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심훈 선생 묘소 앞에 선 심재호씨. 심훈 선생의 묘소는 지난 해 말 심씨가 직접 필경사 옆으로 이장했다.
 심훈 선생 묘소 앞에 선 심재호씨. 심훈 선생의 묘소는 지난 해 말 심씨가 직접 필경사 옆으로 이장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흰 장갑을 낀 심재호(73·재미교포)씨의 손이 떨렸다. 아버지인 심훈 선생(1901∼1936)의 육필 원고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한지에 싸고 작은 함에 간직해온 육필원고가 드러났다.

그는 미국의 전문 학자들의 권유를 받은 이후 줄곧 같은 방법으로 원고를 대하고 있다. 일본 도쿄대와 미국 시카고대 등이 한동안 선생의 유고를 사겠다며 백지수표를 건넸다. 이를 거부하자 그들은 원고가 상하지 않도록 한지에 싸서 보관하고 흰 장갑을 낀 후 원고를 넘겨볼 것을 권고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는 선생의 시를 번역했다.

선생의 원고는 다른 나라에서 세계적인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 상황은 다르다. 심씨는 아버지의 유물과 유품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국내 문학관 건립을 위해 수십년째 애를 태우고 있다. 아버지의 유골은 경기도 용인과 안성 등을 떠돌다 지난 해 말 심씨 손에 의해 당진 필경사(筆耕舍)에 안장됐다. <상록수>의 산실 필경사는 굳게 자물통이 걸린 창고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심씨가 수십 년간 모은 육필원고와 유품을 고국에 모두 기증하겠다고 밝혔지만 누구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50년간 모으고 지켜온 아버지 심훈의 흔적

최근 상록문화제집행위원회 초청으로 당진을 방문한 그는 당진군이 '심훈 문학관 건립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자 "아버지 유품을 모으고 지켜온 보람이 있다"며 "너무 행복하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살고 있는 미국 버지니아 주 자택에 영화 <먼동이 틀 때>의 극본과 제작 시나리오 원본, 시 <그날이 오면>의 일제 총독부 검열본 등 부친의 거의 모든 친필 원고 등 수천여 점을 모아 보관하고 있다. 1966년에 출간된 <심훈전집>(3권·탐구당)과 국내외에 있는 관련 사진 및 원고 사본 자료들은 모두 심씨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심재호씨가 아버진인 심훈 선생이 쓴 시 <그날이 오면>의 일제 총독부 검열본을 펼쳐보이고 있다.
 심재호씨가 아버진인 심훈 선생이 쓴 시 <그날이 오면>의 일제 총독부 검열본을 펼쳐보이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심씨는 "근대 문학계 작가들이 남긴 친필원고가 거의 없는 반면 아버지의 경우 1000매가 넘는 육필원고가 남아 있다"며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 시기 계승할 상록수 정신에 대해서는 "아버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농촌 소설보다는 남북통일과 민족화합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과 관련 "항일독립운동이 없으면 대한민국 건국도 없었다"며 "외국 사람들이 찬성 안하면 통일도 안해야 하나"는 말로 대미 사대주의식 통일정책을 비판했다.

"촛불이 불법이면 합법은 뭐냐"

<오마이뉴스> 등을 통해 촛불시위 양상을 지켜봤다는 그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서도 "전 정권에서 고기의 질 문제로 수입을 중단한 것을 현 정부에서 국민과 의논 없이 수입조건을 확 풀었다"며 "한국민들이 내가 먹는 것을 왜 상의없이 정부가 맘대로 멋대로 하느냐는 이의제기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촛불을 켠 사람들을 불법으로 매도하는 것은 국민의 먹을거리를 맘대로 결정한 정부의 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과 같다"며 "먹을거리에 대한 의사표현이 불법이면 개혁과 저항운동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아버지의 글 중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을 묻는 질문에 <상록수>의 마지막 구절('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을 언급하다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심씨는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신문사를 사직하고 1975년 미국행을 택했다. 이어 <일간 뉴욕> 발행인, 이산가족 찾기 운동 사업 등 언론과 민간통일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충남 당진에서 열린 심훈 선생을 기리는 상록문화제에 초청돼 지난 11일 당진을 방문한 후 필경사(집필지) 등을 둘러본 후 지난 16일 출국했다.

심훈 선생의 셋째아들인 심재호씨. 그가 인터뷰 도중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듯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심훈 선생의 셋째아들인 심재호씨. 그가 인터뷰 도중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듯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다음은 당진과 필경사를 오가며 심씨와 나눈 주요 인터뷰 요지.

-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언제이고 그동안 어떤 일을 했나?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가 심해져 신문사를 그만두고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50년 동안 꾸준히 해온 일은 아비지의 육필 원고 등 유품을 찾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1000여매의 육필원고 등 유품 수천여 점을 찾아 간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일간 뉴욕> 발행인, 한국의 이산가족 찾기 운동 사업 등 언론과 민간통일운동을 해왔다.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해 북한도 수십여 차례 방문했다. 이산가족 찾아 주는 사업으로 빚을 많이 져 빚을 갚기 위해 최근 6년 동안 미국 국제방송국에서 일하다 은퇴했다."

- 아버지인 심훈 선생의 유품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근대 문학 작가들의 경우 남긴 육필이 거의 없다. 아버님의 경우 1000매가 넘는 육필 원고를 남겼다. 세상에 알려진 대부분의 것이 다 내가 모아 정리한 후 제공한 것이다. 이 외에 장편소설 <상록수> <직녀성> <영원의 미소> 등 친필 원고, 단편 <황공의 최후> 친필 원고, 시집 <그날이 오면> 일제총독부 검열판, <상록수> 영화 각본, 영화소설 <탈춤> 영화 각본과 <먼동이 틀 때> 촬영 원본, 붓으로 쓴 <오오 조선의 남아여>, 각종 사진 등 수천여점이 있다. 일본 도쿄대와 미국 시카고대 등으로부터 아버님의 유고를 사겠다며 백지수표도 건네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고민이 없진 않았지만 팔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백지수표, 그래도 팔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 '심훈 문학관' 건립을 위해 애써 온 것으로 안다. 진전은 있나?
"'상록수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있다. 당진에 있는 옛 친구들이 주도해 만든 것인데 몇 해 전에 상록수 문학관을 건립한다고 청사진과 설계도까지 실린 책자를 미국으로 보내 왔다. 도와주려고 한국으로 와서 확인해 보니 구상만 있지 실제 실행 계획은 없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어 속이 많이 상했었다.

다행히 이번에 만난 민종기 당진군수와 당진군 담당관이 '지금 있는 심훈기념관을 확대 정비하는 방식으로 아버님의 유품을 전시하고 연구하는 문학관 건립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군정 책임자가 나서 공식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해 매우 행복하다. 나 또한 50년간 모은 아버님의 유품을 모두 기증하기로 했다. 단 무작정 기증하는 것이 아닌 아버님의 문학 연구와 전시공간 계획을 구체화한다는 조건으로 기증하겠다고 했다."

심훈 선생 육필원고집
 심훈 선생 육필원고집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 현 시기 심훈 선생의 '상록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버님의 소설적 배경이 된 것은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서 당시 시작된 '공동경작회' 활동이다. '공동 경작회'가 농작물 시험재배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상록수를 쓰기 시작했다. <상록수>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일제에 수탈당하는 농촌과 농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제에 저항하고 자립자조하면서 자주교육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아버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농촌 소설보다는 남북통일과 민족화합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시를 썼지만 8·15 해방이 왔음에도 그날이 안 왔다. 해방이 비극이 되는 분단이 될 줄을 꿈에도 모르셨을 것이다. 아셨다면 아버님이 말한 '그날'은 통일이, 남과 북이 통일이 되는 날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말한 '그날'은 남과 북 통일되는 날일 것" 

- 이산가족찾아주기 등 민간통일운동을 해온 입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해야 할 것 같다. 분단은 다른 한편 통일운동의 시작이었다. 한 마디로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는 항일독립운동을 폄훼하는 일이다.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건국도 없었다. 통일정책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남과 북이 통일하는 데 외세 때문에 하냐는 거다. 그럼 외국 사람들이 찬성 안하면 통일 안해야 하나? 외국 말을 안 들을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이는 정도의 문제다."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놓고 촛불시위가 벌어졌고 현재도 처벌 문제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나?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아나. 영국 축산농민들이 거의 망할 정도로 강도 높게 대응했다. 한국의 경우 전 정부에서 광우병을 우려해 미국산 쇠고기의 뼈와 내장 등 질 문제를 들어 수입을 중단했다. 그런데 현 정부의 경우 국민과 의논하지 않고 수입조건을 확 풀어 버렸다.

나는 한국국민이 문제 삼는 건은 무엇보다도 이 같은 정부의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본다. 내가 먹을 것을 왜 상의도 없이 정부가 맘대로 멋대로 하느냐는 이의제기라고 본다. 이 문제로 대통령이 두 번이나 사과했다. 사과할 일을 왜 하나. 정부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애 엄마를 비롯, 촛불을 켠 사람들을 모두 불법으로 매도하는 것은 국민의 먹을거리를 맘대로 결정한 정부의 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씨를 말리겠다는 것과 같다. 먹을거리에 대한 의사표현이 불법이면 개혁과 저항운동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심재호씨
 심재호씨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심훈 선생의 육필원고 등 각종 유품들
 심훈 선생의 육필원고 등 각종 유품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당진은 <상록수>의 고향... 고향에 모두 주고 싶다"

- 심훈 선생을 기리는 '상록 문화제'를 본 소감은?
"상록문화제에 참석한 것은 두 번째다. 첫 관람 때보다도 참여 군중이 더욱 늘었다. 수천여 명의 관중이 동원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낮부터 밤까지 꾸준히 참석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상록수>을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록문화제 이름으로 문화를 즐기는 그 자체가 대단한 자기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 심훈 선생에게 당진은 어떤 곳이었나?
"사료적으로 아버님은 노량진 출신(현 경기도 시흥)이다. 아버님이 내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셔서 당진을 고향으로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이 서른이 넘어 당진에 내려와 직접 집(필경사)을 짓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살았다. 또 이곳에서 <상록수>가 태어났다. 아버지와 지낸 상록수 사람들도 당진 사람들이다. 때문에 아버지 육필 원고와 유품은 당연 당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당진사람들이 심훈 선생의 작품을 당진 것이라고 말하는 데 동의한다. 나는 필경사에서 태어났다. 당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고향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주고 싶은 것은 애정이고 의무다."

- 아들 입장에서 심훈 선생의 글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작품과 이유를 꼽자면?
"<상록수>의 마지막 구절인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는 대목이다. 주인공인 동혁은 또 다른 주인공인 영신이 병이 악화되어 숨지는 등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농민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마지막 구절은 그가 상록수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때도 많다."

[관련기사]
☞ [10·21대책] 서민 고통 외면한 "건설사 살리기 대책"
☞ [국감]삼성 앞에서 그저 "죄송"할 뿐인 대법관
☞ 공정택과 장제원, 누가 더 웃겼나! 국감코미디 "베스트5"
☞ 학생들이 "괴담" 휘둘려 백지답안 냈다고?


태그:#심훈, #상록수, #심재호, #상록문화제, #필경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