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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를 가득 채운 스텐실(스텐실 그룹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텐실' 포토 로그).
 거리를 가득 채운 스텐실(스텐실 그룹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텐실' 포토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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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자, 낡은 골목 사이로 한 무리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일제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청년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는, 마치 춤이라도 추듯 유연하면서도 거침없는 동작으로 벽을 수놓기 시작한다. 이러한 민첩함과 신중함이 아니더라도 유난히 폭이 좁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골목길에서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작업'을 마친 그들은 이 도시 골목길의 은밀함과 어느새 더욱 짙어진 어둠을 방패삼아 유유히 모습을 감춘다.

다시 찾아든 정적 속에 밤은 지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이 찾아왔다.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뒤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간밤의 습격의 흔적들. 골목의 한쪽 벽에는 화려하고 정교한 그림들이 거짓말처럼 새겨져 있다.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정교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흔히 실크스크린이라고 부르는, 밑그림을 오려낸 판을 대고 스프레이를 뿌려서 그림을 새기는 기법 덕분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러한 기법과 이를 응용한 그림들을 통틀어 '스텐실'이라고 부른다.

실크 스크린과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태어난 스텐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는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기였다. 군사정부가 물러난 후 젊은이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희생시키고, 더불어 경제까지 제대로 망쳐놓은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스텐실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판에 무늬를 파내고 물감을 묻혀 무늬를 찍어내는 실크스크린이라는 기법 자체엔 정치적인 색깔이 없지만, 예리한 촉수를 지닌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만나면서 스텐실 작품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아르헨티나 스텐실은 오늘날에는 비판 영역을 확장하여 정부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전쟁·폭력·차별 등에 저항하는 다양한 메시지를 생산하고 있다.

촛불집회와 인터넷을 통해 보이는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발랄하고 경쾌한 저항과 비판의 모습들은 이곳 아르헨티나의 젊은 예술가들과도 많이 닮아 있다.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이 스텐실을 애용하는 이유는 단순한 그림과 몇 개의 단어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짧은 시간에 수십 개를 복사할 수 있는 스텐실의 특성 때문이다. 오려낸 도안과 스프레이 한 통이면 작업 준비는 끝, 30초 내외면 간단한 스텐실이 완성된다.  

직설적인 구호, 피켓과 플래카드를 통한 '말과 글'로 독재에 맞섰던 한국의 젊은이들과 달리 이곳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은 좀 더 은유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으면서도 특유의 촌철살인을 잃지 않고 있다.

 스텐실 작품 <난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여~>.
 스텐실 작품 <난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여~>.
ⓒ www.taring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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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것은 대통령조차 스텐실의 쓴 소리를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뿐만 아니라 현직 대통령도 비판 대상이 되기 일쑤이며, 그들을 향한 메시지는 길거리 벽을 통해 전 국민적인 소통을 시도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 유명한 에바 페론의 남편이자 아르헨티나의 좌파적 전통의 정점에 서있는 전 대통령, 후안 페론을 주인공으로 한 <난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여~>라는 스텐실 작품을 보자. 이 작품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제3의 노선을 간다는 페론의 정치철학을 풍자한다. 페론이 죽은 뒤에 누군가 그의 시체에서 양손을 잘라가는 사건이 있었는데, 손을 투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은 최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정부의 새로운 로고가 발표되자, 곧바로 그것을 이용한 스텐실로 응수하는 기민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스텐실 작품은 도시 이미지를 형상화한 주정부 로고를 감옥으로 바꿔버렸다.

정부 지원으로 열리던 게이 축제를 반대하는 등 문화적 보수성을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시장 마크리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기도 하고, 나날이 늘어가는 도시 범죄에 대한 비판 즉 밖에서 도둑이 활개를 치면 시민들은 꼼짝없이 '감옥살이' 신세가 되는 것 아니겠냐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거침없는 젊은이들에게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적 영웅, 체 게바라마저도 성역이 아니다. 체 게바라 이미지에 마릴린 먼로 얼굴을 교차시킨 이 작품은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무수히 반복·생산·소비되는 대중문화의 한 면을 꼬집었던 것처럼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상업화된 현실을 비꼬는 듯 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정부 로고(오른쪽)와 그것을 풍자한 스텐실. 스텐실 그룹 <캠 부에노스아이레스> 작품.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정부 로고(오른쪽)와 그것을 풍자한 스텐실. 스텐실 그룹 <캠 부에노스아이레스> 작품.
ⓒ cambsas.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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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텐실 작품 <체 게바라-마릴린 먼로>.
 스텐실 작품 <체 게바라-마릴린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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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저항의 무한 복제, 스텐실 발전에 기여한 부시

2003년에는 아르헨티나 스텐실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이 공개되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인 조지 부시의 얼굴에 미키마우스 귀를 덧붙인 <디즈니 전쟁(Disney War)>이라는 제목의 스텐실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를 비판한 이 작품은 유럽에서도 원본 도안을 주문할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 그나마 친미 성향이 강한 아르헨티나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부시는 <디즈니 전쟁> 이후에도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그 '인기'를 실감케 했다.

스텐실을 하기 위해서는 잘 오려낸 도안과 스프레이 한 통이면 충분하지만,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만한 용기와 스릴마저 즐길 줄 아는 여유 또한 필요하다.

정부에서는 늘어가는 낙서들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벽에 낙서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벽에다 스프레이를 뿌리다 경찰에게 붙잡히면 벌금(200~3000페소)을 내거나 사회봉사(20일)를 해야 한다.

그러나 스텐실 그룹에서 활동하는 'PB(스텐실 아티스트들은 대개 가명을 쓴다)'는 "스텐실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한다. 법으로 금지하고 있음에도 실제로 단속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경찰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하지는 않을까.

"난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예요. 가서, 뿌리고, 빨리 튀면 끝인 걸요."

 스텐실 작품 <디즈니 전쟁(Disney War)>.
 스텐실 작품 <디즈니 전쟁(Disney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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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텐실 작품 < STOP Bull Shit >(왼쪽), < Trying to take over the world >.
 스텐실 작품 < STOP Bull Shit >(왼쪽), < Trying to take over the world >.
ⓒ cambsas.blogspot.com(좌)/flickr.com(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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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르헨티나 정부도 도심의 거리에서 불순한(!) 메시지가 눈에 띄는 것이 좋을 리 없을 것이다. 페인트로 말끔하게 칠해 버리면 간단한 문제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러한 극단적인 해결책을 선택함으로써 국민들을 범죄자로 내몰지는 않는다.

작금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아르헨티나 사람 특유의 느릿한 국민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아르헨티나 정부와 경찰의 느슨한 대응은 정부 재정이 부족해 페인트칠을 할 여력이 없거나 단순히 귀찮아서 그냥 방치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진짜 이유야 어찌되었든, 늘어나는 그래피티(상자기사 참조)와 낙서 때문에 미국 LA가 몸살을 앓자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길거리 예술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는 법안에 서명하면서까지 연일 그 대응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대처법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한국에서 촛불 집회 때 전경버스와 아스팔트 바닥을 수놓았던 시민들의 낙서를 보면서 정부 관계자들과 경찰들도 미국의 주지사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벽과 그림, 그 오랜 인연

 손의 동굴(La cueva de las manos, 아르헨티나 남쪽).
 손의 동굴(La cueva de las manos, 아르헨티나 남쪽).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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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실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어서 그 기원을 거슬러 오르다보니 무려 9000년 전 아르헨티나의 동굴 속에 다다르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도화지는 다름 아닌 동굴 벽이었던 것이다.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동굴의 손그림 벽화는 사진으로만 봐도 인상적이다. 스텐실의 원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물감을 칠해 찍힌 손자국들은 지금 봐도 당시 원시인들의 손놀림이 뚜렷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화장실과 교실 벽에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휘갈기고 싶은 욕구를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낙서는 언제나 금기였고, 그러한 금기를 어기는 것은 곧바로 일탈이며 반항으로 간주되었다. 안정된 근엄함을 웃음으로 흔들어 놓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기성세대의 논리로 인해 우리는 미술시간, 하얀 도화지 위에서만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굴 벽에 수백 개의 손바닥을 남긴 선조들의 장난기를 물려받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도심의 빈 벽들은 무한하게 펼쳐진 도화지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을 크레파스로 아무렇게나 깨작거리고 싶어 하는 꼬맹이들의 장난쯤으로 생각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기에는 스텐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고상한 갤러리 안이 아닌 우리가 일하고, 걷고, 삶을 살아가는 바로 그 길 위에 있다는 것. 우리가 기대 선 그 벽에서 자유롭게 재잘거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스텐실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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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전쟁 등을 비판하는 다양한 스텐실 작품들.
 자본주의, 전쟁 등을 비판하는 다양한 스텐실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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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실, 그래피티, 그리고 거리 예술
[토막인터뷰] 다니엘 월코위스 부에노스아이레스 디자인학부 교수

거리 예술 전문가인 다니엘 월코위스 부에노스아이레스 디자인학부 교수에게 스텐실, 그래피티 등에 관해 물었다.

- 스텐실과 그래피티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거리 예술(street art)에는 그래피티·스텐실·태그·스티커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래피티는 화려한 색과 도안으로 벽에다 직접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방식이고, 스텐실은 도안을 오려내고 그 오려낸 부분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것으로 한두 가지 색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태그는 두꺼운 매직으로 벽에다 사인을 하는 것이다.

 다니엘 교수.
 다니엘 교수.
ⓒ 이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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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실이 그래피티나 다른 방식들과 다른 점은, 물론 거리 예술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지만 특히 문맥(콘텍스트)과 장소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스텐실에 담긴 아이디어는 단지 작품 안에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스텐실이 새겨진 위치·건물·장소 등 배경과 함께 해석되어 의미를 발생시킨다. 예를 들면 부시 대통령에 대한 스텐실이 평범한 거리에 있는 것과 미국 대사관 벽에 있는 것은 의미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 아르헨티나에서 스텐실 붐이 일었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폭발적으로 많은 작품들이 거리에 등장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현재는 거리 벽에다 하는 스텐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상업적인 것과도 접목을 시도해서 티셔츠나 스노보드 등에 스텐실이 새기기도 한다. 또한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미술관에서 주기적으로 전시회가 열리기도 하고, 미국, 유럽 등에서 아르헨티나 스텐실 아티스트들을 초청하여 전시회를 여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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