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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이 존경하는 인물

이강국은 조용히 신문을 접었다. 조선 사회주의 운동은 일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는 박헌영을 생각했다. 사실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이재유보다 박헌영이었다. 물론 그의 독일 유학을 주선하고 있는 사람은 미야케 교수였지만, 그에게 독일 유학의 동기를 준 이는 박헌영이었다.

이강국은 이재유보다는 박헌영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박헌영은 김단야와 함께 사회주의의 최고 엘리트 코스인 모스코바 국제레닌학교를 마친 정통 공산주의자였다. 이 때 박헌영과 함께 수학한 동문 중에는 베트남의 구국 영웅 호치민도 있었다.

박헌영은 3년 전에 체포되어 수감 중이었다. 그가 출옥하기 위해서는 3,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강국은 박헌영 같은 지도자를 모시고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베를린 유학을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공부를 마치고 올 때쯤이면 박헌영도 출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강국은 박헌영 같은 인물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정 박헌영. 충남 예산에서 나고 자란 박헌영은 이강국보다 10세 정도 연상이었다. 아버지 박현주와 아들 박헌영에게는 공교로운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부자(父子)가 모두 세 여인을 겪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는 사별과 이별의 슬픈 이력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 부자는 순탄치 않은 삶의 역정을 걸었다고 할 수 있었다. 같은 세 여자라고 해도 아버지의 것은 그리 특기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반면 아들의 것에는 혁명과 비운의 곡절이 점철되어 있었다.

충청도 시골에서 올라와 경성고보에 입학한 소년 박헌영은 영어에 남다른 의욕을 가졌다.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야간 학교 영어과에도 입학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했고, 그 해에 경성고보를 졸업하게 되자 무작정 동경으로 건너가게 된다.

맑스 걸, 레닌 레이디들의 붉은 연애

동경에서 만난 친구 겸 동지 김단야는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는 김단야의 권유로 상해에 가서 고려 공산청년당에 가담한다. 그는 당시 고려공산당 상해 지도자였던 안병찬에게 학자금 지원을 받아 상해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익혔다.

1921년 봄, 그는 정식으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면서 같은 당원인 주세죽과 부부 사이가 되었다. 주세죽은 3·1운동으로 상해에 망명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로 자처했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비슷해지려고 노력했던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고명숙, 허정숙 등과 함께 막스 걸, 레닌 레이디를 지향했던 이른바 붉은 연애의 주인공이었다.

훗날 경성고보 동창인 심훈을 만난 것도 그 시절 상해에서였다. 심훈이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검열로 중단된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과 주세죽을 모델로 하여 씌어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심훈이 쓴 시 <박군의 얼굴>에서 박군은 박헌영이 모델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일본의 자본주의를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일본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 자동적으로 조선은 독립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헌영은 국내 활동을 위해 주세죽과 함께 비밀 입국을 시도하다가 안동현의 한 음식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첫 번째 수감 생활에 들어간다.

1년 6개월 만에 출옥한 그는 경성으로 가서 고려 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된다.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지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마침내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그는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에도 잠시 몸담았던 그는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신 이상 증세를 드러내 보석으로 출감하게 된다.

그는 아내 주세죽과 소련으로 탈출한다. 그는 레닌대학에 다녔고 아내는 코민테른에서 일했다. 그는 김단야를 만나 한 집에서 거처하게 된다. 얼마 후 아내 주세죽이 임신을 했다. 그런데 박헌영은 임신된 아이가 자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얼마 후 주세죽은 딸을 낳았다. 박헌영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 기차 안에서였다. 아이에게는 비비안나라는 러시아 이름이 붙여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요양하던 중 주세죽은 말없이 집을 나갔다. 한편 박헌영은 당의 명령을 받아 상해로 가게 되었다. 그는 세 살짜리 딸을 동지에게 맡겨야 했다. 그러나 그 동지마저 죽게 되자 아이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김단야와 주세죽울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은 이미 부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다시 일경에 체포된다. 일경은 김단야를 체포하려고 덮쳤는데 그 자리에 박헌영이 있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온몸에 피멍이 드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김단야와 주세죽을 보호하며 버텼다.

한편 주세죽은 박헌영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박헌영은 형집행정지 상태이면서도 상해 공산당의 핵심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김단야와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한다. 하지만 모진 운명은 박헌영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김단야는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일제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사형되었고 주세죽은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되었다.

1939년 박헌영은 6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게 된다. 그는 경성 콤의 지도자가 된다. 이 때 박헌영은 약 20세 정도 연하인 정순년과 부부 행세를 하며 지방의 한 아지트로 잠적했다. 얼마 후 정순년은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안 그녀의 부모가 딸을 데리러 왔다.

"조국이 해방되거든 만납시다."

박헌영은 정순년에게 민들레꽃 문양이 있는 가락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정순년의 부모는 그녀를 원래 사윗감으로 정해 두었던 어떤 목수와 혼인시켜 버렸다.

박헌영은 제2차 경성 콤의 검거망을 벗어나려고 전라남도 광주로 피신했다. 그는 종연 방직공장 청소부로 일하다가 이름 없는 벽돌공장 노동자로 직업을 바꿨다. 1944년 그는 경성에 있는 소련 영사관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전남 일원의 콤 조직 재건에 착수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남조선노동당 최고 지도자로 재기한 그는 점령사령관 하지, 군정장관 아놀드,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 등과 회담을 벌이며 단정 수립을 저지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벌였다. 그는 김일성을 만나기도 하고 소련 영사와도 회담하며 분단을 막으려고 끝까지 고군분투했다. 그는 남북한을 세 차례나 오가며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그는 미 군정 경무국에 의해 폭동 음모 혐의로 금 120돈의 현상금이 걸려 수배되었다. 그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파란과 곡절, 박헌영과 세 여인과 그 자식들

한편 소련에서는 유형 생활을 끝낸 주세죽이 '조국으로 가 공산당을 재건하면서 남편 박헌영과 살게 해 달라'고 스탈린에게 탄원했지만 기각되었다. 소련 당국은 그녀의 처신이 기회주의적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아마 이 때쯤 해서 박헌영은 소련의 보육원에 맡겨졌던 딸의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딸에게 최초로 편지로 써 보냈다.

"사랑하는 내 딸, 먼 조선에서 네게 안부를 전한다. 내 딸이 살아서 성년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구나. 세살박이 너를 보육원에 남기고 떠난 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나는 너에 관한 유일한 기억으로 너의 사진을 한 장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가 왜 너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너는 알아야 한다. 당시 아버지 앞에는 어렵고도 위험한 길이 놓여 있었다. 너는 나와 함께 갈 수 없었단다. 딸을 데리고 가지 못한 아버지에게 화내지 말기를 바란다.

귀여운 딸아, 우리가 헤어지고 난 후 모든 기간을 아버지는 지하와 감옥에서 보냈다. 나는 벌써 마흔 여섯이고, 지난 세월은 내 얼굴에 주름을 남겨 놓았다. (중략) 나의 비보치카(비비안나의 애칭)! 너의 엄마 코레예바(한국의 여인이라는 뜻. 주세죽에게 박헌영이 모스크바에서 지어 준 이름)가 어디 계시는지 너는 아니? 엄마는 아팠는데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구나."

주세죽의 청원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헌영은 1949년 윤레나라는 상류 계층의 여인과 결혼한다. 그들은 딸과 아들을 낳아 나타샤와 세르게이라는 러시아 이름을 붙였다. 1953년 주세죽은 사망했다.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3년 ‘미 제국주의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사형 언도를 받고 2년 후 총살당했다.

처음 고아원에 맡겨졌던 비비안나는 나중에 고급 보육원으로 옮겨졌다.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외국 혁명가 자녀를 위한 집 스타소바 육아원이었다. 그녀가 조선 공산당 핵심 간부의 딸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 보육원에는 중국 마오쩌뚱의 아들도 있었다고 했다. 비비안나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춤 솜씨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결국은 러시아 민속 발레리나로 대성했다.

한편 국내 청주의 아지트에서 태어난 박헌영의 아들은 이곳저곳을 표박했다. 처음 그는 경성 콤 그룹 간부 김삼룡의 처 이순금이 맡아 키웠다. 이어서 아이는 해방된 해 겨울부터 1년 반 동안 박헌영의 이복형이 맡아 서울 장충동에서 데리고 있었다. 1950년 3월 김삼룡  이주하 등이 검거되자, 10살짜리 어린 것은 한때 산에 들어가 빨치산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산과 인연이 깊었던지 소년은 국민학교를 다니다 말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의 속명은 박병삼, 법명은 원경(園鏡)이었으며, 그는 경기도 평택에 있는 만기사의 주지가 되었다. 한편 박헌영이 총살당하기 전 김일성에게 외국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딸과 아들, 즉 나타샤와 세르게이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박헌영과 세 여인과 그 자식들, 그들의 일대기는 이렇게도 쓰리고 아리고 눈물겹고 허망스럽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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