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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 여의도 KBS본관 3층 제1회의실 앞에서 사장 후보 서류 심사를 위한 이사회를 저지하기 위해 노조원과 사원행동 직원들이 청원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21일 오전 여의도 KBS본관 3층 제1회의실 앞에서 사장 후보 서류 심사를 위한 이사회를 저지하기 위해 노조원과 사원행동 직원들이 청원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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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이루어지려면 기본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상식과 예의다. 최소한의 상식과 예의를 갖추지 못한 상대와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일 '대화불능' 상대가 개인이면 간단히 무시하면 된다. 그러나 대상이 한 나라의 정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부의 판단과 행위는 국민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국민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약속하고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 받은 집단 아닌가.

국민들은 정부가 최소한의 상식과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대화'가 아니라 '정권 타도'를 요구한다. 한국의 군사독재가 모두 이 저항의 목소리 속에서 막을 내렸다. 이명박 정부는 해방 이후 (혹은 현 정부가 좋아하는 말로 '건국' 이후) '타도' 구호를 가장 먼저 듣는 정부가 되었다.

이미 지난 봄 촛불시위대 사이에서 '타도' 구호가 등장했다는 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이것은 국민들이 정부를 합리적 대화상대로 보지 않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정부가 현명하다면 국민들과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었는가를 살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정부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기 바쁠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입으로는 '소통'을 말했지만, 실천방안으로는 물대포에 색소를 섞고 특별 훈련을 받은 사복 체포조를 투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입을 막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정부는 공영방송까지 자신의 편으로 길들이기 위해 검찰, 경찰, 방송통신위원회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정부부터 '법과 질서'를 지켜라

이명박 대통령은 수차례 '법과 질서'를 강조했으며,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을 보라.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하는 '법'은 공영방송이 정부의 산하기관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과 살을 맞대고 일하는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나 보자.

"한국방송사장은 정부 산하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7월 18일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이후 정권의 비호를 받은 KBS 보수이사들에 의해 정연주 사장의 해임제청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차명진 대변인은 8월 8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사필귀정이다. 정연주라는 좋지 않은 혹을 떼어낸 KBS의 창창한 앞날이 기대된다. BBC와 같은 진짜 국민의 방송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온 국민이 성원할 것을 약속한다. 좌파들이 정연주 사장을 극렬 비호하는 모습을 보니 KBS 이사회가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더 든다. 국민의 방송을 좌파코드 방송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KBS 카메라를 조종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공영방송이 '좌파 (정권의) 코드방송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일관된 견해였다. 정연주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던 논리도 바로 이 '코드임명'이었다. 그러나 한나라 당 집권 후 공영방송은 버젓이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정권의 홍보수단이 된다. 이게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정부가 할 일인가?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자료 사진). 5월 7일 국회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관련 청문회에서 "논리적 비약으로 TV프로그램이 광우병 괴담을 유포, 혹세무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자료 사진). 5월 7일 국회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관련 청문회에서 "논리적 비약으로 TV프로그램이 광우병 괴담을 유포, 혹세무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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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했으니 해임권도 당연하다? 그럼 대통령은?

KBS 사장으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을 앉히겠다는 발언은 몰상식할망정 솔직하기는 하다.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니 파면할 자격도 있다'는 논리나, 'KBS의 적자경영에 책임이 있으니 해임해 마땅하다'는 주장보다는 말이다.

이미 8년 전인 2000년에 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KBS 사장 '임면권'을 해임권 없는 '임명권'으로 바꾼 바 있다. 감사원법에 따르면 '현저한 비위(개인비리)'에 대해서만 이사회의 해임요구가 가능하다.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는 사람들이니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두 잊고 있는지 모르지만,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대통령이 그렇게 싫어한다는) '떼법'을 써서는 곤란하다.

임명했기에 해임도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임기에 상관없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어떻게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누를 것인가? 현 정부의 논리를 따르면,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았으니 물러나라고 요구할 권리도 국민들에게 있어야 한다. 게다가 '적자경영'이 해임의 합당한 이유라면, 국가경제를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간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옳은 일인가?

이번 촛불시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던 구호 가운데 하나는 '이명박 탄핵'이었다. 한나라당이 야당이던 시절, 대통령의 사소한 발언 하나로 그를 몰아내려던 시도를 보며 국민들이 익힌 구호다. '쥐XX를 몰아내자'라는 구호는 어디에 나왔을 것 같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 집권여당이 과거 대통령을 이름 석 자로 부르거나, '개구리XX,' 심지어 '단합대회 연극'을 빙자로 걸쭉한 육담을 퍼붓지 않았던가.

현 정부가 지금 저지르는 모든 탈법행위가 결국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04년 8월 28일 전남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직접 출연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하는 연극 '환생경제'를 공연했다. 사진은 당시 저승사자 역을 맡은 주성영 의원.
 2004년 8월 28일 전남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직접 출연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하는 연극 '환생경제'를 공연했다. 사진은 당시 저승사자 역을 맡은 주성영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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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조선> "정부와 정당 대변하는 건 공영방송 역할 아니다"

한나라당의 차명진 대변인은 '사필귀정'이라며 KBS가 'BBC와 같은 진짜 국민의 방송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BBC가 괜찮은 방송이라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BBC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진짜 국민의 방송"이 된 비결은 무엇일까? <조선일보>가 답해주고 있다. 제목만 읽어도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정부·특정정당 대변하는 건 공영방송의 역할 아니다' 내한한 다이크 전 BBC사장"
"정치인은 근본적으로 공정할 수 없어 공영방송은 공정·정직하게 보도해야"
"국민 지지받지 못하는 정책 추진 때 정부는 언론에 모든 책임 떠넘겨"

'정치인은 근본적으로 공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대통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해고하고 원하는 사람을 심을 수 있다면 방송의 공정성은 지켜질 수 없다. '정부나 특정정당을 대변하는 건 공영방송의 역할이 아니'라면, BBC 같은 "진짜 국민의 방송"이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필귀정'? '모든 것은 정치로 귀결된다'는 뜻이라면 제대로 쓴 말이다. <조선일보>는 아주 친절하게 쇠고기 정국을 둘러싼 정부의 비이성적 태도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도 설명해 준다. "국민 지지받지 못하는 정책 추진 때 정부는 언론에 모든 책임 떠넘겨."

아무리 4년 전이지만 <조선일보>가 이럴 수 있느냐고?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한국기자협회가 최근 전국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일보>를 포함한 전국 중앙일간지 기자 가운데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의 평균 지지도는 2.7퍼센트였으며, 정연주 해임에 반대하는 사람이 65.7퍼센트에 달했다.

그뿐 아니다. 지난달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는 전국의 언론학자와 언론실무종사자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이 가운데 절대다수인 66.5퍼센트가 정연주 사장의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고 답했다. 사퇴해야 한다는 사람은 31.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으며, 71.8퍼센트가 KBS의 감사가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표적감사'라고 답했다.  

2004년에 <조선일보>가 그렉 다이크 전 BBC사장을 인터뷰한 기사. 이 신문은 BBC방송 사장이 영국정부의 이라크 참전을 비판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공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고 썼다.
 2004년에 <조선일보>가 그렉 다이크 전 BBC사장을 인터뷰한 기사. 이 신문은 BBC방송 사장이 영국정부의 이라크 참전을 비판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공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고 썼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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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와 BBC, PBS의 공통점과 차이점

영국의 BBC, 미국의 PBS, 그리고 한국의 KBS 방송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 모두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을 표방한 공영방송이라는 점이다. BBC는 영국, PBS는 미국, 그리고 KBS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이다. 두 번째는 각 나라의 국민들로부터 가장 높은 신뢰를 받는 언론매체라는 것이다.

영국의 BBC는 민영 보도방송인 스카이뉴스(Sky News)나 유수 일간지의 여섯 배에 가까운 신뢰도를 자랑한다. 미국의 PBS 역시 시앤앤(CNN)이나 폭스뉴스(Fox News) 같은 민영채널은 물론,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보다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한나라당의 차명진 대변인이 말한 "진짜 국민의 방송"은 아마 이런 방송을 말하는 것이 터이다.

그런가? 2008년 한국언론재단 조사 결과 그래프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 국민들에게 가장 높은 신뢰를 받는 5개의 매체 가운데 1, 2위는 모두 공영방송인 KBS와 MBC다. 정부가 신뢰하는 그 '가족' 매체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일보>가 상위 5위 안에 들었지만, 신뢰도는 KBS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민영방송인 SBS는 순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현 정부가 말하는 "국민의 방송"이란 어떤 것일까?

BBC, PBS, 그리고 KBS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모두 정치적 보수세력에 의해 '좌파방송'이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는 점이다. 심지어 BBC와 PBS는 일각에서 '빨갱이(pinko)' 방송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치권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보도는 모두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앞의 <조선일보>도 BBC 전 사장의 말을 빌려 보도하지 않았던가. "정치인은 근본적으로 공정할 수 없다"고 말이다.

2008년 한국언론재단 조사에 따르면, 국민 신뢰도가 가장 높은 매체는 모두 공영방송인 KBS와 MBC였다. SBS와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모두 5위 내 순위권에 들지 못했으며, 유일하게 포함된 <조선일보>마저 KBS의 1/8 수준에 그쳤다.
 2008년 한국언론재단 조사에 따르면, 국민 신뢰도가 가장 높은 매체는 모두 공영방송인 KBS와 MBC였다. SBS와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모두 5위 내 순위권에 들지 못했으며, 유일하게 포함된 <조선일보>마저 KBS의 1/8 수준에 그쳤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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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공영방송인 BBC는 오랫동안 국민들의 신뢰를 받아왔다. 그래프에서 보듯, BBC는 민영뉴스채널인 스카이뉴스나 유수 일간지의 6배에 가까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는 오랫동안 국민들의 신뢰를 받아왔다. 그래프에서 보듯, BBC는 민영뉴스채널인 스카이뉴스나 유수 일간지의 6배에 가까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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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이룬 공영방송, 다시 정권의 홍보수단 되나

'BBC 같은 방송을 만들기 위해 KBS 사상을 해임한다'는 말 자체가 희극적인 모순이다. 정치권이 공영방송 지도부를 좌우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공영성에서 가장 먼 발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현 정부가 진정한 공공의 방송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이미 사라진(그러나 행사된) 대통령의 해임권뿐 아니라 임명권도 포기해야 한다. 여기에 바로 BBC, PBS, KBS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보도의 '공정성(fairness)'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복잡한 개념이다. 언론 보도는 늘 상충하는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해당사자들이 이 '공정성'을 판단하는 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판단은 오직 국민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국가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나 검찰이 양대 공영방송인 KBS와 MBC의 보도와 운영에 개입하는 현 상황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정상이 아니다.

비록 개선의 여지는 있지만, 공영방송은 한국의 어떤 언론매체보다 국민들의 높은 신뢰를 받아 왔다. 이 신뢰는 공영방송이 정치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 속에서 힘들게 얻어낸 것이다. 이제 겨우 국민들의 신뢰를 받기 시작한 공영방송이 권위주의 정부시대의 정권 홍보 수단으로 되돌아갈 위기에 처해 있다.

런던에 있는 BBC 방송국(Broadcasting House).
 런던에 있는 BBC 방송국(Broadcasting House).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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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다시 신뢰를 잃으면 한국의 공영방송은 영원히 그 신뢰를 되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영방송 종사자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다. 현 집권 세력은 4년 후에는 물러가겠지만, 그 피해는 현재와 미래의 국민들이 고스란히 지게 된다. 정치권이 이 일을 마음대로 하도록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참고로 말하자면 한국의 정부, 정당, 국회의 국민 신뢰도는 한국의 모든 기관이나 단체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신뢰도(정부 3.35, 정당 3.31, 국회 2.95)는 언론(4.91)이나 시민단체(5.41)는 물론, 낯선 사람(4.0)보다도 낮았다.

국민의 신뢰가 낮아서 공영방송 사장을 교체해야 한다면, 정부 책임자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태그:#공영방송, #KBS, #BBC, #PBS,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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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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