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을 완벽하게 연기한 에드 해리스.

베토벤을 완벽하게 연기한 에드 해리스. ⓒ (주)성원아이컴

 

마음이 여리고 순수하던 시절, 20대 초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베토벤 평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로맹 롤랑이 쓴 <베토벤의 생애>라는 제목의 책인데 괴팍함, 무뚝뚝함, 기괴함 속에 깃든 베토벤의 외로움이나 고독, 순수함을 잘 잡아냈더군요.

 

베토벤의 고독이 절실하게 와 닿고, 또 베토벤의 순수한 영혼에 감동받아서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마흔인데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받았던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가를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그때처럼 여전히 감동받고 울 수 있다면 내 영혼이 아직 순수하다는 증거고, 그렇지 못하다면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면서 영혼도 딱딱하게 굳었다는 증거겠지요.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예전에 로맹 롤랑이 쓴 베토벤의 전기를 읽으며 울었던 베토벤의 모습이 음악가에게 가장 소중한 소리를 잃은 후의 외롭고 고독한 모습이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고독을 승화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한 단계 올라간 모습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예술세계에 초점을 맞춘 영화

 

사실 베토벤은 소리를 잃은 후 더 훌륭한 곡을 썼다고 하더군요. 세상에는 역시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모양입니다.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이 얻은 것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영화입니다.

 

<카핑 베토벤>(2006. 미국)은 베토벤의 가장 뛰어난 교향곡이라는 칭송을 받는 제9번 교향곡 <합창>이 태어나기까지의 말년 몇 년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베토벤이 실제 <합창> 초연 시 무대에서 관객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하자 어떤 여인이 무대로 올라와 베토벤을 객석으로 향하게 했다는 일화에 살을 붙여 만든 픽션입니다.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들어봤을 랭보와 베를레르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 영화 <토탈 이클립스>를 예전에 보고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인 아그네츠카 홀란드가 이 영화 <카핑 베토벤>도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을 연기한 배우는 에드 해리스인데 완벽하게 베토벤의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베토벤을 실제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사진이나 일대기를 보면서 상상했던 이미지와 너무나 흡사한 모습을 보여줘서 영화에 몰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평범함을 대변하는 안나 홀츠와 천재 베토벤의 한 때.

평범함을 대변하는 안나 홀츠와 천재 베토벤의 한 때. ⓒ (주)성원 아이컴

 

소리를 잃은 후 베토벤은 성격이 날로 괴팍해져갑니다. 원래가 사회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자 베토벤은 완전히 고립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이 오직 자기 세계에 갇혀버립니다.

 

그런 베토벤이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의 초연을 앞두고 자신이 그린 악보를 연주용으로 카피하기 위한 유능한 카피스트를 찾던 중 우연히 음대 우등생인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 분)를 만나게 됩니다. 이 둘 사이에 이성적 사랑은 없습니다. 음악적 교감이 있을 뿐입니다.

 

베토벤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영화 <불멸의 연인>이 베토벤의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영화는 예술가로서 베토벤을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뒀기에 미모의 여인이 등장하지만 이성간의 사랑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안나 홀츠는 베토벤의 괴팍함을 묵묵히 잘 참아냅니다. 그녀에게 이런 인내심을 갖게 한 건 베토벤의 위대한 음악과 그런 천재에게 자신의 음악을 보여고 싶다는, 즉 음악을 향한 열정이지요. 안나 홀츠는 위대한 음악으로 위로받으며 그를 이해하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킵니다. 그리고 베토벤은 9번 교향곡을 성공리에 연주하고 삶을 마감한다는 게 전체 줄거리입니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 신의 소리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베토벤은 확실히 천재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합창>과 같은 불멸의 곡을 작곡할 때도 이런 곡을 짜내기 위해 고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에 음악이 가득 차 있는데 그걸 그냥 옮기면 된다고 했습니다.

 

"음악은 신의 소리인데, 귀가 먹어 사람의 소리가 안 들리자 신의 소리로 가득 차게 됐어. 침묵과 침묵 사이의 음이 바로 신의 소리인데 난 그 소리를 종이에 옮기기만 하면 돼."

 

베토벤이 안나 홀츠에게 한 말입니다. 항상 머릿속에 이런 위대한 음악이 가득 차 있고, 자신은 그걸 받아 적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음악에 목말라하는 안나 홀츠와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소리입니다.

 

이 대사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사실일 거라고 믿습니다. 인간의 이성이란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를 종합하는 능력은 있지만 창조성은 부족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런 불멸의 음악은 이성을 초월한 그것인데 작곡을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고 나올 수 있는 그런 종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나 홀츠의 역할이 너무 약하다

 

그런데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평범한 사람을 대변하는 안나 홀츠의 고뇌가 너무 약하게 묘사됐다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천재성이나 비범함은 잘 묘사됐는데 거기에 상응하는 안나 홀츠의 존재감이 너무 약했습니다.

 

안나 홀츠의 비중을 좀 더 크게 잡고 음악을 향한 그녀의 고민과 번민, 집착을 좀 더 치밀하게 묘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곁들어서 베토벤을 얼마간 보여줬어도 영화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천재와 평범한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 <아마데우스>가 모차르트보다 오히려 보통 사람인 살리에르의 질투와 회한 이런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명화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 영화 <카핑 베토벤>은 섬광석처럼 빛을 뿜어내는 베토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서 역할의 균형을 잃어버렸다고 봅니다.

 

그러나 소리를 잃은 베토벤이 제자 안나 홀츠의 안내를 받으며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는 장면은 10여분 진행되는데 영화의 백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는 이 장면만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한 감동을 주고 남음이 있다고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더군요.

 

<카핑 베토벤>이 비록 스토리가 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지만 베토벤의 예술세계를 마음껏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로 베토벤에게 필이 꽂힌 사람들에게 추천합니다.

2008.10.21 17:43 ⓒ 2008 OhmyNews
베토벤 카핑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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