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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절벽과 푸른 상록수림으로 둘러 싸여있어, 세계적인 미항으로 인정받는다.
▲ 서귀포 기암절벽과 푸른 상록수림으로 둘러 싸여있어, 세계적인 미항으로 인정받는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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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가을은 햇살을 머금고 익어가는 귤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산들바람이 돌담을 넘어 귤나무 사이를 휘감아 열매를 흔들고 지나는 모습은 이 섬에서만 볼 수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서귀포 푸른 해변에 찾아온 가을을 만나기 위해 차를 몰았다. 포구에 도달하기 전에 선비치 호텔 앞에서 바라본 문섬 바다는 여느 때처럼 시원하기만 했다.

서귀포, 신이 감춰둔 남국의 보배

서귀포로 들어오는 푸른 바다에는 문섬이 수문장처럼 포구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 문섬을 돌고 온 파도는 새섬에 와서 포말을 일으킨다.

포구 바깥쪽에 있는 섬이 문섬이고 포구에 인접해서 방파제 역할을 하는 섬이 새섬이다.
▲ 문섬 포구 바깥쪽에 있는 섬이 문섬이고 포구에 인접해서 방파제 역할을 하는 섬이 새섬이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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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인근 해안선은 높이 솟은 기암절벽이 바다와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동서로는 길게 뻗은 절벽이 천지연폭포 방향으로 만입되어 포구를 만들어내는 형상이 마치 여성의 자궁을 연상케 한다. 이 기암절벽 틈에 자생하는 상록수림으로 인해, 포구는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이국적 풍광을 연출한다.

그래서 과거에 누가 그랬다. "서귀포에는 일출을 제외하고 신이 만들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이 다 모여 있다"고.

항구 입구로 배 한척이 들어오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섬이 숲섬이다.
▲ 서귀포 입구 항구 입구로 배 한척이 들어오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섬이 숲섬이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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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계에 관광미항으로 알려진 서귀포는 조선 전기 이전까지만 해도 홍로현에 속한 보잘 것 없는 포구였다.

1300년(충렬왕 26)에는, 탐라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고, 대촌(大村, 제주시 지역을 지칭)을 제외한 지역에 현을 설치하였다. 당시 설치한 14개 현 중 홍로현은 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과 동홍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홍로현이 설치된 이후 조선 전기까지 서귀포는 홍로현의 포구로 이용되었지만, 역사 속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포구에 배들이 정박한 모습이다.
▲ 정박 중인 배들 포구에 배들이 정박한 모습이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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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정확한 어원을 알지는 못하지만, 주민들은 '서불과지(西巿過之)'와 연관하여 그 기원을 찾는다. 서불은 '서복'이라고도 기록되었는데, 진시황의 신하이기도 했던 신존 인물이다. 제주에 전하는 전설에는 그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제주에 왔다가, 정방폭포 바위에 '서불과차(西巿過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시황제를 속이고 신천지를 찾아나섰던 서복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고 영생을 얻을 방법을 구하기 시작했다. 진시황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불로장생의 방도를 구했지만, 누구도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다.

서복전시관에 서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서복 서복전시관에 서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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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에 서불은 황제의 마음을 이용해 중국을 벗어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라면 영주산(한라산)에 가서 불로초를 캘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와 관련한 <사기>의 기록이다.

"제나라 사람 서불이 글을 올리기를, 동해 가운데 세 개의 신산이 있는데, 이름은 봉래산,방장산, 영주산이라 하며, 거기에는 신선이 살고 있습니다. 재계하여 동남(童男),동녀(童女)를 거느리고 신선을 찾으려 하니, 허락하여 주십시오‘하자, 이에 서불을 파견하여 동남동녀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라로 나아가 신선을 찾게 하였다."

서복이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항해를 떠나는 모습이 세겨져 있다.(서복기념관에서 촬영)
▲ 판화 서복이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항해를 떠나는 모습이 세겨져 있다.(서복기념관에서 촬영)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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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이 바다로 불로초를 찾아 나섰으나,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거의 모든 사람을 잃고 돌아왔다. 실패에 따른 황제의 질책과 처벌을 두려워했던 서불은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봉래섬의 신약을 얻을 수 있으나, 항상 큰 상어 같은 물고기가 방해하여 그곳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활 잘 쏘는 사람과 같이 가서 그것이 나타나면 활을 연발로 쏘게 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황제는 서불의 이같은 거짓말을 듣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서불은 불로초를 찾아 떠났는데,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서불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오서 소권전에 잠시 나타난다.

"장군 위온과 제갈직을 파견하여 무장한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이주(夷州)와 단주(亶州)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단주는 바다 가운데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진나라 시황제가 방사 서복을 보내어 어린 소년과 소녀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봉래의 신선과 선약을 구하도록 하였는데, 이 주에 이르러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오늘날 수 만 호가 되었고, 그 땅 단주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회계로 와서 베를 샀고, 회계 동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다가 또 태풍을 만나 단주까지 표류해 오기도 하였다."

서복이 정말로 이 섬에 들어왔을까?

이 기록대로라면 시황제를 속이고 2차 항해를 떠난 서불이 정착했던 곳은 단주라는 섬이다. 이 단주라는 곳이 제주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서불은 이 폭포 암벽에 '서불과차'라는 글을 세겼다고 전한다.
▲ 정방폭포 서불은 이 폭포 암벽에 '서불과차'라는 글을 세겼다고 전한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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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주에 전설로 전하기는 2차 항해 끝에 서복 일행이 도착한 곳은 '금당포'였다고 한다. 서복이 그것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고 해서 금당포는 '조천(朝天)'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서불이 한라산 계곡은 물론 제주섬 구석구석을 두루 다니며 불로초를 구했다. 그리고 정방폭포 근처에 머무를 때, 폭포 바위에 '서불과차(西巿過此)'라를 글귀를 새겨 놓았다.

일설에는 서불이 한라산에 자생하는 영지버섯을 불로초로 여겨 가지고 돌아갔다고도 하는데, '서귀(西歸)'란 지명은 서불 일행이 이 포구의 서쪽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불이 정방폭포 바위에 새겨놓았다는 글귀는 풍화로 인해 소실되었는지, 아직까지 그것을 발견했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과거 진나라의 문물과 서복 일행의 항해 과정이 전시되어 있다.
▲ 서복전시관 과거 진나라의 문물과 서복 일행의 항해 과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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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정방폭포 절벽 위에는 서불과 관련되 일화를 소개하기 위해 '서복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 관련한 자료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물이나, 서귀포의 지층에서 발견된 화석 등 역사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불로초를 찾는 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섰던 서복이 이 섬에 정착했는지, 아니면 잠시 들렀다갔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가 제주섬에 정착했다면 내 몸 속에도 서복의 피가 흐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서귀포는 원래 홍로현에 속한 포구 이름이었는데, 나중에 이 근처에 사람이 모여살면서, 서귀리라는 마을이름이 생겨났다. 그후 이 일대를 포함하는 도시의 이름이 되었고, 나중에는 한라산 남쪽을 아우르는 도시명이 되었다. 서귀포의 의미가 시절에 따라 변해왔던 것이다.

이 기사는 도시로서의 서귀포가 아니라 항구로서의 서귀포를 대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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