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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운 사람 만나기

 

ㅂ이라는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사장으로 있다가 나와서 ㄱ이라는 출판사를 새로 차린 ㅈ님한테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옵니다.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나고 싶다는 사람을 손사래칠 수는 없어서,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는 날에 맞추어 만나기로 합니다.

 

ㅈ님은 그냥 밥이나 함께 먹자고, 밥먹는 일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하다면서 다른 뜻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밥을 함께 먹기는 먹지만, 길에서 먹는 밥이 하루가 다르게 제 몸에는 맞지 않고 있어서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집에서처럼 누런쌀에다 온갖 콩과 곡식을 고루 넣어서 오래오래 씹는 밥이 아닌, 허옇고 안 씹히는 밥은 속에서 부글부글합니다. 집에서처럼 간을 거의 안 하거나 아예 안 하며 웬만하면 날푸성귀 그대로 먹는 밥이 아닌, 소금과 고추가루와 설탕을 범벅으로 하여 지은 반찬은 혀끝에는 달콤할는지 모르나 반드시 배앓이를 하게 합니다.

 

 아는 사람이 서로 얼굴도 보고 밥도 먹는 일이란, 즐겁게 사귀는 일이니 나쁠 일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저를 괴롭힌 적이 있는 분이 ‘아무 뜻이 없이 얼굴을 보고 밥을 먹자’고 하는 말만 하면서 만나자고 하는 일은 자리가 몹시 거북합니다. 되도록 미움을 드러내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제가 하느님이 못 되는 탓에 참 어렵습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닮아서 너그러이 헤아리자고 다짐하지만, 이러한 다짐을 지키기란 뼈를 깎듯 고달픕니다.

 

 맛없는 밥을 먹으면서, 종교에 몸을 담는 일이란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님을 새삼 느낍니다. 나한테 잘못한 이를 너그러이 보아주는 일 또한 조금 마음을 열어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다고 거듭 느낍니다. 하나하나 떠오르는 예전 일을 홀가분하게 털어내지 못한 좁아터진 제 마음은, 밥먹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이 시간에 굶고 다녀도 좋으니 헌책방을 한 군데라도 더 가서 오래도록 살펴보지 못하고 있는 묻힌 책을 뒤적이고 찾고 돌아보고 마음에 담고플 뿐입니다.

 

미운 짓을 한 사람을 코앞에 두고서 마음을 다스리거나 닦으며 제 모자람을 깨닫는 일도 저한테 도움이 되기는 될 테지요. 그러나 조용히 책바다에 들어가 제 뒷통수를 끝없이 때리고 긁고 어루만지는 수많은 옛사람 넋과 얼을 곱씹는 일이 저로서는 훨씬 더 어울리고 걸맞고 즐겁습니다.

 

 

 (2) 우리가 읽은 책은 참말 ‘우리 이야기’였을까

 

 거북한 밥자리를 일찌감치 접은 다음, 밥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헌책방 <정은서점>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가는 길에 단골 술집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곳에 들러서, 무거운 가방을 잠깐 맡겨 놓습니다. 사진기만 멘 가벼운 몸으로 헌책방으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더부룩한 아랫배를 한손으로 쓰다듬습니다.

 

 책방 앞에 섭니다. 책방 앞에 아무도 없지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문을 당기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책방 아저씨한테 인사를 합니다. 뵐 때마다 흰머리가 더 하얗게 세어 간다는 느낌인 <정은서점> 아저씨가 인사를 받습니다.

 

 몇 마디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고 안으로 들어가 이 책 저 책 가만히 만지고 꽂고 읽고 펼치고 닫고 합니다.

 

<카지무라 히데키/김인덕 옮김-재일조선인운동(1945∼1965)>(현음사,1994)이라는 책이 아주 깨끗한 판으로 보입니다. 우리 말로 옮겨진 이분 다른 책을 하나 읽었고, 이 책도 예전에 만나서 읽었습니다. ‘카지무라 히데키’를 아는 분은 알지만, 모르는 이는 아예 모르는 터라, 이만한 학자가 이만하게 엮어낸 책은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둘레에 널리 알리고 읽혀야 한다는 마음으로, 헌책방에서 눈에 뜨일 때면 한 권쯤 덤으로 장만해서 선물하곤 합니다. 바르고 곧은 마음으로 역사를 파는 뜻있는 일본 어른 가운데 한 분이 카지무라 히데키 님입니다.

 

.. 일반적으로 말하여 대부분의 일본인은 체제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패전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를 모르게 된 정신적 공백 상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재일조선인은 곧바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었던 점이 다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24쪽)

 

 만화책 <타가미 요코-새댁 요코짱의 한국살이>(작은씨앗,2004)가 눈에 뜨입니다. 새책방에서도 보고 헌책방에서도 보던 책이며, 헌책방에도 꽤 자주 들어옵니다. 판권을 보니 무척 많이 팔렸습니다. 이제까지 이 책을 사서 보아야지,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만, 또 한 번 눈에 뜨여서 끄집어 내어 펼쳐 봅니다.

 

.. 내 만화에는 아줌마들이 자주 등장한다. 왜냐하면, 내가 한국에 와서 가장 컬처쇼크를 받은 것이 바로 한국의 아주머니였기 때문이다. 한국에 오고 나서 자주 파워 넘치는 아주머니들에게 놀랐다. 일본 아주머니도 비슷하긴 한데, 강력함에 있어서는 한국 아주머니를 따라오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어디에서건 사람을 밀어젖히고 돌진해 가는 모습에 화가 나서, 그렇게 바쁘게, 서둘러 살아서 무엇하시냐고 여쭤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  (11쪽)

 

 오늘은 사서 읽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우리가 못 보는 우리 모습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이영철-깔깔학교>(글벗집, 1980)라는 묵은 어린이책이 보입니다. 오! <깔깔학교>라니! 내 국민학생 때 수도 없이 많이 보던 책이 아니던가! 거의 외우다시피 보던 책이고, 높은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어도 가까이에 놓고 읽던 책인데!

 

"우리 애들이 다른 책은 안 봐도 이 책은 많이 보더라고." 나중에 책값을 셈할 때 <정은서점> 아저씨가 이 책을 손에 들고 살며시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합니다. 미처 여쭙지 못했지만, <정은> 아저씨는, 괜찮아 보이는 어린이책이 들어왔을 때 집으로 가져가서 아이들한테 읽으라고 건네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는 <정은> 아저씨네 아이들이 ‘아버지가 일하는’ 헌책방에 놀러와서 이 책 저 책 구경해 보았을지 모릅니다.

 

[1] 가방 없이

 :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아침 학교에 갈 시간에야 발을 동동 구르면서, 끝동 : “아이구, 내 책가방이 어디로 가고 없어. 학교 시간이 늦어 가는데 큰일 났네. 아이고머니, 아이고머니!” 씨동 : “아이도 매련하기도 하다. 학교에 갔다가 와서 천천히 찾으면 좋을 것 아니냐?”

 

[2] 간호부

 : 새로 들어온 간호부, 잠이 잘 들은 병자를 흔들어 깨우면서, “여보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이 잠 오는 약 잡술 시간이 되었어요.”

 

오늘날 더듬어 보면 뭐 그다지 웃기지도 않고 억지스럽기도 할 가벼운 우스개 이야기를 담은 <깔깔학교>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마저도 우리가 지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 일본사람이 지어서 일본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쓴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곰곰이 되돌아보면, 우리가 ‘우리 이야기’인 줄 알고 보았으나, 나중에 보면 ‘일본 이야기’였던 이야기책이며 만화책이 얼마나 많았나요.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던 만화영화도 그렇고요. 우리 또래는, 또 우리 위 또래는 죄다 ‘한국땅에서 태어나 한국 얼과 넋을 먹으며 자란 사람’이라기보다, ‘허울은 한국땅이지만 사회와 문화와 경제 모두 일본과 미국한테 식민지처럼 눌린 곳에서 일본과 미국 얼과 넋을 먹으며 자란 사람’이 아니겠느냐 싶곤 합니다.

 

<셴끼에비츠 외/최건영 엮음,‘만남’ 옮김-폴란드문학의 세계>(소나무,1988)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소설쟁이 세 사람을 비롯해 모두 서른한 사람 작품을 실었습니다. 폴란드 문학을 다룬 책이 또 있던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제가 읽지 못하더라도, 뒷날 우리 집 아이가 궁금해할 수 있을 테니, 장만해야겠구나 싶습니다.

 

 

 (3) 삶이란, 책이란, 책에 담기는 삶이란

 

<남난희-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1990)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책이름만 보아서는 무슨 책인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문출판사’라는 펴낸 곳 이름을 보고 집어듭니다. 예전에 이곳 ‘수문출판사’에서 펴낸 ‘자전거 이야기’ 책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쏠쏠히 나오고 있는 ‘자전거 이야기’입니다만, 숫자는 얼마 안 됩니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 ‘수문출판사’에서는 자전거 이야기를 다룬 책을 펴낸 적이 있어서, <하얀 능선에 서면>도 무언가 남다르게 맛볼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산중에서 사람을 만나면 내가 먼저 말을 걸고 길도 물어 보고 했다. 그냥 지나치면 그들이 (간첩으로) 의심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자 혼자서 무거운 짐을 메고 산중을 다니는 것이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지, 딴 세상 사람 구경 하듯 했다. 532봉까지는 길이 잘 나 있었다 ..  (32쪽)

 

<하얀 능선에 서면>은 백두대간을 겨울날 두 다리로 걸어서 가로지른 어느 아가씨 이야기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어떤 큰 뜻을 품고 하지는 않았고, 스스로 자기 삶을 곰곰이 돌아보려는 마음에서 했다는 남난희님. 이 책을 써낼 때만 하여도 서른 즈음이었던 나이. 그 뒤로 스무 해 가까이 흘렀고, 책을 죽 읽어 나가는 동안, 남난희라고 하는 분이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해집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남난희’ 이름 석 자를 인터넷 찾기창에 넣고 똑똑똑 해 봅니다.

 

 2001년치 기사부터 죽 뜹니다. 남난희 님은 마흔이 거의 다 된 나이에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 된 사람은 집을 떠나 스님이 되었고, 이분은 혼자서 지리산 기슭 청학동에서도 살고 강원도로 옮겨 자연학교를 열면서도 지냈는데, 이제는 다시 지리산 기슭으로 돌아가 된장을 빚으면서 살림을 꾸린다고 나옵니다. ‘인간극장’ 같은 풀그림에도 나왔다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안 보니 그런 일이 있은 줄이야 몰랐습니다. 이분은 스스로 먹고사는 길을 마련하고자 된장을 빚고, 아이는 아이대로 자연 품에 안겨서 씩씩하게 잘 크는구나 싶습니다. <하얀 능선에 서면>을 쓸 때에만 산타기를 하지 않았고, 그 뒤로도 산하고 등을 지지 못한 채, 히말라야 높은 산도 당차게 올랐다고 하는군요.

 

.. 정말 자연은 고개가 숙여질 만큼 장엄하다. 760 고지에 올랐을 때는 지난해쯤 불이 났었는지 어린 소나무들이 시커멓게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인간은 많은 일도 저지른다. 저질러진 일은 모두 인간 몫이다. “자연을 보호합시다” 하고 소리쳤더니 저쪽에서 “자연을 보호합시다……” 메아리가 되어 합창했다. ‘그래, 난 혼자가 아니야. 산이 있잖아? 메아리도 있고 나무도 있고 산짐승도 있잖은가? 난 절대 외롭지 않아. 오히려 든든하지 뭐, 산이 나를 보호하니까.’ ..  (57쪽)

 

책값을 셈하는 자리에서 <정은서점> 아저씨가 한 마디 붙입니다. “이 사람 남난희 씨 대단한 사람이지. 나도 한번 읽어 봤는데 아주 대단해, 여자가.”

 

인터넷에 올라온 이런저런 글과 자료를 돌아보니, <하얀 능선에 서면>을 읽고 싶은데 판이 끊어져서 볼 수가 없다는 글이 제법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웬만한 헌책방마다 한두 권쯤 있었다고 떠올립니다. 그동안 이 책을 곧잘 만났는데, 저는 이 책이 나온 곳에서 펴낸 자전거책을 사서 읽기까지 이 책을 한 번이라도 집어서 구경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무슨 인연이 닿아서 ‘이제까지 참 흔하게 보아 오던 책인데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던 책에 눈이 꽂혀서’ 집어들었을 뿐입니다.

 

 책 인연이란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책 인연 하나가 틔워 주는 눈길과 눈높이 또한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책 인연은 언제 이루어질지, 언제 맺을지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기다린다고 만날 수 없고, 눈을 밝혀 찾는다고 찾아질 수 없습니다. 알쏭달쏭하면서도 가슴 설레게 됩니다. 이래서 헌책방 나들이를 꾸준히 잇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 주능을 버려 봐야 별 좋은 수도 없었다. 약간 편리한 길로 돌아가는 것이고, 역시 걷는 거다. 그래 봐야 그것도 태백산맥의 일부이긴 하겠지만,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든데, 좀더 힘들기는 하지만, 주능을 갖는 것이 좋았다. 떳떳한 산을 갖기를 원했으니까 ..  (78쪽)

 

 국립공원을 지키는 일을 하는 어느 시민모임에서 일하는 분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시집을 가서 농사짓고 사는데, 그분도 남난희 님을 알까 슬며시 궁금합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서너 살쯤 자라면 옆지기와 함께 지리산으로 그분을 만나러 나들이를 갈까 하는데, 그때에도 남난희 님은 지리산 기슭에서 된장을 빚으면서 아이를 키우실지 궁금합니다. 늘 산과 함께 살며 산기운을 듬뿍 머금은 그분 목소리는 어떠하고 두 손은 얼마나 두툼할지 궁금합니다. 발도 한 번 만져 보고 싶습니다.

 

.. 그리고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는 변을 본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그 일도 큰일 중의 하나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아침의 그 일은 추운 날은 엉덩이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을 견디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  (85쪽)

 

<패러데이/주성윤 옮김-양초의 과학>(동천사,1989)이라는 책을 봅니다. 이름은 익히 들었던 과학자 ‘패러데이’지만, 학교 다니면서 이분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가물가물. 뭐 하는 분이었을지, 무슨 발자국을 남겼는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워낙 익히 들었던 이름이라서, 이분이 쓴 책 하나 더듬어 보고픈 마음이 들고, 이 책 또한 우리 집 아이가 클 때 슬그머니 건네어 보고픈 생각도 듭니다. 뭐, 아이가 이 책을 보자면 열 살은 넘어야 할 테니까 2018년쯤에나 건네줄 수 있을 테지만.

 

그러니까 적어도 2018년까지 어버이 된 몸으로서 이 책을 고이 간수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때까지 아이도 튼튼하게 잘 자라야 한다는 소리이며, 우리 집도 그동안 사서 읽고 갈무리한 책이 흩어지지 않도록 잘 여미어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갈 길이 멉니다.

 

.. 뭔가 하나의 결과를 봤을 때, 특히 그것이 지금까지와 다른 것이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이 원인일까?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질 것을 항상 잊지 말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여, 여러분은 오랜 동안에 진리를 발견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  (37쪽)

 

 (4) 웃음을 자아내는 아이

 

책값을 모두 셈합니다. 지갑을 열어 돈을 내어 드립니다. 책방을 나오기 앞서 <정은서점> 아저씨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눕니다. 이야기는 다른 헌책방 소식보다 아기 이야기에 맞춰 집니다. 예순을 훌쩍 넘기셨을 <정은> 아저씨는 아기 이야기가 나오니 아기처럼 웃으면서 기뻐해 줍니다. 문득, 우리가 살아가는 기쁨과 재미는 우리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새 목숨을 남기는 아이가 곁에 있을 때에 느끼게 되는가 하고 헤아려 보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도, 아이 키우는 데에는 돈보다 더 크고 눈길을 두어야 할 대목이 있더라구요. 돈은 좀 모자라도 넉넉히 살 수 있지만, 옆지기와 아이, 그리고 저 셋이 서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 않다면,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조금도 넉넉할 수 없는 살림살이더군요.

 

 “집에 가서 손자를 보면 ……(웃음).” 그렇구나. <정은> 아저씨가 아니라 <정은> 할아버지라고 해야겠군요. 아저씨를 처음 보고, 아저씨네 헌책방을 처음 찾아온 때가 1994년이라, 그때는 까만머리에 그냥 ‘아저씨’였으나, 그 뒤로 열네 해라는 세월이 흐르며, 아저씨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지난날 풋풋한 젊은이였던 저는 ‘애 아버지’, 또는 ‘아저씨’로 바뀌었습니다.

 

 여태까지 헌책방 <정은서점>에서 사들여서 읽은 책만 해도 천 권은 넘어갈 테고, 사지 않고 골마루에 서서 읽은 책만 해도 만 권은 넘으리라 생각합니다. 대충 훑은 책은 더 많을 테지요.

 

 새삼스럽게 책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이며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고 곱씹습니다. 이제까지 읽은 그 많은 책들, 이제까지 장만한 그 많은 책들은 제 가슴에 어떻게 새겨지고 남고 또아리를 트는가 곱씹습니다.

 

 

 책방에 들어오기 앞서 부대낀 그 반갑지 않은 분을 떠올립니다. 아무리 반갑지 않더라도, 앞으로 또 얼굴을 스칠 날이 얼마나 더 있다고 나 스스로 마음 거북해 하고 있었는가 뉘우칩니다. 비록 그분이 나이값을 못하면서 제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다고 하더라도, 받은 쪽에서 가벼이 털어내야지, 자꾸 쌓아 놓고 있으면 서로서로 좋을 일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저한테, 제 마음에 도움될 구석이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두런두런 말이 길어지는 가운데, 셈대 옆에 쌓인 만화책더미에서 <게이시 히토미(글),유이치로 수에다(그림)/문미영 옮김-우리 동네 편의점>(닉스미디어,1999) 1권과 2권이 보입니다. 예전에 1권 하나만 헌책방에서 우연하게 만난 녀석이라서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책. 판이 끊어져서 더는 구경하지 못하던 책. 이 만화책도 집어들어 책값을 셈합니다.

 

 가방을 맡겨 놓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랴부랴 인사를 하고 책방을 나옵니다. 책을 낑낑대고 들고 단골 술집으로 돌아갑니다. 시원한 보리술 몇 잔 몸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사람들 복닥이는 전철간에서 시달리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책 한 권 펼칠 수 없을 만큼 좁아터진 ‘인천으로 가는 전철’입니다. 책방에서 책을 볼 때가 가장 좋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집에 닿아 가방을 내려놓으니 힘이 다 빠져서, 책도 닦지 못하고 몸과 발을 씻고 그대로 뻗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연세대 앞 〈정은서점〉 / 02) 323-3085
 http://jbst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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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헌책방, #정은서점, #연세대, #책읽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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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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