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불타는 월미도(좌),1950. 9. 15(Wolmido Island, 15 September 1950).상륙 직후의 월미도(우), 1950. 9. 15(Afternoon, 9/15/50, Marines mop up Wolmi)/(출처:진실화해위원회)
 불타는 월미도(좌),1950. 9. 15(Wolmido Island, 15 September 1950).상륙 직후의 월미도(우), 1950. 9. 15(Afternoon, 9/15/50, Marines mop up Wolmi)/(출처:진실화해위원회)

인천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을 기해 대대적인 기념행사와 강연회, 퍼레이드 등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인천시와 해병대 사령부는 20년 넘게 매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기념식을 가져왔다. 하지만 올해는 건국 6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첫 상륙지점인 월미도 해안에서 대규모로 개최할 예정이다.

인천시와 해병대는 상륙작전 재현을 위해 해군의 대형수송함인 독도함과 상륙함(LST) 향로봉함 등 함정 2척, 한국형 상륙장갑차(KAAV) 26대, 상륙용 공기부양정(LSF) 2대, 헬기 10대와 해병대 285명을 비롯한 육군·해군 등 모두 375명의 병력을 동원할 예정이다.

9일은 인천상륙작전이 미국 의회에서 승인된 날이다. 해병대원들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30분간 월미도 앞 바다에서 상륙장갑차를 타고 연막을 헤치며 해안에서 150m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해상퍼레이드를 벌일 예정이다. 또, 헬기 8대를 동원하는 돌격 훈련도 예정되어 있다. 또한 인천시 부평구도 18일 한국전쟁 중 9·15 인천상륙작전에 의한 부평지역 전투, 작전명령 '19-50'의 성공을 기념하는 퍼레이드를 개최할 예정이다.

'인천상륙작전 기념식' vs '월미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탁월한 군인으로 평가 받아 왔다.하지만 6.25 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한국전 확전 등을 계획해 일부는 전쟁광이라고 평가를 하기도 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맥아더.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탁월한 군인으로 평가 받아 왔다.하지만 6.25 전쟁 당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한국전 확전 등을 계획해 일부는 전쟁광이라고 평가를 하기도 한다.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단행된 상륙작전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또 6·25 전쟁의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뒤 바꾼 군사작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화려한 평가를 거부하며 월미도 고향마을로 돌아가기를 목놓아 외쳐온 이들이 있다.

바로 58년 전 월미도에서 살다가 미군의 무차별적인 네이팜탄 등의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고향에서 쫓겨난 인천 월미도 원주민이다.

지난 2월 26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는 피해자 등이 제기해온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희생사건'이란 주장이 처음으로 정부기관 조사를 통해 공식 확인한 것이다.

오는 9일 월미도 실향민들은 58년 만에 정부가 처음으로 진실을 규명했다는 것을 알리는 고유제와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를 올릴 예정이다.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58년 전 오늘,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사전 포석으로 0.66㎢ 규모의 섬 월미도를 사전 대책이나 경고도 없이 풀 한포기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폭격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폭격으로 인해 월미도에 거주하고 있는 민간인 100여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미군은 수십 차례에 걸쳐 월미도 서쪽에 설치된 북한군의 대공포 등을 제거하기 위해 월미도에 네이팜탄 95발 등을 투하했다. 문제는 미군이 월미도 설치된 군사 시설 등과 정 반대 위치한 동쪽 민간인 시설 등에도 똑같이 네이팜탄을 투하했으며, 기총 사격을 통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한 것이다.

당시 미군은 1945년 일본으로 철수하기 전 인천항에서 근무했던 미군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또, 항공정찰을 통한 전문가들을 통해 수백명의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무차별 집중공격(saturation)'을 한 것이다. '삐라' 등을 통한 사전 경고 없이 무차별 집중공격은 그렇게 계속됐고, 이로 인해 당시 거주했던 월미도 주민들은 그렇게 아무 이유도 모르고 죽어 갔다.

가해자 미국은 인정하고 피해자 대한민국은 외면하는 '진실'

폭격 직전의 인천과 월미도 항공사진(1950. 8. 16)/(출처:진실화해위원회)
 폭격 직전의 인천과 월미도 항공사진(1950. 8. 16)/(출처:진실화해위원회)

미국의 유력 언론사인 <뉴욕 타임스>는 지난 달 3일 "미국이 수많은 한국 시민을 죽였다고 말한다(South Korea Says U.S. Killed Hundreds of Civilians)"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기사를 통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이 월미도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자세히 소개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으며, 취재시 만났던 월미도 원주민에게 사과를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월미도 미군폭격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등은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조치'로 제시한 여러 조치사항들은 그 주체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그 실효적 실천방안도 매우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폭격 당사자인 미군에 대한 책임자 규명 및 보상 조치를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서 협상할 것을 권고하는 수준에 머무른 것은 역사적 진실의 규명에 앞장서야 하는 진실화해위원회와 정부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진실규명 재결정과 미국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58년 동안 고향에서 쫓겨났음에도 국방부는 70년 이후 미군으로부터 인계받으면서 원래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국방부 소유로 무단점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국방부로부터 인천시민의 세금 800여억 원을 주고 이 땅을 사들여 공원 등으로 조성한 인천시의 무책임한 행정을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유족과 월미도 원주민들의 보상 및 귀향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귀향대책위원회에서 수년 동안 실무 책임을 맡아온 인천민간인학살 진상규명위원회 이희환 위원은 "인천시·해병대 등은 9일부터 인천상륙작전 기념 행사를 대규모로 벌이는 반면, 월미도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들은 한 쪽에서 위령제를 올린다"면서, "정부와 우리가 너무 냉전적 사고로 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인덕 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진실화해위가 미흡하지만 진실규명을 하여 영령들에게 정부가 처음으로 진실을 규명했다는 것을 알리는 고유제를 올릴 수 있어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위원장은 "58년이 지난 지금에도 폭격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의 한이 풀리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인천 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대대적 행사를 하는 것은 이곳 월미도에서 스러져간 영령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위원회 식구들이 모두 70대 고령들로 죽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태그:#인천상륙작전, #미군 민간인 학살, #월미도, #맥아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