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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돌고 돌아 숭의전 가는 길

 백학면 자치센터에서의 점심식사
 백학면 자치센터에서의 점심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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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 성을 보고난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백학면으로 간다.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자치센터 같은 곳인데 뷔페식으로 밥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다. 각자 먹을 만큼 밥과 반찬을 그릇에 담아 상에 앉아 먹는 방식이다. 오늘 점심은 우리 식구들만을 위해 마련되었다. 반찬이 열 가지 쯤은 된다. 김치는 기본이고 호박전, 장아찌, 오이무침, 고사리, 잡채, 빈대떡, 청포묵 등이 보이고 국은 미역국이다.

뿌듯한 오전 답사에 이어 따뜻한 국과 밥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들,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또 산과 들의 뙤약볕을 벗어나 시원한 실내로 들어오니 한여름의 더위가 싹 가신다. 지금까지 답사를 다니며 먹은 그 어느 음식보다도 맛이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끼고 있는 청정 연천의 채소로 만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답사의 또 다른 재미인 먹는 즐거움에 빠져 든다.

 숭의전 정전
 숭의전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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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우리는 연천의 또 다른 명소인 숭의전으로 향한다.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은 고려시대 4대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1971년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숭의전으로 가면서 최병수 해설사는 정발 장군묘와 영원부원군묘에 대해 설명한다.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전사한 분이다. 그리고 영원부원군 윤호는 성종의 장인으로 그의 딸이 정현왕후이다. 영원부원군 신도비는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차 안에서 그냥 보고 지나간다.
 
차는 백학면과 미산면의 골짜기를 몇 굽이 돌아 숭의전 주차장에 들어선다. 이곳이 관광지로 개발이 되려는지 주위에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길가에는 이 지역 농산물들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홍살문을 지나 숭의전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간다. 이 길은 숭의전 뒤를 돌아 전각 앞으로 이어진다. 숭의전 앞은 임진강의 낭떠러지이다. 임진강의 단애는 여기까지도 계속된다.

고려왕의 위패도 모시고 제사도 지내고

 앙암재
 앙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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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재실인 앙암재(仰巖齋)로 들어간다. 앙암재라는 이름은 앙암사(仰巖寺)에서 나왔다. 앙암사는 원래 고려 태조인 왕건의 원찰이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개경에 있던 종묘가 사라지고, 1397년 일부 고려왕의 위패가 이곳 앙암사에 모셔지게 되었다. 1451년(문종 1)에는 앙암사를 숭의전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곳에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네 왕과 충신 16명을 배향하였다.

이처럼 앙암사가 숭의전으로 바뀌게 되는 과정에서 재실에 앙암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앙암재에는 현재 태조 왕건 동상 사진과 어필 복사본이 있다. 태조 왕건 사진은 2006년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했던 그 동상을 찍은 것이다. 우리는 앙암재 마루에 앉아 최병수 해설사로부터 숭의전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전사청
 전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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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의하면 숭의전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한 왕조의 그늘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그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평가나 대우의 문제가 아니고 홍보의 문제인 것 같다. 사실 나도 숭의전이라는 이름을 이번 답사까지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앙암재에서 동쪽으로 난 문을 올라 다음 공간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전사청이 보인다. 전사청(典祀廳)은 평시에는 제기와 제물 등을 보관하고 제례시에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전사청 문이 닫혀 있어 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면 숭의전이 있는 본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숭의전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가 지나간 문은 서문이 된다.

 숭의전 안의 위패와 초상화
 숭의전 안의 위패와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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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은 고려왕의 위패를 모신 본전이다. 네 분을 모셨다고 하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문 앞에 있는 위패만을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위패 옆에 초상화가 함께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 1972년에 복원되면서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것이 가지는 역사성이나 문화재적인 가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형식을 갖춰 경건한 마음이 든다.

숭의전 옆으로는 이안청(移安廳)이 있고 그 옆으로 서향의 배신청(陪臣廳)이 있다. 이안청은 숭의전의 위패와 영정을 임시로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배신청은 숭의전에 있는 왕을 모신 대표적인 신하들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배신청은 숭의전을 향해 도열해 있는 모습이다.

태조 왕건의 4태사는 어떤 사람인가?

 배신청 내부의 위패
 배신청 내부의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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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청 안을 들여다보니 태조 왕건을 모신 대표적인 신하 네 명의 이름이 보인다. 그들이 4태사(四太師)로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이다. 위패에 보니 복지겸은 개국무공공(開國武恭公)이고 홍유는 충렬공(忠烈公)이다. 신숭겸은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이고 유금필은 개국충절공(開國忠節公)이다.

『고려사 절요』제1권 「태조 신성대왕」 '무인 원년(918)' 조에 보면 개국에 가장 공이 큰 신하는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다. 그래서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즉위한 6월 그는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려 이들의 공을 치하한다.
 
"개국을 도와 기이한 계략을 운용하고 세상을 뒤덮는 높은 공을 세운 신하에게 모토(茅土)를 나누어 주고 높은 관작으로 포상하는 것은 여러 대에 걸친 떳떳한 법이요, 영원토록 전해오는 큰 규범이다. 짐은 미천한 출신으로 재주와 식견이 용렬하나, 진실로 뭇 사람의 신망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니, 포학한 임금을 폐하던 때에 나에게 충신의 절개를 다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포상을 시행하여 훈공을 권장해야 할 것이다.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을 제1등으로 […] 포상을 하니, 공들은 짐의 뜻을 밝게 알지어다."

 배신청 외부
 배신청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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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 배신청에는 배현경 대신 유금필이 들어가 있다. 그것은 유금필이 941년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왕건을 보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려사 절요』제1권 「태조 신성대왕」'신축 24년(941)' 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금필은 평주(平州) 사람으로 장수의 지략이 있어 태조를 섬겼다. 매양 나가서 정벌할 적에는 왕의 명을 받으면 즉시 출발하고 집에서 지체하지 않았으며, 매양 개선(凱旋)할 적마다 왕이 반드시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평생토록 은총으로 대우하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누구도 이에 따르지 못하였다. 충절(忠節)이라 시호하고 후에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그리고 신숭겸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장군이다. 천성적으로 무용과 기지를 갖고 있었으나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포위당하자 왕을 피신시키고 자신이 왕으로 위장하고 싸우다 죽음을 당했다. 홍유와 복지겸 역시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고 이후 고려국에 충성을 바친 장군들이다.

숭의전을 나오면서

 남문에서 바라 본 숭의전
 남문에서 바라 본 숭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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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에 있는 이들 전각들을 보고 나는 남문[天授門]으로 해서 숭의전 밖으로 다시 나온다. 바로 앞으로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그것은 숭의전이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 쪽을 내려다보니 나무들 사이로 임진강이 보인다. 그러나 오전에 살펴본 호로고루성에서 만큼 임진강 전망이 좋지는 않다.

숭의전을 떠나면서 우리 회원들 중 일부가 좌판에서 꿀도 사고 호박도 사고 산나물도 샀다. 여행지에 가면 그곳의 농산물이 이상하게 좋아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뭔가를 사게 되는 것 같다. 그나마 차가 있으니 이들 물건을 사는 게 별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숭의전 안내도
 숭의전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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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 주변에는 현재 교육시설과 숙박시설이 지어지고 있다. 이곳을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연천군에 있는 국가사적지 6개 중에 역사적인 의미로 따진다면 숭의전이 첫째가 될 것이다.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신 일종의 종묘이기 때문이다. 숭의전은 500년 고려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왕들의 혼이 쉬고 있는 장소이니 역사교육 관광지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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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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