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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텅 빈 벤치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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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시, 박인희 노래 '세월이 가면' 모두

올 가을에도 절로 읊조려지는 그 노래, 그 아픈 추억
▲ 기다림처럼 영근 박 올 가을에도 절로 읊조려지는 그 노래, 그 아픈 추억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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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란 시구가 생각나는 2008년 시월의 마지막 밤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 해 가을 눈물 젖은 쓸쓸한 눈빛을 구멍 뚫린 낙엽처럼 툭툭 던지며 타박타박 걸어오던 그이처럼. 나뭇잎 툭툭 떨어지는 그 벤치에 앉아 속마음을 내비치던 그이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해마다 바람 없이도 낙엽이 툭툭 떨어지는 시월 끝자락이면 독한 술을 밤새 마셔도 못 견디게 그리운 얼굴 하나 있다. 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었던 쌍꺼풀 예쁘게 진 그 까아만 눈동자가 낮달처럼 따라다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목덜미를 간질이던, 허리까지 치렁치렁 흘러내린 그 긴 머리칼이 떠오른다. 

잠시만 딴 곳으로 눈길을 돌려도 금세 도톰한 입술 삐죽이 내밀며 토라지던 그이. 이십 대 새파랗게 젊은 날을 통틀어 만나다가 '우리 헤어져'란 그런 짤막한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렇게 헤어져버린 그이.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컴퓨터 이메일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을.

시월 이맘 때면 더욱 그이가 기다려진다. 그때 그 창원공단 공원 벤치에 앉아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그이. 야근이 끝나기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을 하지 않아도 찾아가던 그 공원 벤치. 서로 단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그리움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던 시간들. 그래. 그 만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이 긴 머리카락처럼 출렁이고 있는 억새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그이 긴 머리카락처럼 출렁이고 있는 억새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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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꽃 속에도 그이의 얼굴이
▲ 구절초 구절초 꽃 속에도 그이의 얼굴이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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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혹은 기다림으로 바뀌기 시작한 공장 밖 만남

"왜 울어?"
"너무 보고 싶어서."
"누굴?"
"누굴? 이라고 말하는 그 남자."

아무리 낙엽이 지면서 옛 추억에 젖게 하는 쓸쓸한 늦가을이라 해도, 아무리 가을만 되면 못 견디는 가을 타는 남자라 해도 가슴 저만치 아프게 묻어버린 옛 사랑을 꺼내 속속들이 지면에 공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남자라 해도 그럴 것이다. 

이 글에서도 오래 묵은 아픈 이야기를 속속들이 하지는 않겠다. 그저 실루엣을 바라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옛 추억을 훑으려 한다. 지금 그때 그 아름다운 만남을 가슴에 꼭꼭 묻어 버린 채 가정을 행복하게 꾸리고 있을 그이 마음에 새로운 상처를 줄 수도 있을 테니깐. 하지만 그래도 너무 보고 싶다. 딱 한번 만이라도.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초였다. 그때 그이와 나는 창원공단에 있는 00주식회사 생산부서에서 함께 일했다. 잔업, 철야가 거듭되는 현장 생산부 일은 몹시 힘들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큰 기계 앞에 앉아 하루에 수천 개씩이나 되는 일일 생산량을 맞추는 일은 여간 쉽지 않았다.

그때 여성 노동자들은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해 기계가 고장 나면 시말서가 무서워 반장 몰래 남성 노동자들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이와 나도 그렇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나는 그게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이도 나를 그저 고장 난 기계를 은근슬쩍 잘 고쳐주는 고마운 사람쯤으로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기계를 사이에 둔 만남이 잦아졌고, 급기야 그이는 나에게 너무 고마워 공장 밖에 있는 상가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이와 나는 툭 하면 공장 밖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만남이 잦아질수록 그 만남은 그리움 혹은 기다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이와 나의 7년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가 누굴 위해 비워두었을까
▲ 벤치 누가 누굴 위해 비워두었을까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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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꽃은 피어나건만
▲ 코스모스 오랜 기다림 끝에 꽃은 피어나건만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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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투둑투둑 지는 그 벤치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날 버리고 혼자 서울로 올라간다고?"
"내 그림자를 어떻게 버려. 걱정 마. 매일 편지 쓰고 한 달에 두 번씩은 꼭 내려올게."
"내가 싫어?"
"그게 아니라니깐. 우리 평생 기름밥만 먹을 수는 없잖아."
"그럼 여기다 손가락 걸어. 그리고 약속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평생 나와 함께 하겠다고."

그해 여름. 나는 그이와 그 창원공단 벤치에 나란히 앉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요즈음 연인들이 흔히 하는 약속처럼 '도장 찍고, 복사하고'라는 행동은 없었다. 그저 새끼손가락을 꼬옥 걸고 서로 오래 눈빛을 마주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말보다는 주로 편지를 많이 썼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는 날, 그이는 내 곁에 없었다. 공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약속처럼 한 달에 두 번 내려가지는 못했지만 편지를 열심히 썼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연휴 때 만나곤 했다. 그때마다 그이는 "견우와 직녀가 따로 없다"며, 내가 서울행 고속버스를 탈 때마다 손을 흔들며 눈물짓곤 했다.

그렇게 두 해가 흐른 늦가을이었다. 낙엽이 툭툭 떨어지는 거리를 혼자 걷다 보니 괜스레 마음이 쓸쓸했다. 그날따라 전철역에 붙어 있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글귀가 무척 마음에 들어 그 내용을 그대로 적어 그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근데, 그 글귀를 읽은 그이는 그 편지를 헤어지자는 편지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그이가 보낸 답장을 받은 그 다음 날, 나는 모든 일을 팽개치고 고속버스를 타고 그이에게로 달려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그이는 공장에서 잔업까지 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날 밤, 나는 낙엽이 떨어지는 창원공단 공원 벤치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그이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엇갈린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 운명 엇갈린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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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이맘때면 더욱 그이가 기다려진다
▲ 감 시월 이맘때면 더욱 그이가 기다려진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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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그리울 때면 내 가슴으로 보내는 편지를 쓴다

밤 10시. 잔업을 마치고 툭툭 떨어지는 낙엽을 손에 받으며 공원길을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는 그이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내가 벤치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그이가 슬며시 피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투였다. 그날 나는 그 벤치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 그이에게 몇 번에 걸쳐 그 편지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되풀이했다.

"서울 물이 좋긴 좋은가 보네. 서울 갈 때 나도 데리고 가 줘. 응?"
"조금만 더 기다려. 아직 준비가 덜 됐어."
"언제까지 기다려?"
"3년만 더."      
"3년씩이나?"

그렇게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나는 구속문인 석방 농성과 가투 등으로 몹시 바빴다. 그이에게 매일 보내던 편지도 쓰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뒤 나는 오랜만에 그이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근데 그 편지가 되돌아온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다시 편지를 썼다. 편지는 계속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다.

갑자기 속이 바짝바짝 타기 시작했다. 그이가 일하는 공장에 전화를 걸었다. 그이가 일하는 공장에서는 작업시간에는 누구든 전화를 바꿔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퇴근시간에 맞춰 다시 그이가 다니고 있는 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근데, 전화를 받은 사람이 그런 사람은 그 부서에 없다고 했다. 며칠 뒤 밤 10시쯤 나는 그이가 사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
"……"

그이였다. 그이와 나는 아무런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한동안 수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나는 그이에게 편지도 쓰지 못했고, 전화도 걸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게 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까지 그이가 그리울 때면 편지를 쓴다. 내 가슴으로 보내는 편지를.   

독한 술을 밤새 마셔도 못 견디게 그리운 얼굴 하나 있다
▲ 가을해 독한 술을 밤새 마셔도 못 견디게 그리운 얼굴 하나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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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 가을에도 가까운 공원 텅 빈 벤치에 앉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나직하게 읊는다. 그렇다고 그이의 이름을 까맣게 잊은 것이 아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이란 노랫말은 곧 '지금 그 사랑 잃어버렸지만' 늘 "내 서늘한 가슴"과 늘 그이의 서늘한 가슴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나의 가을 노래'



태그:#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박인환, #그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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