느꼈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수만가지의 감정들을 나무 열매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는 그것들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가지게 된다. 상훈과 자신의 지난 날을 꼭 껴안아줄만큼 성숙한 모습으로 말이다.

 스스로 성장하여 멋진 열매를 맷는 사과나무 현정

스스로 성장하여 멋진 열매를 맷는 사과나무 현정 ⓒ 빈장원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네오이마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과 강이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이 기자의 최신기사 '물안에서' 이미 죽은 이의 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