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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에 넘쳐흐르는 미국 대선 보도

미국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아서.
 미국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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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독자들께서 알고 계시듯 미국에서는 곧 대통령 선거가 실시됩니다. 저는 한국 언론에 미국 대선 관련 보도가 얼마나 많은지 보고 놀랐습니다. 미국 사람들 중에 한국 대통령 이름을 아는 사람은 10%도 되지 않고 한국 대통령 선거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무니까요.

아마도 대한민국 현대사는 미국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깊이 얽혀있기 때문에 이렇게들 미국 대선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그렇지만 한미관계는 언제나 평등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어떤 마음을 먹는가에 따라 한국과 한국 국민들은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 대통령의 의사결정 내용이 미국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한국인들이 미국 대선에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을 깨달았기에 저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연구가 제 전공인 것도 아니고 저도 나름대로 할 일이 많은 지라 오랜 시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특정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관련된 눈에 띄는 정책이나 사건이 하나도 없었던 경우에는, 그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다음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각 대통령의 한국에 대한 시각과 태도를 정리했습니다. (레이건 이후부터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에 이르는 비교적 최근의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거의 알고 계시므로 생략하겠습니다.)

가쓰라-태프트 조약 묵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 공화)

1882년 아서 대통령 재임 당시, 미 해군 장교인 로버트 슈펠트는 조선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조선을 미개한 후진국으로 간주했고 조선을 '개방'시킨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이로써 두 나라 간에 공식적인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공화)

한국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가졌던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누구냐면 꼭 집어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루스벨트(한국에선 '루스벨트'라고 쓰지만, 미국인들은 '로저벨트'라고 부릅니다)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루스벨트는 처음부터 조선에 대해 심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1904년 7월 29일에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는 당시 미 전쟁부 장관이었고 후에 루스벨트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역시 공화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만나 미·일 양국간의 문제를 논의합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와 필리핀 지배를 묵인하고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도록 묵인한다는 내용의 비밀 각서에 합의합니다. 루스벨트는 태프트의 보고를 받고 같은 해 7월 31일에 보낸 전보를 보내 "당신과 가쓰라와의 대화 내용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가쓰라에게 내가 당신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한다고 전하시오"라고 응답하여 밀약을 지지했습니다.

루스벨트는 조선이 야만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좀 더 선진화된 일본에게서 배우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태프트(좌) 전 미국 전쟁부 장관과 가쓰라(우) 전 일본 총리대신.
 태프트(좌) 전 미국 전쟁부 장관과 가쓰라(우) 전 일본 총리대신.
ⓒ 데니스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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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lson; 민주)

1918년 1월 8일 윌슨 대통령은 유명한 '민족자결주의'내용이 포함된 '14개 조항(Fourteen Points)'을 발표합니다. 하와이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인단체 '대한인국민회'는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낼 준비를 하는 한편 윌슨에게 전후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윌슨은 이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고 대표단에게 여행증을 발급해주지 않았으며 대한인국민회는 뉴욕타임스의 지면을 빌어 재차 청원서를 내야 했습니다.(그러나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윌슨은 스스로 14개조항에서 명시했던 민족 자결의 원칙을 한국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3·1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했을 때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서는 일본 등 주요 강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운명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윌슨의 뒤를 이은 하딩, 쿨리지, 후버 세 대통령도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민주)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한국에 직접 개입한 첫 번째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는 한국 국민의 고통이나 필요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고 언제나 그렇듯 미국의 이익에 관련이 되었기 때문에 개입했습니다.

루스벨트는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 3개국 정상회의에 참가한 직후 "우리 세 강대국은 한국 국민의 식민지 지배하의 고통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 적절한 시기가 오면 한국은 해방된 독립국가가 될 것으로 결의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한국 국민의 뜻을 물어보지도 않고 한국의 분단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루스벨트의 주된 관심사는 유럽의 미래를 놓고 스탈린과 협상할 내용과, 일본의 러시아 침략을 막는데 있었을 뿐 일본의 한국 지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독재자' 이승만 공식적으로 지지한 아이젠하워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민주)

트루먼에 이르러 한미 관계는 깊이 얽히는 한편 암울해지기 시작합니다. 1945년 7월, 조지 마셜 당시 육군 참모총장은 포츠담에 가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을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합동 참모본부에 지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마 그 편지가 트루먼으로서는 한국에 대해 생각해본 첫 번째 계기였을지도 모릅니다. 태평양 전역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이미 일본을 점령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포츠담 선언 직전에는 맥아더의 임무에 한국점령도 포함되었습니다.

트루먼 재임기간 동안 한국은 분단되어 외국군에 점령되었고 결국 3백만명에 이르는 한국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한국전쟁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공화)

미국 제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
 미국 제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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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는 당선된 직후 한국전쟁을 종료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아이젠하워의 선거운동은 트루먼 정권의 여러 정책들, 특히 '한국, 공산주의, 그리고 부패'에 관련된 정책들을 뒤엎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직접 한국에 가서 전쟁을 끝내고, 나토를 강화하여 공산주의에 대항하며, 검소하고 부패하지 않은 정부를 이끌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에서의 (물론 한국사람들을 대상으로)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했습니다.

결국 한국에 핵폭탄을 투하하지 않기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이는 도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이유, 즉 한국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면 소련이 개입할 것이고 소련 역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트루먼과의 차별을 강조했지만 아이젠하워 역시 역대 정권들의 군사적 이해관계와 정책을 이어받았고 냉전과 반공주의의 맥락에서 똑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 뿐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한국은 부패하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하에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었고 대부분 한국인들은 빈곤 속에 허덕였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않았지만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은 이승만이라고 판단하여 공식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케네디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민주)

다른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케네디는 한국보다는 일본을 신뢰하고 존중했고,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나 한국의 분단과 한국전쟁에서 일어난 살륙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부정하고 한국인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케네디는 처음부터 한국을 우습게 보았고,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에는 아예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한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하도록 내버려 둘 것을 신중히 고려했습니다.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대통령 선거와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1963년에 실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하여 케네디의 호감을 얻으려 애썼습니다.(박정희는 적어도 약속의 반은 지킨 셈입니다.)

이도 모자라서 박정희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까지 약속합니다. 이는 미국이 베트남전 개입 명분을 만들기 위해 날조한 사건인 1964년의 통킹만 사건보다 약 3년이나 앞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이 한국에 압력을 넣기도 전에 자진하여 바친 선물을 케네디가 거절할 리가 없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미국 대통령들이지만 미국에 고분고분한 타국의 반민주적 독재자들을 적극 지지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는 민주당 출신이든 공화당 출신이든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케네디가 그렇다고 해서 한국을 존중하게 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1962년에 펄 벅을 만난 케네디는 아시아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는 펄 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남한이 뒤처지고 있어 케네디는 할 수 없이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했습니다.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 민주)

한국의 베트남 파병으로 한미관계는 더욱 긴밀해집니다. 존슨 대통령은 남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공산주의에 제동을 걸려했습니다. 존슨은 1966년 방한하여 박정희와 함께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항구한 평화를 유지하여 그 안에서 만인이 자유와 정의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결의한다"고 밝혔습니다.

존슨이 바보였던 것도 아니고 박정희가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둔 독재자란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존슨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박정희를 지지했고 반공의 동맹으로 치켜세웠습니다.

한미 동맹과 '민주주의 수호'라는 이름아래 한국의 젊은이 5천명이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참전 군인들이 (2만명 추정)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공화)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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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정부와 존슨 정부는 거의 비슷했습니다. 미 제국은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는 한 한국 국민이 독재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든 말든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8월 한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하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치하하고 베트남전에 파병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닉슨은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대외 정책을 재평가한 닉슨 독트린의 일부로 한국에서 1개 사단을 철수했는데 이는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실패를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제럴드 포드 (Gerald Ford; 공화)

포드 대통령은 한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그 두 번째 방문은 갈 수록 가혹한 독재자의 모습을 드러냈던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포드도 이전의 여러 대통령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의회 압력에 굴복해 미군 철수 포기한 카터 

지미 카터 (Jimmy Carter; 민주)

베트남전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군비지출은 계속 늘어만 갔기에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방향전환이 필요해졌고 카터 대통령은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국방예산에서 60억 달러를 삭감했습니다.

카터가 집권한 후 처음 한 일 중 하나가 남한에서 모든 핵무기를 제거하라고 지시한 것과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카터는 미 공군 인사들과 병참업무 인력 1만 4천명을 제외한 미군병력 일체를 1982년까지 철수할 예정이었으나, 1978년까지 미군 3600명을 감축한 후 의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철수계획을 포기했습니다.

카터의 예는 제국은 정치적 경제적인 광범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대통령 개인의 성향이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통령이 어떤 공약을 내세우든지 간에 제국을 통제하는 집단의 이해관계는 거대하고 심오하여 이를 넘어서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gan; 공화) 이후는 독자 대부분이 많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여기까지 지루한 기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당선되는 것과 맥케인이 당선되는 것이 한국사람들에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한미관계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답은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바마든 맥케인이든 주한미군도 변함없이 주둔하게 할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에게 미군 주둔이 도움이 된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아시아 대륙에 미국 군대를 상주시키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바마나 맥케인이 입으로는 뭐라고 하든지 간에, 미국 대통령과 국가 권력기관은 한국을 언제나, 예외 없이, 반드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고려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은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한국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1882년부터 2008년 현재까지 이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바마나 맥케인이나 이러한 제국의 정치적 사고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바마나 맥케인이 어느날 갑자기 "이런! 이제 보니 미국의 대외정책과 이해관계는 일본보다 한국과 훨씬 더 긴밀하게 얽혀있구나! 그러니 일본과 한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얼른 한국 편을 들어야겠다"라고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혹시 생각하신다면 물론 착각입니다.

한국이 제국에 맞설 힘은 한국인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와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가 2008년 9월 11일 뉴욕 '그라운드제로'에 헌화한 뒤 함께 걷고 있다.
▲ 매케인과 오바마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와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가 2008년 9월 11일 뉴욕 '그라운드제로'에 헌화한 뒤 함께 걷고 있다.
ⓒ 연합뉴스-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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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하여,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미국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의지와 요구를 한국 정부가 고분고분하게 따르도록 압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합니다. 미국은 북한이 적으로 남아있기를, 그리고 '대신 매맞는 아이'의 역할을 계속하기를 바랍니다. 북한이 적으로 남아주어야 미군 주둔도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들이 제국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제국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은 한국인들 스스로에게서 나옵니다.

"미국이 사회주의 체제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민주적인 사회주의 체제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미국은 순종적이지 않은 타국의 지도자는 무조건 "독재자"라고 불렀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어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나 베네주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독재자라고 일단 딱지를 붙이고 나면 그 나라를 미국이 침공하거나 일방적인 경제 제재를 가하거나 여러 가지로 압력을 행사할 구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이 전복시키고 싶어하는 체제가 그 나라 국민의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독재체제라고 몰아붙이는 데도 한계가 있고 국제사회에서도 미국의 입장이 아주 어려워집니다.

한국이 더욱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고 북한동포들과 공조한다면 제국에 맞서는 힘은 몇 배나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한과 북한이 적대적이면 적대적일수록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바마와 맥케인이 완전히 똑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차별되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차별되는 점들이 기존의 제국의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올만한 차이인가요? 오바마나 맥케인이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할까요? 아니면 미 제국을 해체하려고 노력할까요? 아니면 전세계에 포진하고 있는 미군을 모두 철군할까요?

아닙니다. 두 사람 다 그런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 카터의 약간의 군축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듯, 설혹 그런 시도를 한다 해도 절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 편지는 미국 대선에 관련된 첫 번째 글입니다. 다음번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미국시민이지만 오래 전부터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지 않고 있고 학생들에게도 투표를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 번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한홍구, 대한민국사 2. 한겨레 신문사. 2003.

Archives of the Office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Japan, V38, Part 1. (Copy in the Washington University Far East Library)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 1943, Department of State Publication 7187, p. 448. Washington, 1961.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The Conference at Malta and Yalta, 1945, Dept. of State Publication 6199, pp. 770, 984. Washington, 1955

Eisenhower Toasts Rhee, http://www.presidency.ucsb.edu/ws/index.php?pid=9957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 1943, Dept., of State Publication 7187 , p. 448. Washington, 1961.

Sang-Dawn Lee, Big brother, little brother.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828834,00.html



태그:#미국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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