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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가 붙여진 속옷 가게. 이런 모습은 우리동네뿐 아니라 이웃동네에도 흔하게 보인다.
 '임대'가 붙여진 속옷 가게. 이런 모습은 우리동네뿐 아니라 이웃동네에도 흔하게 보인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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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아침마다 배달된 조간신문 머릿기사 제목이 부담스럽다. '투기목적 땅에 세금 퍼주기', '건설사 살리기 9조 2천억 투입', '금융시장 끝 모를 추락 경제 초비상'.

내가 보는 신문은 최근 8면 분량의 '경제' 난을 따로 만들었다. 경제의 큰 제목도 역시 맥 빠지고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벼랑에 몰린 철강사 글이나 셔터를 내리는 아이티 부품업체들의 속사정들이 나열된 기사들. 어디 신문뿐이랴. 밤 9시에 유일하게 듣는 라디오종합뉴스는 아침에 읽었던 신문기사를 다시 반복하고 강조하면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중년 아낙의 좁은 두 어깨를 오그라들게 한다.

거의 날마다 시장을 들락거리는 아줌마 눈에도 실물경기는 점점 피부에 와 닿는다. 습관처럼 동네 한바퀴를 돌다가 내가 자주 가는 C 옷가게 앞에 축하화분이 놓여있는 걸 봤다. 1년이면 한 번 정도 아이들 옷을 살까 말까 한 곳이지만, 인상이 푸근한 아저씨는 누구한테라도 참 편하게 대했다.

찬바람이 부는데 무슨 옷이 나왔나, 그날도 옷을 살 염은 없었고 그저 구경이나 할까 싶어 둘러보는데 왠지 분위기가 낯설었다.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 밖에서 가게를 두리번대자 주인인 듯한 남자가 일부러 나왔다. 전에 하던 아저씨가 다른 일을 하게 됐단다.

'아저씨가 왜 가게를 그만두셨을까, 장사를 그만 하면 또 무슨 일을 하실까?' 궁금했다. 동네는 같은 자리에서 업종을 바꿔 새로운 간판을 단 곳이 꽤 눈에 띈다. 아직 주인이 나서지 않은 자리에는 '임대'라고 써 붙인 곳도 있다. 문이 잠긴 텅 빈 가게에서 '임대'라는 글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지업사였던 가게가 문이 잠긴 채 텅 비어있다.
 지업사였던 가게가 문이 잠긴 채 텅 비어있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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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힌 가게 옆에 그 동안 없었던 고물잡화상이 보인다.
 문 닫힌 가게 옆에 그 동안 없었던 고물잡화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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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구류를 파는 곳에도 '임대'가 붙어있다.
 침구류를 파는 곳에도 '임대'가 붙어있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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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현관 밖에는 하루에도 대여섯 장씩 광고지가 붙는다. 주로 치킨이나 음식점, 학원을 알리는 광고지만, 믿기지 않는 가격으로 박스째 펼쳐놓고 폐업정리를 한다는 의류세일 글도 있다. 스포츠의류를 취급한다는 어떤 회사에서는 법적소송과 자금압박으로 전직원이 영업판매에 돌입했다는 자극적이고 '눈물 어린' 광고지도 있다.

폐업을 알리는 마트
 폐업을 알리는 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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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들렀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재래시장과 마트 중간 길에는 일반 슈퍼마켓보다는 조금 크고 대형할인매장보다는 작은 규모의 S마트가 있다.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시장을 오가는 길에 마트아저씨는 낯이 익었다. 그 동안 나는 세 번 정도 그곳에서 음료수나 과자를 산 적이 있었지만, 권장가격을 거의 다 받는 계산을 하고 나오면 언제나 돈을 더 주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아저씨는 가게 앞에다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진 과자나 음료수, 휴지, 수세미, 고무장갑 따위를 죽 진열해놓고 물건을 팔았다. 거의 날마다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가게는 한산하고 봉지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일년 내내 세일 한 번 안하는 가게지만 그래도 손님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가게 앞에는 빨간 글씨로 써 붙인 세일품목들이 널려 있었다. 주로 식품에서부터 생활용품들이었다. 농협마트나 대형마트에서 이미 아이스크림 50% 세일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S마트의 50% 세일은 아주 파격이었다.

재고가 많아서 싸게라도 파나 보다 했는데 그 다음날 걸린 펼침막에는 폐업한다는 글이 붙었다. 문득 무표정한 마트아저씨의 안쓰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장사를 접을 만큼 많이 힘든 것만 짐작할 뿐이지 속사정이야 내가 어찌 알까마는, 열심히 사는 서민들의 이런 고통은 안중에 전혀 없는 듯한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이 퍽이나 불안하고 의심스럽다.

97년, 나도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IMF 된서리를 맞은 경험이 있다. 미술재료를 취급하는 소매업이었다. 대형가게는 싼 값으로 직접 학교까지 물건을 배달해 주는데, 우리는 도무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소비자인 학생들은 당연히 편한 배달과 싼 값을 선택했다.

버티기에도 힘들어서 가게를 내놨지만 사람이 당장 나서는 것도 아니었다. 달리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가게를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해를 보는 날이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가게를 헐값에 넘겼다. 벌어놓은 돈은 바닥이었고 몸은 지쳐있었다. 어쩜 마트아저씨도 그런 상황이었을까?

불 꺼진 가게 유리창에 심심찮게 붙여진 ‘임대’가 요즘의 가혹한 경제를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 아프고 상처 난 '경제'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아무래도 돌팔이 의사를 만난 건 아닐까? 가을 찬비가 내리고 나니 바람은 더 쌀쌀하다. 올 겨울 '강부자' 빼고 많은 사람들이 참 춥겠다. 

덧붙이는 글 | sbs, 세종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임대, #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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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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