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의 인기와 사랑을 받으며 노년까지 배우로 활동하던 폴 뉴먼이 2008년 9월 26일(미국시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공익재단 설립을 통한 자선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이 알려진 후 지금까지 그와 함께 활약한 로버트 레드포드와 같은 유명인에서부터 이름 모를 네티즌까지 많은 이들이 그를 그리고 있다.

50년대,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도전

폴 뉴먼은 50년대 중반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을 잇는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캐릭터로 스크린에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주로 완숙의 경지에 다른 60년대 후반 이후 영화에서다.

경쾌한 음악(B.J. 토마스의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에 맞춰 캐서린 로스를 태우고 자전거를 모는 장면과 빗발치는 총탄을 향해 뛰어나가는 장면으로 유명한 <내일을 향해 쏴라>(1969)와 경쾌한 리듬의 래그 타임('The Entertainer' 외) 선율에 30년대 갱스터 영화를 재해석한 <스팅>(1973)에서의 사기꾼 역할이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영화들에서 <워터 프론트>의 말론 브란도, <이유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과 같은 반항과 청춘의 이미지를 뽑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50~60년대 폴 뉴먼이 연기한 영화들은 다정하고 의젓하며 유머있는 고전 할리우드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와는 달랐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도전을 그린 작품들로 여러 가지 문제로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미국 젊은이들을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 왼쪽이 폴 뉴먼, 오른쪽이 로버트 레드포드.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 왼쪽이 폴 뉴먼, 오른쪽이 로버트 레드포드.


이 영화들은 스크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와 같은 열기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락거리가 흔치 않던 그 시절, 젊은이들은 전차값을 아껴가며 모은 돈으로, 여러 번의 상영으로 스크래치가 난, 비 내리는 화면의 영화라도 보고자 재개봉관을 기웃거리며 새롭게 등장한 스타,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폴 뉴먼의 영화에 탐닉했다. 이 영화들은 놓치면 안 되는 젊은이들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젊은이, 프랑스의 젊은이, 영국의 젊은이들 역시 새롭게 등장한 할리우드 스타에 열광했다. 50년대 후반, 일본의 태양족 영화,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국의 프리 시네마와 같은 젊은 영화의 등장은 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할리우드의 얼굴,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

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반항과 젊음, 폭력과 전복을 상징하는 이들의 등장은 할리우드를 뒤흔든 지각변동과 관련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 연방정부는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이 반 독점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진행했다.

이 소송은 대형 스튜디오들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는데, 그 결과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대대적인 수술을 받아야 했다. 또한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관객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할리우드는 극장에서 멀어지고 있는 젊은 세대를 붙잡기 위해 새로운 활력이 필요했다.

당시 뉴욕에서는 러시아의 유명한 연극 연출가 스타니 슬라브스키에 영향받은 리 스트라스버그의 액터스 스튜디오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변화를 불어넣고 있었다. 액터스 스튜디오는 스타니 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을 토대로 배우의 체계적인 훈련을 통한 연극 만들기를 실행하는 공간이었다. 할리우드는 이곳 출신들을 영화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스타가 된 배우는 말론 브란도였다. 1951년 무대에서 사랑받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엘리아 카잔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거친 남성 스탠리 역의 말론 브란도는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만들어 내던 거친 남성, 예를 들어 험프리 보가트와 같은 거칠지만 부드러운 인물과는 전혀 달랐다. 길들지 않고, 꾸미지 않은 날 것 그대로였다. 말론 브란도는 1954년 <워터 프론트>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말론 브란도의 뒤를 이어 제임스 딘이 스타로 등장했다. <에덴의 동쪽>(1955), <이유없는 반항>(1955), <자이언트>(1956) 등의 작품에서 우수에 찬 표정과 반항기 어린 시선으로 사랑을 받던 그는 1955년 자동차 사고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세 번째 영화가 채 완성되기도 전이었다. 뜨거운 영화와 짧은 생애는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

뒤를 이은 스타는 폴 뉴먼이었다. 몇 편의 텔레비전 시리즈에 얼굴을 내밀던 그는 1956년 복서 실존 인물인 록키 그루지아노의 역을 맡은 <상처뿐인 영광>, 1957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출연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1958년 조안 우드워드와 함께 출연한 <길고 긴 여름날> 등의 작품을 통해 요절한 제임스 딘을 잇는 젊은 세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 <허스러>의 한 장면. 큐를 잡은 사람이 폴 뉴먼

영화 <허스러>의 한 장면. 큐를 잡은 사람이 폴 뉴먼


50년대와 60년대 미국영화를 잇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폴 뉴먼 이들 모두는 5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화려하게 수놓은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의 배우였다. 이 중 제임스 딘은 너무 짧은 생애를 살다갔으며, 말론 브란도는 60년대 내내 슬럼프에 허덕이다가 1972년 <대부>로 극적인 재기를 할 때까지 일종의 단절과 같은 시간을 보냈기에 이들의 이미지는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폴 뉴먼의 경우는 이 둘에 비해 덜 강렬하다. 그는 50년대의 배우이자 60년대에만 <허슬러>(1961), <허드>(1963), <쿨 핸드 룩크>(1968), <레이첼, 레이첼>(1969) 등으로 네 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6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를 추모한다. 한편의 영화로 그를 추억한다면 나는 그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긴 <칼라 오브 머니>(1986)나 최근작인 <허드서커 대리인>(1994), <로드 투 퍼디션>(2003)과 같은 영화가 아닌 50년대에서 60년대의 거친 젊은 영화들로 하겠다. 당시 영화들은 컴퓨터 그래픽(CG)이 아닌, 젊음의 패기로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런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폴 뉴먼의 50년대 영화, 아니 60년대 <허슬러> 같은 영화를 한번 보길 권한다. 이들 영화를 보는 것은 고전영화 팬들 뿐만 아니라 뒤늦게 폴 뉴먼이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에게도 모두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오래 돼서 촌스럽고 속도도 느려 지루하다면 미남의 젊은 배우 폴 뉴먼을 본다는 재미로 보는 것은 어떨지.

폴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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