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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

이명박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이라 하여 김대중과 노무현을 한사코 망각하고 싶어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김구를 부각시켰다. 이명박 정부는 김구 대신 이승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은 8·15를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자리매김하려는 데에서 극명히 나타났다.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익단체의 집회에서는 으레 이승만에 대한 찬사가 울려 퍼진다. 그들은 민망하게도 '국부'라는 근대 이전의 어휘를 부활시켰다.

그들에 의하면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다. 지난 8월 5일 열린 그들의 집회는(이승만에 대한) '대한민국 감사 한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졌다. 그들은 이승만을 비판하는 국민은 '패륜하는 국민'이라고 말한다. 조갑제 같은 이는 "이승만 대통령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세운 위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이승만동상·이승만기념관·이승만거리·이승만 공원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공언했다.

사실 이승만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좌·우에 따라 갈라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좌파는 이승만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우파 내부에서도 갈라진다. 일찍이 우익 민족주의자 장준하는 이승만을 가리켜 '희대의 협잡꾼이자 정치적 악한'이라고 한 반면, 김활란은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최근 국사 교과서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드세게 일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 정점에 이승만이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개정하려는 사람들은 뉴라이트와 상공회의소 같은 우파 세력이다. 그리고 여기에 국방부까지 가세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국부 이승만을 부정하면 공산주의자'라는 식의 극단론을 취하는 입장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일까? 이 글에서는 개인 이승만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기로 한다.

 '이승만 건국대통령 범국민 감사 한마당'에서는 "3.15 부정선거는 아랫사람이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승만 건국대통령 범국민 감사 한마당'에서는 "3.15 부정선거는 아랫사람이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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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독립운동가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이 훌륭한 독립운동가였다고 알고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에게 독립유공자 최고 순위인 대한민국장을 서훈했다.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은 만 명이 넘는 유공자 중 29명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안중근과 김좌진·김구가 포함되어 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문창범이 주도한 노령정부 역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과는 가장 허술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만든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제1서열인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한민국 프레지던트'라는 명함을 만들고 집정관총재 집무실을 개설한다. 그리고 그는 한성임시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상해임시정부에 각료로 참여한 안창호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일단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임시정부들이 독립운동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 이승만을 왜 국가원수로 추대했는지 궁금해진다. 사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미스터리에 속하는 일이다.

구한말 과거에 다섯 번 낙방한 이승만은 뒤늦게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 개화파로 돌변한다. 그는 김옥균·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조교 그룹이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정부전복죄로 투옥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민영환의 주선으로 풀려나 도미한 후 학업에만 열중한다. 그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나라가 완전히 망한 1910년이었다.

이후 그는 기독교청년회(YMCA)와 감리교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되는 일을 한 기록이 없다. KBS 한국사전(傳) 이승만 2부작은, 이승만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두둔하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의사의 재판에 통역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방영했다. 장 의사의 방법이 폭력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안중근과 윤봉길의 거사 등에도 거부감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그가 임시정부들에서 일제히 국가원수로 추대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송건호·이이화 등 이승만 연구학자들은 대체로 연장자를 우대했다는 점,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미국이 초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고 진단한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총장을 지낸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가까운 제자임을 은연 중 과시하고 다녔다고 한다.

 국민행동본부, 뉴라이트전국연합, 대한민국사랑회, 한국자유총연맹 등 보수단체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건국60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과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국민행동본부, 뉴라이트전국연합, 대한민국사랑회, 한국자유총연맹 등 보수단체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건국60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과 태극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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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가 쓴 <한국사 이야기>에 따르면, 이승만은 김규식이 파견된 파리회의에 자신이 가려고 했다. 그가 파리회의의 한국대표를 자임하고 나서자 대한민국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을 믿고 한국 대표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의 제자라던 이승만은 끝내 파리행 여권도 받지 못했다. 

파리회의 참석 기회를 놓친 이승만은 난데없이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 위임통치를 건의한다. 1919년 3월 19일 자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하여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한 것이었다. 이 청원의 제출자는 이승만과 정한경으로 되어 있다.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불신임되고 급기야 탄핵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위임통치론이 빌미가 된 것이었다.

상해임시정부를 외면하던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가 정통성을 가지게 되자 대통령 직함을 전제로 상해로 건너가 부임한다.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신채호)"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이동휘)"

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거부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팽개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임시정부로서도 현장에 근무하지 않는 그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교과서를 바꾸겠다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내 공산주의 세력의 비토를 받아 탄핵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8·15까지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랬던 그가 조국이 해방되자 74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한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승만은 평화주의자인가

"나는 지금이 우리들이 공격 조치를 취하고 평양에 있는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한 절호의 시기라고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김일성파의 인간들을 산악지대로 축출하고 그들이 그곳에서 굶어죽게 할 것이며 그 다음에 우리의 방어선은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에 걸쳐 증강되어야 할 것입니다."(박태균 저 <한국전쟁>에서 재인용)

이것은 이승만이 미국인 정치 고문 로버트 티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글의 일부이다. 이 편지는 6·25 남침 9개월 전인 1949년 9월 30일 작성된 것이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북침의 의지와 그에 따른 지원을 미국인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승만은 재임 중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다녔다. 6·25 남침 직전에도 당시의 각료 조병옥 같은 이는 <서울신문>에 북진의 시급성을 강조하는 글을 써대고는 했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것은 당시 국방장관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신성모의 말이었다. 이는 한국전쟁 발발 유인의 책임이 이승만에게도 일부 있음을 시사한다.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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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미국과 함께 한국전쟁 직전까지 4·3 항쟁 등에서 6~10만에 달하는 좌익과 양민을 죽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는 15~30만에 이르는 좌익인사와 양민을 처단했다.

6·25 직전인 1950년 6월 19일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평화통일추진 특사를 파견했다.(물론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고르바초프가 가져온 소련 문서에는 스탈린이 먼저 남측에 평화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김일성에게 조언한 기록이 있다.)

아무튼 이승만은 북에서 온 특사를  잡아다 온갖 고문을 다하여 불과 며칠 만에 전향 선언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일은 보수· 우익들이 보아도 온당할 수가 없다. 참고로 당시 보수 김성칠(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  남긴 일기 한 토막을 읽어 본다.

"이북의 소위 조국통일 호소에 대한 이남의 처사도 온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넘어온 사람은 곧 되돌려 보내고, 그 제안의 불합리함을 천하에 밝히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닐는지?

제안의 내용은 우물쭈물 비밀에 붙이고, 이른바 호소문을 가져온 사람을 잡아서 전향을 시키고 방송을 하고 하니, 아무리 억지의 제안을 가져왔대도, 사자(使者)의 형식으로 월경해 온 사람들을 잡아서 족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남이며, 그들이 대한민국에 넘어와 보고 감격한 나머지 이북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는 발표는 좀 지나치게 어수룩한 수작이고, 국민은 또 어떠한 고문(拷問)을 썼기에 일껏 결심하고 넘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쉽사리 변절하게 하였을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작 이승만은 6·25가 터지자 즉각 대전으로 도망쳤다. 그는 서울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대국민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피란하지 말고 직장을 지키라고 말했다. 그래 놓고 나서 그는 또 부산과 거제도로 피신한다.

이승만 정부가 한강다리를 끊은 것은 6·25 발발 불과 72시간도 안 되어서였다. 민간인은 물론 수만의 국군이 한강 이북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은행 지하에 현찰을 그대로 두고 피란하면서도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인사들은 적출해서 사살했다. 반면에 화급한 경황 중에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까지 챙겨서 풀어주었다.

이승만은 끝까지 휴전을 반대했다. 그가 반공포로를 무단으로 석방한 것도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반도에 26개의 핵폭탄을 쓰자는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작권을 돌려주려는 미국에 그는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자인가

이승만은 민주혁명인 4·19에 의해 축출되었으니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이 그를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처럼 여기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1947년 시인 서정주는 <우남 이승만전>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서정주가 쓴 이승만 전기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이승만이 읽어 본 다음에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1995년에야 한국출판협동조합에서 간행했다.)

"서정주라는 사람, 좋은 시인인가?"
"네. 보통 이상입니다."
"그런 사람이 동양의 예의범절도 모르나?"

이승만은 자기와 자기 아버지를 경칭으로 호칭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을 정도로 권위주의적이었다.

돈암장 시절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최기일(재미 경제학자)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화상>에 따르면 이승만 앞에서 대등하게 5분 이상 말한 한국인은 없었다고 한다. 상대가 말을 시작하면 이승만은 1~2분도 안 되어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자기 두 손을 상대방의 입에 갖다대고는 했다.

부인 프란체스카는 권위적인 데에다가 인색하기까지 했다. 돈암장 시절 그녀는 맘에 들지 않는 한국인에게는 나이와 직함을 가리지 않고 "이 방에서 나가요, 앞으로 오지 마세요" 소리를 남발했다. 최기일은 송필만이나 고희동 심지어는 안재홍 같은 신사들이 프란체스카에게 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34세 때 25세 연상인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원망의 대상이었다. 이를 테면 윤치영이나 임영신 같은 이도 "리 박사가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산다면 좋을 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아쉬워했다.

4.19혁명 직후에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현재 이승만 흉상이 서 있던 자리에는 백범 김구의 동상이 서 있다. 4.19혁명 직후에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현재 이승만 흉상이 서 있던 자리에는 백범 김구의 동상이 서 있다.
 4.19혁명 직후에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현재 이승만 흉상이 서 있던 자리에는 백범 김구의 동상이 서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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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두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이승만이 민주주의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1952년 당시 헌법은 대통령 간선제였다. 하지만 국회에서 세력을 잃은 그는 재선이 어려워지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냈다. 이 안이 거부되자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2명의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등 온갖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여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또한 그는 1954년 대통령 3선 제한 조항을 삭제하려고 개헌을 시도한다. 개헌에는 국회 재적 3분의 2인 136명의 찬성이 필요했는데 공교롭게도 1명이 모자란 135명이 찬성했다. 그러자 그는 국회 재적의 3분의 2는 135.333 명이므로 사사오입해서 135명이라는 해괴한 산법으로 개헌을 밀어붙였다.

'국부 이승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엄정하게 말해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다고 할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독립운동가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순수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승만은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애국·애족보다는 집권과 반공이 우선이었다.

반공주의가 민주주의와 공존하기 어렵듯이 그는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 이런 인물을 단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국부 운운한다면 그것은 실상 보수·우파에게도 이롭지 못한 일이다. 일면 그것은 보수 우파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행위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부'라는 말은 또 얼마나 전근대적인가?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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