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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한 번만 도와주세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딩동, 휴대폰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린다. 내가 과외를 해준 학생의 문자였다. 고등학교 2학년 사촌동생의 동갑내기 친구였던 인연으로 그와 나는 만났다. 그 아이에게서 온 문자 내용인 즉, 자신의 오빠를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고등학교 2·3학년을 연년생으로 둔 그 집의 중심축은 당연히 수험생인 고3 오빠다. 휴가는 고사하고 공부에 방해될까 이사도 미룬 채 가족 모두가 오빠에게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던 터였다. 2009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2개월 정도 앞둔 요즘, 이 집의 고민거리는 2학기 수시모집 응시를 하려는 아들의 '자기소개서'이다.

2009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앞으로 D-65일

한 대학의 2009년 수시 2학기 특기자전형 자기소개서 일부. 기사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한 대학의 2009년 수시 2학기 특기자전형 자기소개서 일부. 기사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손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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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개 대학의 올해 수시 2학기 모집 인원은 20만 6223명으로 전체 모집 인원(37만 8625명)의 54.4%를 차지한다. 역대 최대 규모다. 수시전형에서 합격한 학생은 정시·추가모집에 복수 응시할 수 없어 신중한 선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학부모의 마음은 '일단 지원하고 보자'로 기울 수밖에 없다.

수도권의 많은 대학들이 9월 8일부터 본격적으로 원서를 접수받기 시작했다.  평균 5만원의 원서지원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경쟁률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수시모집 기간과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 겹쳐 수험생 입장에서는 어느 한쪽도 소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에게 자기소개서 검토를 부탁한 학생의 집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식구 전체가 자기소개서 나눠쓰기에 매달렸다고 한다. 대다수 학교의 자기소개서 양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항목별로 나눠 가족들이 작성한 다음 그걸 엮어 학교에 제출한다고 한다.

이 가족의 경우 지원동기 등 포괄적인 것과 취미 등을 물어보는 1번·2번 항목은 아버지가, 봉사활동이나 경력 등에 대해 쓰게 되어있는 3번·4번 항목은 동생이 맡았다. 정작 지원자 본인은 곧 있을 중간고사 준비로 정신이 없단다.

학생의 어머니는 '미리 부탁드렸던 학원 원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늦게나마 나에게 연락을 하신 것이다. 접수마감을 3일 남기고 단 한번도 만나지 않은 아이의 소개서를 검토한다는 게 도통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간절한 어머니의 부탁에 뿌리치긴 쉽지 않았다.

지원자 확인 서약, 눈 딱 감고 한번만 클릭?

한 대학의 2009년 2학기 수시모집 지원서 첫장을 보면 간단한 '지원자 확인서약' 항목이 있다. 총 5개 항목 중 3개 항목에서 '제 3자의 대리작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허위사실 기재나 대리작성 여부가 학교 측에서 확인될 경우, 불합격될 것임을 알고 양심적 서약을 하는 절차이다.

문제는 허위기재나 대리작성 사실을 학교 측에서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해당 학교측에 전화문의를 해봐도 황당한 답변만 돌아왔다.

"솔직히 학교 측에서는 진실을 알 방법이 없지 않나요?"
"본인의 양심에 맡기는 거죠. 지금 접수원서를 받느라 바빠서, 정확한 검증 절차를 설명해 줄 책임자는 자리에 안 계세요. 아니 그런데… 지금 허위사실을 기재하거나 대리작성을 하겠다고 전화하신 거예요? "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11월17일 오전 서울 여의도고등학교에서 감독관이 시험지를 배포하고 있다.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11월17일 오전 서울 여의도고등학교에서 감독관이 시험지를 배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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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모집을 하는 학생 중 자신의 글실력만 믿고 중간고사도 팽겨친 채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략 6~7개의 문항으로 이뤄진 자기소개서를, 한 학교당 10만~20만원씩 받고 대리작성 해주는 학원을 실제로 많이 봤다. 미루어 짐작컨데, 상위권 학생을 둔 강남 학부모는 더 많은 돈을 내고 있을 것이다.

이메일로 도착한 아버지와 동생이 쓴 소개서는 정말 솔직했다. 취미활동과 학교내·외 활동 경험을 적으라는 항목에 고스란히 아들의 '경험'만 써 웃음짓게 만들었다. 나는 어설픈 조언을 통해 경험이나 느낀 점만 나열하지 말고 장점을 녹여쓰라고 했다.

국제중·특목고 준비에 초등학생부터 책 한 권 읽을 틈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자기소개서를 남에게 맡겨야 승산이 있는 시대 속에서 고쳐야 될 건 학생들의 비양심이 아닌, 비양심을 조장하는 교육환경이다.


태그:#수시2학기모집, #자기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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