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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양명학의 큰별인 정제두의 묘지 앞에서 소론과 노론, 양명학과 주자학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이덕일 소장(맨 앞)
▲ 강화학파의 거두 정제두의 묘지 조선후기 양명학의 큰별인 정제두의 묘지 앞에서 소론과 노론, 양명학과 주자학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이덕일 소장(맨 앞)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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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첫 번째로 사형당한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이 죽음을 앞두고 영조에게 내뱉은 말이다.

역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최신작 제목이기도 한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시원함을 넘어서 서늘한 비장미를 풍긴다.

감히 죽음 앞에서 큰소리 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에 소개된 인물들은 서북 지역 차별에 맞서 혁명을 도모했던 홍경래, 인조반정을 쿠데타라고 꾸짖었던 유몽인, 주자와 달리 경전을 해석했다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 단종이 물러난 뒤 끝없이 방황하던 김시습처럼 죽음을 무릅쓰거나 주류에 저항하면서 소신을 지키던 사람들이다.

서로 다른 사상과의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요즘 주목받는 말 '소통'에 대해 떠올려 봤다. 왜 조선시대의 왕과 백성, 주자학과 양명학, 노론과 소론은 소통에 실패한 것일까? 그리고 2008년 자유민주공화국 아래서도 왜 대통령과 국민, 좌와 우는 소통에 무기력한 것일까?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등의 대중적인 역사서를 여러 권 펴낸 이덕일 소장은 소통을 상하의 소통, 다른 사상, 세계와의 소통, 서로 다른 정치세력간의 소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진정한 소통은 역사와의 소통임을 강조했다.

"조선시대의 상소와 구언(왕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상하의 소통이며, 주자학이 지배하던 시절에 양명학을 하던 학자들은 다른 사상과 소통한 것이고, 동인을 이끌던 유성용과 서인을 이끌던 이율곡은 당파를 떠나 소통의 정치를 하던 사람입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창한 정도전 같은 이는 역사와 소통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죠."

이덕일 소장은 가깝게는 조선후기의 양명학자들이야말로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주류 세력과의 소통에는 실패했지만 역사와의 소통에는 성공한 참지식인의 전형"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강화학파의 시조 정제두의 묘지 앞에서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에 나오는 강화학파의 시조 하곡 정제두 역시 당대를 지배하던 유일사상 주자학 대신에 양명학 노선을 따랐다. 이덕일 소장과 함께 강화도 하일리에 있는 정제두 묘지를 답사하면서 2백여 년 전의 목숨을 건 사상투쟁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의 지배층들이 양명학을 이단시한 이유는 무엇이죠?
"양명의 사민평등사상 때문이에요. 왕양명은 사농공상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죠."

- 중국의 양명학파와는 달리 정제두는 신분타파까지 주장하는 혁명적인 요소는 없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지 않고 주자학과 함께 쌍벽을 이뤘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죠. 그렇기 때문에 외주내양한 것이고요. 정제두도 살아생전에는 책 한권 내지 못하고 필사본만 있었죠."

- 정제두가 61세 되던 1709년에(숙종 35년) 강화도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제두는 정치를 의식적으로 멀리했죠. 섣불리 당쟁에 휘말렸다가는 자신의 사상 때문에 살아남기 힘들 거라 여겼을 겁니다."

- 양명학을 따랐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지 못하고 외주내양(겉으로는 주자학, 안으로는 양명학)했는데, 정제두가 외양내양한 데는 어떤 사연이 있나요?
"위독한 병에 걸려서 유언 식으로 커밍아웃을 한 건데, 죽지 않았던 겁니다. 그 뒤로 협박성 편지를 많이 받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사상논쟁을 벌여나갔죠. 정제두를 빼면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외주내양을 했지요."

- 강화학파는 어떻게 형성된 건가요?
"정제두가 정치와 담을 쌓고 강화로 옮겨 온 뒤에 이광명, 신대우 등 소론계 학자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이 판치는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죠.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의 가학으로 전승되면서 맥을 이어갔는데,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넘었어요.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상설, 박은식, 정인보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병인양요 때 조부인 이조판서 이시원의 자결을 목도한 이건창은 외세의 침략과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했다.
▲ 이건창의 강화 생가 명미당 병인양요 때 조부인 이조판서 이시원의 자결을 목도한 이건창은 외세의 침략과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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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박은식, 정인보로 이어진 지행합일의 강화학파

지행합일을 중시한 양명학자들은 이처럼 조선이 멸망한 후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경우가 많은데, 강화학파의 계보를 잇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해방직후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사태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어 장장 8천8백리 황하를 이룬다."

사상의 음지에서 역사의 양지로 되살아난 강화파의 감회가 풍기는 환영사가 아닌가 싶다.
강화에는 또 한 명의 강화학파를 만나기 위한 답사 코스가 있다. 바로 정제두의 제자인 이광사의 후손인 이건창의 생가다. 천연기념물 사기리 탱자나무 인근에 자리한 생가의 앞마당에 있는 우물도 마니산의 정기를 담아서 지하로 흐르고 흐르다 샘물로 솟구치고 있는 것이리라.

강화에서 출생한 영재 이건창(1852~1898)은 15세의 나이인 1866년(고종3)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병인양요 때 조부인 이조판서 이시원의 자결을 목도했던 이건창은 외세의 침략과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인 개화를 철저히 배격했다. 호랑이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한 이건창은 당대 최고의 리얼리스트 문인이기도 하다.

이건창은 강화도 민초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강화도에 서양군대가 몰려오자 장수들이 도망가는데 홀로 술을 마시고 군복까지 차려입고 나와서 길목을 막고 섰다가 죽임을 당한 이수칙에 대한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에는 이건창의 선조인 이광사가 등장한다. 영조 즉위 뒤에 소론 계열이었던 이광사의 부친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 갔다가 영조 3년에 죽고 만다. 역적집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던 이광사는 관직엔 오를 길이 없게 되자 정제두를 찾아 강화로 간다.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과거를 포기한 채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하던 이광사는 영조 31년 발생한 나주벽서사건에 연루가 되어 투옥되는데, 이 충격으로 부인 유씨가 마흔 둘의 나이로 세 아이를 남겨주고 자결한다. 이광사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유배를 가면서 ‘죽은 부인을 애도함’이란 시를 써서 부인의 영혼을 달랬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 번을 윤회한대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강화 북쪽의 연미정에 올라서면 남과 북의 강과 바다가 하나로 소통하며 흐르는 장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 연미정 앞에서 강화 북쪽의 연미정에 올라서면 남과 북의 강과 바다가 하나로 소통하며 흐르는 장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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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소장과의 강화학파 답사를 마치면서 귓가에 각인된 말 한마디는 '노론자들'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상과의 소통, 역사와의 소통을 거부한 채 오로지 가문과 당파의 이익만을 추구한 노론 집권세력은 '노론자들'인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사상을 용인하지 않았고, 철저한 숭명사대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안으로는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고, 백성들을 철저히 억압한 세력이 바로 조선 후기 집권층인 노론세력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이백여년 동안 권세를 누리다가 나라가 망하자 대거 친일파에 가담했어요.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돈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노론자들입니다."

체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들이라면 외침이 있었을 때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이들은 보수주의도 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보수주의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소론이 정권을 잡았으면 소론도 이렇게 타락하고 '소론자들'이 됐을까?

지식인 되기 참으로 어렵다

촛불정국을 지켜보면서, 최근의 오세철 교수와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으로 대변되는 공안정국의 서막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 중에 하나는 '권력자가 소통을 못하는 건가, 의도적으로 안하는 건가'이다. 집권당이 소통을 안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할 때 국민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덕일 소장에게 물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양명학자들의 후예가 있다면, 역사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이건창과 친교가 있던 매천 황헌은 '지식인 되기 참으로 어렵다'는 글을 남기고 자결을 합니다. 그런 결연한 선비정신, 실사구시의 학자정신이 있어야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도 좌우의 갈등을 뛰어넘고, 포용하는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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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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