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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옛길을 걷는 어느 노인 등산객
 호젓한 옛길을 걷는 어느 노인 등산객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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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옛날엔 저 고갯길을 넘어 빨래골도 가고 그랬었지요."
"요즘이야 누가 걸어 다니나요? 등산객들이나 걸어 다니죠. 그래도 옛날에는 수유리로 마실 갈 때도 저 고개를 넘어 다녔지요."

서울 성북구 정릉 초등학교 정문 근처에서 꿀벌을 치는 80세 노인과 할머니들이 하는 말입니다. 시간은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할 거라고 합니다.

9월 30일 오후, 호젓한 서울의 옛 마실 길을 찾아 정릉에서 빨래골(수유리)로 연결된 길을 탐방하기 위해 먼저 찾은 곳이 정릉동이었지요. 성북구 정릉동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입니다.

이곳의 처음 지명은 사을한리로 살한리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인데, 줄여서 사아리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골짜기 마을에서 정릉초등학교로 오르는 길가에 작은 공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터에는 공중화장실과 함께 50여개의 꿀벌통이 놓여있어서 웅웅거리는 꿀벌들이 볼만했지요.

정릉에서 50년을 살며 30년동안 꿀벌을 친 80세 노인의 벌통들
 정릉에서 50년을 살며 30년동안 꿀벌을 친 80세 노인의 벌통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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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꿀벌들은 이 마을에서 50년째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30년 째 치고 있는 것이랍니다. 아카시아 꽃이 피는 봄철에 한 번 꿀을 따고 나면 그만이어서 수입은 별로지만 노인은 그래도 꿀벌들과 한 가족 같아서 버릴 수가 없답니다.

50년 정릉 토박이 노인을 만나다

정릉동에서 수유리를 오갈 수 있는 고갯길에 대해서는 서울토박이라는 할머니 두 분도 잘 알고 있었지요. 꿀벌 치는 노인과 헤어져 탐방길로 나섰습니다. 바로 위쪽 길가의 정릉초등학교는 수업이 끝난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 모습이 정겹고 시골스런 풍경입니다.

산길로 접어들었지만 길은 아직 잘 다듬어져 있는 모습이네요. 길가엔 배드민턴장에서 경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평일 낮 시간이지만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은 요즘의 불경기에 취업난과 무관하지 않겠지요.

그래도 숲속 이곳저곳에 만들어 놓은 체력단련용 각종 운동기구와 배드민턴장은 노인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시설들인 것 같습니다. 길은 약간 경사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능선길이 이어집니다. 능선길도 걷기에 매우 좋은 부드러운 흙길입니다.

길가에 있는 소박한 모습의 통정대부 강릉최공의 묘
 길가에 있는 소박한 모습의 통정대부 강릉최공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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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걷노라니 길 오른편에 무덤 하나가 나타납니다. 무덤은 잔디도 덮여있지 않고 파릇파릇한 질경이로 뒤덮여 있습니다. 무덤 앞에 작은 비석 하나가 달랑 서 있는 모습이 조금은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비문을 읽어보니 통정대부를 지낸 강릉 최씨의 무덤입니다.

통정대부라면 정3품의 당상관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중앙부처의 국장급이나 청와대비서관급에 해당하는 품계입니다. 조선시대 육조의 참의나 동부승지를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이만한 벼슬이면 당시 결코 만만한 양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높은 벼슬을 지낸 양반의 소박한 무덤

그런데 무덤은 일반 서민들의 무덤과 다름이 없으니 어쩌면 참 소박하고 참하게 살았던 양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손들도 마찬가지구요. 요즘 보면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조상묘를 왕릉처럼 꾸며 놓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자격지심이거나 보상심리 때문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칼바위 공원 지킴터
 칼바위 공원 지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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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앞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나이 많아 보이는 노인 한 분이 씩씩한 걸음걸이로 다가왔습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냐고 물으니 수유리 쪽에서 넘어오는 길이랍니다. 내가 말을 건네자 노인이 제 옆에 앉았습니다. 사시는 곳이 정릉이랍니다.

"그럼, 그럼, 옛날에도 많이 넘어 다녔지, 그래서 이 나이에도 이렇게 건강하게 잘 걸어요."

노인은 매우 정정한 모습이었습니다. 올해 78세인 노인은 옛날에도 이 길을 걸어 정릉에서 수유리를 오갔다고 합니다. 몇 년 전까지 빨래골에 오랜 친구가 살고 있어서 자주 오갔는데 몇 년 전에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나서 요즘은 자주 가지 않는답니다.

평일이어서인지 오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가을빛이 물들어가는 호젓한 산길입니다. 왼편은 우람한 북한산이 아직은 푸른빛이고 오른편은 나지막한 동산입니다. 길가에 핀 억새꽃도 아직은 하얀 빛이 아니었지요,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앞쪽에서 고운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굽이 길을 돌아서니 저만큼 앞에서 할머니 한분이 걸어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요. 길가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었던 모양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군부대 철제 울타리가 길옆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공초선생의 묘와 독특한 모습의 시비
 공초선생의 묘와 독특한 모습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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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 근처에 칼바위공원 지킴터가 있었습니다. 북한산 칼바위 능선으로 오르는 길 입구입니다. 해가 어느새 설핏 기울었는데 젊은 등산객 몇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국문까지 올랐다 내려오겠다고 합니다.

고개 넘어 빨래골 가는길

이곳에서 빨래골로 향하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길은 갑자기 좁아집니다. 지금까지는 제법 넓은 길이었는데 비좁은 산길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도 걷기엔 전혀 문제가 없는 길입니다. 조금 내려가자 오른편 배드민턴장에서 40대 중년부부가 함께 배드민턴을 하고 있었지요.

남편은 아내에게 자상하게 배드민턴 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지요. 그들을 뒤로 하고 조금 더 내려가니 길은 골짜기로 향했습니다. 골짜기로 내려서자 옹달샘가에 노인 두 분이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두 노인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길은 여전히 비좁은 산길입니다. 그래도 골짜기엔 졸졸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산길에서 할머니들 몇 분은 도토리를 줍고 있었습니다. 배낭이 불룩한 것이 제법 많이 주운 모양입니다. 저렇게 사람들이 다 주워버리면 다람쥐들의 겨울 식량이 부족할 것 같아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빨래골 표지석
 빨래골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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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선생의 묘소' 갑자기 눈앞에 검은 돌에 새겨진 글이 나타났습니다. 공초선생이라면 하루에 많이 피울 때는 담배 열 갑을 피웠다는 골초 시인입니다. 안내석의 화살표는 오른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거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찾아가보기로 했습니다.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묘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50여 미터를 걷자 오른 편에 철제 울타리가 쳐진 묘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출입문이 걸려있긴 했지만 자물쇠를 채워놓진 않아서 삐거덕 거리는 빗장을 열고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빨래골 근처 길가에서 공초 오상순 선생을 만나다

묘역은 상당히 넓고 아늑한 모습이었습니다. 평생을 가족도, 가진 것도 없이 홀로 살며 동가식서가숙 했다는 선생의 묘소가 이만큼 되는 것은 선생을 따르던 후학들이 많았기 때문이겠지요. 입구에는 선생을 따르는 숭모회가 세워놓은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묘소 앞 중앙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편에 사방으로 구멍이 뚫린 기둥 하나가 서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왼편에는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이라는 선생의 '방랑의 마음' 앞 구절을 새긴 시비가 또 아주 특이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빨래골 개울과 만국기로 뒤덮인 배드민턴장
 빨래골 개울과 만국기로 뒤덮인 배드민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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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주인이여 평안하신고,
곁에 앉힌 술 단지 그럴법하이
한잔 가득 부어서 이리 보내게
한잔, 한잔 또 한잔 저달 마시자
오늘 해도 저물고 갈 길은 머네,
꿈같은 나그네 길 멀기도 하다.

문득 선생이 담배와 함께 평생 즐겼던 술에 대해 쓴 '한 잔 술'이라는 시 앞부분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아차! 이렇게 선생의 묘소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소주 한 병에 오징어포 하나, 그리고 담배 한 갑 쯤 준비해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욕심 없이 평생을 빈 주먹으로 살다간 공초 선생의 묘소는 포근한 초가을 날씨 속에 아늑하기만 했습니다. 묘소를 둘러본 후 밖으로 나와 철제문을 걸어놓고 하산길로 다시 나섰습니다. 잠시 더 걸어 내려오자 제법 넓은 공터가 나타났습니다.

빨래골 지킴터
 빨래골 지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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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 밑엔 노인들 몇이 모여 앉아 음료수를 나눠 마시며 정담을 하고 있었지요. 근처 배드민턴장 옆에는 누가 가꿔놓았는지 예쁘게 피어난 꽃들이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정담을 나누던 노인들 중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일어서자 할머니가 벌써 가느냐며 말렸지만 할아버지는 무슨 말에 삐졌는지 불쾌한 모습으로 내려가고 말았지요,

40분 만에 빨래골에 도착하다

이곳에서부터는 다시 넓은 길입니다. 오른편으로 오르면 삼성암으로 가는 길입니다. 넓게 포장된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걸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빨래골 터' 표지석이 나타났습니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에는 이곳이 '궁중의 무수리들이 빨래터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란 이름이 생겼으며, 인근 주민들이 빨래터로 이용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표지석 아래 개울은 흐르는 물이 너무 적어 빨래하기엔 부족할 것 같았지요. 요즘 가을가뭄 때문일 것입니다. 근처의 배드민턴장은 온통 만국기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 너무 낯설고, 오히려 전설이 깃든 옛 빨래터의 정취를 해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빨래골 마을이 저만큼 내려다 보였습니다. 빨래골 지킴터 아래로 가난해 보이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마을 안길 한 쪽에는 재활용 폐지를 모아 수북하게 쌓아 놓은 모습이 어느 가난한 노인의 솜씨처럼 보였습니다.

재활용 페지를 모아 쌓아놓은 모습
 재활용 페지를 모아 쌓아놓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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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들여다보니 정릉을 출발한 지 40분이 지나 있었습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걸어 40분이면 노인들도 이 정도 시간이면 걸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수유리에서 출발하여 미아삼거리와 길음동을 거쳐 정릉동까지 도로를 따라 걸으면 아무래도 3시간은 걸릴 것입니다. 세 시간 거리를 산길을 따라 걸으니 40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 길이 바로 정릉동과 수유리 빨래골을 오가던 옛 마실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마실길, #정릉, #빨래골, #공초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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