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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식이 벌어졌던 곳이다. 심양고궁에 있다.
▲ 대정전. 항복식이 벌어졌던 곳이다. 심양고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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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를 입은 조대수가 들어오고 뒤이어 변발에 전립을 쓴 홍승주가 들어왔다. 삼배구고례를 행한 조대수와 홍승주가 자리에 앉았다. 애증이 교차했지만 두 사람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총독과 장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하관계였고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항복이 그들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차를 한잔씩 돌린 홍타이지가 홍승주에게 물었다.

"몇 살이냐?"
"마흔 다섯입니다."

"너는 글을 읽은 사람으로 아는데 금나라 고사를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홍승주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한 문인이다.

"조선에서는 포로를 돈으로 사가는 것을 가족의 정으로 생각하는데 중원에서는 왜 포로를 사가지 않느냐?"
"조정 군신들의 여론이 포로 속환은 할 수 없다고 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짐승도 새끼를 챙기는데 가족을 찾지 않은 인간을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 모두가 재물을 중시하고 사람을 경시해서 그런 것이다. 조정의 의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너 또한 같은 무리가 아니냐?"

"신하는 조정의 중론을 따를 뿐입니다."

전승 축하연이 열렸던 곳이다. 심양고궁에 있다.
▲ 봉황루. 전승 축하연이 열렸던 곳이다. 심양고궁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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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예식은 간단하게 끝났다. 뒤이어 잔치가 벌어졌다. 전승축하연이다. 각각 떨어져 앉아있는 조대수와 홍승주에게도 한상 그득히 차려졌다. 조대수는 배고픈 강아지처럼 고기를 뜯고 있는데 홍승주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현과 봉림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홍타이지가 소현을 불렀다.

"김상헌은 죽어도 남을 죄가 있으나 병이 중하다는 말을 들었다. 함께 온 사람들도 고초를 겪고 있다 하니 불쌍하다. 김상헌은 나이가 많지만 글을 잘하니 재능과 지혜가 있을 것이다. 그를 금주로 보내 공을 세우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니면 의주로 보내 구금시킬까?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좋겠는가?"

금방이라도 사형에 처할듯하던 청나라로서는 급격한 태도 변화다. 의주로 보내주는 것은 무조건 환영한다. 금주는? 명나라 땅이었던 금주로 보내 한족을 다스리는데 쓰고 싶다? 김상헌의 성격으로 보아 아니 될 말이다.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 김상헌에겐 천만의 말씀이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거절할 수도 없다.

"여러 사람이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황제의 은덕입니다. 그 처결은 오직 황제에게 달렸으니 어찌 감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홍타이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으나 사면을 전제한 제안이니 일단 받아두어야 한다. 소현을 제자리로 돌려보낸 홍타이지가 범문정을 불렀다.

홍승주를 중용해서 쓰고 싶다

"홍승주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자결을 방지하라."
"명심하겠습니다."

홍타이지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미 중원을 손에 넣은 듯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륙을 석권하면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금나라로부터 시작되는 뿌리를 알고 싶었다. 이러한 홍타이지에게 금나라 고사(古史)를 알고 있다는 홍승주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중용해서 쓸 터이니 조심해서 다루라는 것이다.

하지만 홍승주를 보는 범문정의 시각은 달랐다. 홍승주는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일 뿐, 청나라 조정에서 역할을 담당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은 비록 한족이지만 명나라 조정에서 녹을 먹지 않았고 홍승주는 주씨 황가에 충성을 바치다 항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점하고 있는 청나라 조정에서의 문신 일인자의 지위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견제심리도 작용했다.

이제 홍승주로부터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빼내어 공격의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정복자 홍타이지에게 중원을 헌상하여 공을 세워야 한다. 그 공을 자신이 꼭 세워 아직도 거두지 않은 한족(漢族) 불신의 안개를 걷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서 자신의 미래가 있다.

범문정과 홍승주가 감옥 밀실에서 대좌했다. 이제부터 홍승주와 한 판 씨름이 시작된 것이다. 홍승주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명나라의 2인자로 병부상서를 지냈던 거물이다. 홍승주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지만 범문정은 건져야 할 것이 있다.

노회한 능구렁이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홍승주의 가문은 명문이었지만 증조부가 정쟁에 휘말려 몰락했다. 두부장사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렵게 공부했다. 학비도 마련하지 못하여 쩔쩔맸다. 그의 범상함을 알아본 스승 홍계윤은 학비를 면제해주고 제자로 삼았다. 이후 조정에 출사하여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걸물이다.

"불편한 것이 없으십니까?"
"불편을 편안으로 받아들이면 편안하답니다."
선문답 같지만 날이 선 답변이다.

"동쪽에서 뜬 해는 서쪽으로 저물고 달이 차면 기웁니다."
범문정이 홍승주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군자의 은혜는 바다처럼 깊고(君恩深似海)
신하의 절개는 산처럼 무겁다(臣節重如山)"

돌아온 것은 태산 같은 절의였다. 홍승주가 범문정을 노려보았다. 그 의 눈빛은 경원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찌 한족 출신으로 여진족에 붙어 한간(漢奸)이 되었느냐?'는 듯한 경멸의 눈초리였다.

범문정은 누르하치가 요동을 점령하기 전, 심양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한족이라면 모두가 존경하는 대문호 범중엄의 후손이다. '너의 할아버지를 내가 존경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소생 복림이 등극함으로서 실세를 장악한 여걸이다.
▲ 효장황후. 자신의 소생 복림이 등극함으로서 실세를 장악한 여걸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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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판은 범문정의 완패였다. 홍승주가 여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파악한 범문정이 홍승주에게 여자를 넣어 주었으나 홍승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홍승주와의 씨름에서 범문정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비는 범문정을 도와주고 싶었다.

훗날 효장황후가 되어 청나라의 북경시대를 열었던 장비는 몽골 왕족 공주출신이다. 대옥아가 홍타이지의 후궁이 되어 입궁했을 때 중궁전은 그녀의 고모 효단황후가 지키고 있었다. 한동안 홍타이지의 총애를 받았던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4살이다. 호격을 비롯한 정비소생 8형제가 있었지만 장비는 야심이 있었다. 자신의 소생 복림을 황제로 밀어 올리고 싶은 야심이다.

어쩌면 두 모자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도박이다. 하지만 도박에 성공하면 아들을 황제에 등극시킬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룰 수도 있다. 못 다한 사랑!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우직한 사나이 도르곤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의 형 홍타이지의 여자가 되었다. 운명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해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아프다. 어쩌다 도르곤과 눈길이 마주치면 사랑이 살아있음을 감지했다. 그럴 때면 가슴이 뛰었다.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이 전율했고 가슴은 방망이질 쳤다.

꿈을 이루려면 샤프한 머리가 필요하다

기회도 절묘했다. 홍타이지는 전쟁에 지친 심신을 혜란주에게 풀었다. 혜란주는 장비의 동생이다. 미워할 수 없는 동생. 그렇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는 동생. 혜란주가 지난해 죽었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사슴 태반으로 몸도 만들었다. 하지만 지아비 홍타이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동생 소옥아에 빠진 것이다.

미워하고 싶은 남자 홍타이지가 홍승주를 긴히 필요로 한다. 목마른 자에게 한 바가지의 물은 생명수와 같을 것이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있다. 점수를 따는 데는 이보다 더한 기회가 없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도 좋았다. 강빈이 화살 하나로 세 마리의 꿩을 잡고 있는 동안 장비도 화살 하나로 꿩 사냥에 나서고 싶은 유혹에 빠진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무(武)쪽에는 믿는 사람이 있다. 첫사랑 도르곤이다. 하지만 도르곤은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웠지만 머리가 무거웠다. 야심을 현실화시키려면 힘보다도 머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한 장비다. 그녀에게 샤프한 머리가 필요했다. 범문정의 지략이다. 그가 어려울 때 도와주고 내 사람을 만들어 두려는 것이었다.


태그:#소현세자, #효장황후, #홍타이지, #범문정, #홍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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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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