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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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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이하 '정') "이제 이야기를 바꿔보겠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평전을 연재하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젊은 독자들한테는 낯선 분일 것입니다. 알 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젊은 독자들을 위해서 장준하 선생이 어떤 분인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김삼웅(이하 '김') "우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1918년생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에 태어났는데요, 일본에 유학을 가서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끌려갔습니다. 평양에서 3개월 동안 훈련받았는데, 그때 몸이 좋지 않았지만 중국 쪽으로 파견이 못될까봐 아주 용감하게 '나, 몸 아프지 않다, 중국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며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저 사람 친일파가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지요. 즉 중국으로 가서 일본군을 탈출해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한 겁니다. 실제로 일본군을 탈출해서 90일 동안 무려 6천리를 걸어서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길에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고대 총장을 하셨던 김준엽 박사, 현 광복군 회장 김유길 선생, 전 광복회 회장 김우전 선생, 윤경빈 선생 등이 당시 동료입니다. 어떤 때는 중국의 산적들에게 붙잡혀 죽을 뻔했고. 또 어떤 때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산을 넘다가 호랑이밥이 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임시정부에 가서 미군과 함께 OSS훈련을 받으면서 잡지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1945년 해방되던 해 8월 17일 미군기를 타고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여의도공항에 도착했는데, 당시 대장은 이범석 장군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되던 해인 1975년 8월 17일 의문사를 당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상계>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관장님께서는 장준하 선생이 발행한 장준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계>에서 신인논문상(가작)을 수상하신 것을 계기로 해서 저는 문필활동을 시작하셨다고 보입니다. 생전에 장준하 선생과 개인적인 친분이나 교류도 상당히 있으셨죠?"

"그렇습니다. 우선 젊었을 때부터 <사상계>를 충실히 읽은 독자였고, <민주선전> 기자를 하면서 장준하 선생을 많이 좋아해서 산행할 때도 여러 번 같이 갔었습니다. 또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가 폐간된 후에 함석헌 선생이 하셨던 <씨알의 소리>의 편집위원이었습니다. 편집위원 회의할 때 제가 기록을 위해서 여러 차례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는 어떻게 살았나, 평전에서 이름 밝힐 것"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 정권 때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셨는데요, 이번 평전에서는 이런 의문사 대목이나 내용도 당연히 포함이 되겠죠?

"그 부분에 대해서 장준하 선생이 참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국민, 지금 40~50, 60대 되는 국민이라면 장준하 선생한테 빚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깨어있는 지식인이라고 하면 말입니다. 그런 분이 의문사를 당했고, 2002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규명 불능' 판정을 내렸습니다.

선생이 의문사를 당한 그 다음 날 저는 사고현장에 가봤고, 또 그 다음 날에도 가봤습니다. 한 달 후에 저희 60명 정도가 돈을 조금씩 걷어서 현지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총 7번 정도 사고 현장에 가봤는데, 거기 바위가 15m, 경사가 75도 정도 되고 더욱이 8월 17일이면 장마철인데 바위가 미끄러워 거기서 내려온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또 거기서 추락했다고 하면 상처라던가 하다못해 옷에 이끼들이 끼어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 커피를 좋아하셔서 커피통을 가지고 갔는데 그건 멀쩡하고. 저희가 산에 올라가서 돌을 던져 보니까 박살이 나더라구요.

그런데 (장 선생은)외상이 하나도 없었고, 왼쪽 귀밑에만 예리한 망치 같은 걸로 맞은 것 같은 상처밖에 없었거든요. 그 때 당시 유일한 목격자로 김모씨가 있었습니다. 평전에서는 이름도 밝히겠지만, 그는 자기 삼촌이 6.25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대학을 나와서도 취직을 못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장준하 선생 선거 때 조금 도와줬다가 그 후에는 전혀 안 나타나더니만 (그날) 산행 때 우연히 (장 선생과) 같이 산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돌아가신 장 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사고 후 그는 충청남도 당진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취업했습니다."

"단언하기 어렵지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장 선생이 현지에서 실족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타살되어 약사봉 계곡으로 옮겨졌다는 추론이 가능하겠네요?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유족들과 후학들이 선생의 목숨과 같은 <사상계>를 다시 인터넷판으로 내서 한동안 활동을 하다가 최근에는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대중들의 호응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사상계>와 같은 정론 시사교양지가 필요한 거 아닙니까?"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낼 때가 1953년입니다. 53년이면 6.25 전쟁을 한참 하던 때거든요.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인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제작비가 없어서 부인이 자신의 혼수품을 팔아서 제작비를 댈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라던가 인권이라던가 국제정세라던가 이런 것들은 <사상계>에서 영향 받은 바가 참 큽니다. 저는 감히 4.19혁명, 6.3사태, 70~80년대 민주화 운동 이런 것은 <사상계>가 뿌린 그런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이런 싹이 성장한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상계> 같은 지성지, 국민의 지성과 양식을 대변하는 잡지를 냈는데 지금 시대에 온갖 매체들이 많고, 더러는 국민을 현혹하고 곡필을 일삼는 언론이 주류언론이 되고 있는,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데 글을 쓰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역사를 위해서, 또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서, 우리 후대를 위해서도 장준하 선생이 하셨던 <사상계> 같은 잡지는 국민모금을 모아서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장준하 선생이 지하에서라도 눈을 감고 영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봉암·리영희 선생, 김대중 전 대통령... 평전 써보고 싶다"

 정운현 언론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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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안중근 의사 평전을 이야기하면서 안 의사가 부친 안태훈 선생과 함께 동학군을 토벌한 것이 일생이 흠이라면 흠이었다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장준하 선생에 대해서도 그런 흠이랄까요, 또는 의혹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대표적으로 육당 최남선이 사망했을 때 <사상계>에서 특집을 한 것을 두고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 점은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그 부분이 장준하 선생의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과오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역사에 대한 평가나 역사인식이 상당히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방금 말씀하셨듯이 육당 최남선이 사망했을 때 <사상계>에 육당 추모특집을 냈고, 장 선생은 권두언에 극찬에 가까운 추도사 성격의 글 써서는 육당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으로 비판했더라구요.

또 한 가지는 '동인 문학상'을 제정한 일입니다. 장준하 선생 같은 분이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문인 중에서 김동인 문학상을 제정했을까. 물론 동인 문학상을 받은 5~60년대의 작가들은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분들이고, 좋은 작품도 많죠. 그러나 그런 때 장준하 선생이 제대로 역사관이 있었다면 만해 문학상, 신채호 문학상을 만든다든가 박은식 역사상을 만든다든가 그런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못 했던 부분이 장준하 선생 역사관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참 안타깝고 아쉽고 그렇습니다."

"뚜렷한 배경이나 그런 것을 아직 찾지는 못하셨나보죠?"

"그래서 장 선생이 어째서 그렇게 했는가 생각해봤을 때…. 장 선생이 일본 유학시절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가 학병권유 차 일본 도쿄로 왔었어요. 장 선생이 직접 그걸 들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동기생들이나 많은 사람을 통해서 (그런 내용을 전해 들었겠죠). 그때 당시 (육당·춘원 두 사람에 대해) 학생들의 비판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랬는데 (장 선생은)왜 그런 것을 못 느꼈을까. 그리고 해방 후 5~60년대 때 <사상계> 필진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 친일 곡필, 왜곡을 했던 문인·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때 당시는 그 사람들 빼고는 필자가 없으니까(그랬다고도 보입니다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동인 문학상 같은 것은 그때 당시 문학 담당을 맡았던 편집위원들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문(祭文)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제사 때나 읽는 글 아닙니까. 그런데 관장님께서는 몇 년 전에 <경향신문>에 멀쩡히 살아계시는 리영희 선생을 두고 '생(生)제문'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분들 가운데서 평전으로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 분이 혹시 없습니까?"

"우선 리영희 선생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몇 년 전에 평전이 나왔는데요, 저는 제가 보는 시각으로 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한번 쓰고 싶습니다. 또 기회가 되면 김대중 전 대통령도요. 보는 시각에 따라서 호오(好惡)가 너무 엇갈리고 그렇습니다만, 적어도 한국 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만 한 역할을 한 경우도 적지 않거든요. 또 왜곡된 부분도 많고, 너무 과잉 칭찬된 부분도 더러 있습니다. 남북문제라던가, 노벨평화상 수상, 민주화 운동, 또 사선(死線)을 다섯 번이나 넘었는데, 그런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전을 써보고 싶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 선생의 서거 50주년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7년 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하다가 발톱이 다 빠질 정도로 일제와 싸웠고, 그리고 정부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을 하면서 농지개혁에 앞장섰던 조봉암 선생을 이승만 정권이 오로지 정적을 이유로 해서 사형시키지 않았습니까? 최근 명예회복이 됐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죽산 조봉암' 하면 좌파·좌익·공산주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봉암 선생의 평전, 그리고 언론인 송건호 선생의 평전도 써보고 싶습니다. 제가 욕심이 좀 많나요?"

"우리나라는 단군이 건국했다, '건국절' 만들면 생일이 2개"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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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많으시네요. 이제 후반부입니다. 3~4개 질문이 남았습니다. 최근 여권에서 8.15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고 입법운동을 추진하자 관장님께서 <오마이뉴스>에 이를 비판하는 글을 쓰셨고, 또 반응도 아주 좋았습니다. 심지어 포털에서도 비중있게 배치된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 글을 읽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서 왜 '건국절'이 되어서는 안 되는지,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소개해주시죠."

"제가 몇 가지로 정리한 바가 있는데요, '건국'이라고 그러면 우리나라나 역사가 긴 나라들은 건국에 얽힌 신화가 베일에 싸여 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프랑스 같은 데도 그렇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의 건국이라고 하면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 게 건국입니다.

고려 때 몽골군에게 침략을 당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제왕운기'라던가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도 우리나라 건국을 단군으로부터 맥을 이었거든요. 그리고 조선시대 때도 건국은 단군이 건국이고, 그래서 우리가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고 하고 이것이 건국절이거든요.

8.15를 건국절로 한다고 하면 생일이 두 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야만국가도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오로지 특정 정치인·정파가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면서 막상 자기네들은 권력을 장악했다고 해서 8.15를 건국절이라고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무지이기도 합니다.

또 만약 북한이 9월 9일을 건국일이라고 한다고 하면 남한 건국일, 북한 건국일, 나라가 완전히 두 개가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심지어 독도문제만 보더라도,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로 지방 현(縣)에 귀속시켰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 건국이 1948년에 이뤄졌기 때문에 일본이 건국 이전의 일인데 왜 시비를 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앞뒤도 가리지 못하고 역사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나서서 '건국절' 운운하는 것은 무식의 극치입니다."

"최근에 보니까 건국절 법안을 발의했던 한나라당 모 의원이 그것을 취소하면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과성명을 올렸다고 <한겨레>에 보도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앞의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겁니다만, 최근 이명박 정부 들어서 이른바 '좌편향 교과서'에 대한 개정 작업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뉴라이트 진영에서 마치 일본 극우파의 역사관을 흉내 낸 듯한 이런 역사관을 피력하고 있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이런 것들도 좀 지적해야 되겠죠?"

"제가 어디 신문에도 잠깐 썼습니다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조선왕조 시대의 반정(反正) 거사가 아니거든요. 정부 수뇌부라던가 기관의 장들을 바꾸는 것은 뭐 그런대로 이해한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역사를 자기네들 입맛에 따라서 바꾸겠다고 하는 것, 더욱이 교과서라는 것은 상식이 집약된 것들로, 이미 그 시대의 국민 정서나 지식과 양식이 압축시킨 것을 교과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상당한 국민의 공감 위에서, 또 (교과서를)만드는 위원회가 있잖아요? 거기를 거쳐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교과서를 지난 정권 때 바꿨다는 이유로 (바꾸겠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더욱이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만든 일본의 후소샤판(版) 교과서를 지탄하고 비판하면서 우리가 그걸 그대로 따라가는 모양새라니. 어째서 이렇게 일본 쪽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는지 저는 참 이해가 안 갑니다."

"잡지 한 권도 맥 못 잇는다면 우리의 실존적 가치는 어디에"

"참고로 오늘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니까 역사교사 네 분의 좌담 내용을 기사화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현행 교과서는 김영삼 정부 때 만들어진 책이랍니다. 엄밀히 말하면 노무현 정부나 김대중 정부가 아닌, 현 한나라당과 맥을 같이 하는 YS정부 때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이것을 '좌편향'으로 몰아붙인다면 말이 안 되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금년 봄에 독립기념관장을 끝으로 제가 보기에는 일선에서는 물러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 외 집필이나 강의, 각종 위원회 활동 같은 것은 물론 지속적으로 하시겠죠. 향후 인생 계획, 뭐라도 좋습니다. 그 계획을 듣는 것으로써 오늘 대담을 마치고자 합니다."

"기회가 되면 <사상계> 같은 정론지를 하나 내서 우리 왜곡된 언론계에 대한 바른 글쓰기에 대한 정론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많은 올곧은 지식인들이 보수, 극우세력들 언론에는 글쓰기를 기피하고 있고, 또 그런 쪽에서도 그런 분들의 글을 실어주지도 않습니다. 대단히 훌륭한 양식 있는 분들에게 지면을 제공하고, 또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민족의 정론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상계>가 꼭 그랬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5천년 역사의 맥을 잇고, 횡으로는 세계만방의 지식을 받아들여서 민족문화를 꽃피우겠다는 게 <사상계>의 정신이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우리도 그런 잡지를 하나 해서 우리나라의 지식인의 사랑방 같은 역할 같은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적어도 21세기 초반에 우리민족이 지향해야 할 담론, 또 세계를 향한 우리의 어떤 의견들, 이런 것들을 담아내고 싶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말리더라구요."

"왜요?"

"지금 이런 판에 (<사상계> 같은) 잡지가 되겠느냐고요. 그래서 1953년 전쟁 중에도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냈고, 함석헌 선생은 유신체제 하에서도 <씨알의 소리>를 냈는데 왜 그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은데 그런 잡지 한 권도 맥을 못 잇겠다고 하면 우리의 실존적인 가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만, 조금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네. 부디 그런 뜻을 이루시기 바라구요, 오늘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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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