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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무개(28)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ㅎ백화점의 전자제품 판매사원으로 일한다. 파견직인 그는 언제나 부담을 안고 출근한다. 회사에서 파견직에게만 출근부를 작성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근부 앞에는 직영직원(정규직)들이 사인 여부를 감시한다. 그들은 정해 놓은 시간에서 1분만 지나도 가차없이 출근부를 덮어버리고 지각으로 처리한다. 이 때문에 출근부를 덮는 시간이 다가오면 백화점 앞은 100m 달리기 결승이 열리는 육상트랙을 방불케 한다.

 

간신히 지각을 면해도 부담은 사라지지 않는다. 직영직원의 감시 눈초리가 자신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직영직원들은 장부를 들고 다니면서 파견직 판매사원들의 근무 태도를 수시로 점검한다.

 

동료 직원과 잡담을 하거나, 명찰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감점된다. 어딘가에 기대고 있거나 앉아 있는 것도 감점 대상이다. 이는 후에 수당과 인사에 반영한다. ㅎ백화점 관계자는 "직원들의 근무 태만이 도를 넘어서서 어쩔 수 없이 행하고 있는 제도이다"라고 말했다.

 

앉을 수 없다, 기대도 안 된다

 

그러나 이런 백화점의 행태는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앉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277조에는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노동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때에는 노동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비치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또한 지난 달 28일 노동부는 '서서 일하는 근로자 건강보호 방안'을 마련해 시행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ㄹ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성 판매사원인 김아무개(25)씨는 "의자가 비치된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다, 법이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일터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의자를 치우는 데 앞장서는 곳도 있다. ㅇ백화점 판매사원인 최아무개(32)씨는 "매장 안에서 이뤄지는 전산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려 앉아서 작업했다, 하지만 작년부터 백화점 차원에서 의자를 치워 버렸다, 앉고 싶어도 앉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백화점 파견직 근로자들의 권리는 백화점 정문 앞에서 멈춘다. 노동부 발표는 현장에서는 공염불일 뿐이다. 사실 노동부가 법을 제정할 때부터 실효성 문제가 지적되었다. 사업주에게 강제할 수 있는 법이 있음에도 노동부는 홍보와 이행 권고 외에 적극적인 계도를 하고 있지 않다.  

 

법이 시행되어도 백화점 파견직이 앉을 수 없는 까닭

 

법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백화점 파견직들이 앉을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백화점 파견직들에게는 판매장부 외에 법은 없다.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판매장부 뿐이다.

 

박씨의 일과를 한 번 들여다보자. 최근 들어 백화점들은 앞다투어 폐장 시간을 연장했다. 판매사원들의 근무시간도 그만큼 늘어났다. 박씨의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8시 반까지, 주 6일을 근무해 주 66시간을 일한다.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근무시간은 더욱 늘어난다. 하지만 박씨는 초과수당을 받아본 적이 없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주 40시간 이상 근무할 경우에는 초과수당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주5일근무제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직영 직원들은 주5일을 근무하고 초과수당 역시 지급 받는다.

 

직영직원의 감시 체계와 과도한 근무 시간은 박씨의 불만을 키워간다. 커져가는 불만에도 박씨가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것은 고용이 불안정한 파견직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1년 또는 6개월 단위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박씨뿐 아니라 백화점 판매직 사원들 대부분은 간접 고용 형태로 일하고 있다. 일하는 곳과 돈 받는 곳이 다른 것이다. 파견업체에 고용되어서 사업장에 파견되면, 파견된 사업장의 사용주에게 사용되는 형태이다.

 

다른 판매사원들과 한 목소리를 내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판매금액을 개인별로 누적해 수당과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는 서로를 치열한 경쟁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에 판매가 부진한 파견직 판매사원들이 대폭 물갈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잘리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오래 근무하는 수밖에 없다"고 박씨는 말한다.

 

정규직 타는 엘리베이터에 파견직은 타지 못한다

 

기업들은 노동자를 싼 값에 사용하면서도 책임을 면하기 위해 용역·도급·파견 등의 간접 고용을 늘려왔다. 2007년 7월 비정규직보호법이 통과되면서 직접고용 형태인 비정규직들도 간접고용 형태로 급속히 넘어가고 있다. 간접고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이랜드·코스콤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통해 알려져 있다.

 

한 백화점 파견직 판매사원은 "정규직이 타는 엘리베이터에는 파견직 사원들은 탈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촉발된 것은 백인만 앉을 수 있는 버스 좌석에 흑인이 앉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는 그만큼 심각하다. 파견직 판매사원만 넘쳐나는 백화점이 비정규직 문제의 또 다른 뇌관이 될지 우려스럽다.

 

어느 용감한 파견직 판매사원이 정규직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 순간, 그 문제는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시사IN 고재열 기자의 블로그 <독설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비정규직, #파견직, #간접고용, #노동,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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