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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5일째 단식 농성 중인 유흥희 조합원이 기륭전자 건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5일째 단식 농성 중인 유흥희 조합원이 기륭전자 건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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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유흥희씨는 올해 서른아홉의 비혼이다. 딱히 결혼에 반감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시기'를 놓친 탓에 새삼 결혼이니 뭐니 호들갑 떨기가 쑥스러웠을 뿐. 결혼보다는 생계가 더 급했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고개 빳빳이 들고 일하면 해고 1순위야"

유씨는 1남 3녀 중 셋째. 식당에서 일을 하며 4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오늘의 유씨보다 어린 나이 서른여섯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됐다. 어머니의 고단한 일상을 보면서 성장한 유씨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하루빨리 취직해 어머니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유씨가 구로공단(오늘의 가산디지털단지)을 찾은 것은 1992년. 공단 내 한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유씨가 취직하던 날 기뻐하리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그러나 돌연 눈물을 보였다.

"미안하다. 가고 싶다던 대학에도 못 보내주고…."

1997년 구로공단을 떠났으니 5년여 기간을 일했던 모양이다. 유씨는 2004년 다시 구로공단으로 돌아왔다. 마땅히 취업할 곳을 찾지 못해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 시켜 주겠노라 했던 사장은 그러나 유씨가 인쇄소에서 1년을 맞기 직전 해고했다. 공단의 다른 회사에 취직했으나 유씨는 3개월 만에 다시 해고됐다.

돌이켜보니 좀 이상했다. 유씨가 처음 구로공단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정규직으로 일을 했다. 회사가 직접 구인광고를 냈고 직접 고용했다. 2004년의 구로공단은 달라져 있었다. 공단 내 어떤 회사도 인력을 직접 고용하지 않았다. 일을 하려면 일단 파견업체를 통해야 했다. 유씨가 기륭전자에 입사한 과정도 '2004년 형'이었다.

인터넷에서 구인광고를 보고 유씨는 이력서를 썼다. 구인광고를 낸 회사는 무작정 가산디지털단지 역으로 나오라 했다. 그리고 전철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를 타고 유씨는 기륭전자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유씨는 애당초 자신이 일하게 될 곳이 기륭전자였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기륭전자에 도착해 두세 차례 면접을 본 것 같다. "잔업특근을 할 수 있느냐.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느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유씨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오래 일하고 싶었으니까. 이어서 면접관은 말했다. "일은 힘들지 않으니 3개월만 일하면 정규직 시켜주겠노라"고. 그래서였을까. 기륭전자가 보여준 계약서에 입사일은 기입됐으나 계약기간은 공란으로 남아 있었다. 2005년 6월의 일이다.

유씨가 일을 시작했을 때 고참 '아줌마' 노동자들은 종종 이상한 말을 했다.

"고개 빳빳이 들고 일하면 해고 1순위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해고가 그렇게 빈번했던 걸까. 유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계약기간도 없는데 해고사유가 계약기간 만료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5일째 단식 농성 중인 유흥희 조합원(오른쪽)이 수첩에 지지 방문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고 있다.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6일째 단식 농성 중인 유흥희 조합원.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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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의 입사 동기는 총 12명. 업무 초기인데다 사람들이 낯설어 그다지 친근하게 굴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유씨와 같은 생산라인의 동기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또 한 명이 사라졌다. 유씨는 그때도 "사정이 있겠거니..."하고 말았다.

사라진 동기 중 하나가 유씨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후. "나, 잘렸다"로 말을 시작한 동기는 울먹이고 있었다. 일을 못한 것도 아닌데 해고됐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황당하고 창피해서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사정은 이렇다. 집안 일 때문에 잔업특근을 빠지게 된 동기에게 관리자는 "그래, 가봐" 했다. "집에서 푹 쉬라"는 말도 했다. 동기는 집에서 푹 쉬는 게 해고를 의미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사람을 불러서 설명한 것도 아니고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해고를 통보 받았을 때에도 동기는 차마 자신의 해고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한다. 그러다 문득 작업 중에 반장과 이견으로 잠시 언쟁을 벌인 일이 떠올랐다. 감히 반장에게 대들다니. 밉보였던 것이다.

"고개 빳빳이 들고 일하면 해고 1순위야."

유씨는 '아차' 싶었다. '아줌마' 노동자들의 충고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 그러기야 하겠어?",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그럴 수 있을까?" 했던 유씨는 순진했던 거였다. 2005년 7월 5일 유씨가 노동조합에 가입한 직접적인 동기였다.

유씨는 그러나 노조 총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갑자기 작업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도. 회사 측의 방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노조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9월 유씨는 전격 해고됐다. 해고사유는 '계약만료'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씨의 계약서에 계약기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상기 시키자 회사는 '물량감소'라는 말로 얼버무리기도 했다. 샘플과 신제품을 생산하는 라인을 담당해온 유씨에게 이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때까지도 작업량은 넘쳐나고 있었던 것. 노조가입이 해고사유라는 사실을 회사 측만 인정하지 않았다.

해고 직전 구사대에 밟혀 발톱이 빠진 일도 있다. 병원에 실려 가는 동안 유씨는 분통이 터져서 울지도 못했다.

"잘못은 회사가 했는데 모든 법적 책임은 우리 노동자들이 다 져야 하고…. 억울하다, 부당하다는 생각은 잠시 잠깐이었지만 뼈에 사무치더라."

그렇게 시작한 싸움이 오늘로 1088일째다. 유씨와 김소연 분회장의 단식 66일째다.

유씨의 어머니는 딸의 단식 사실을 모른다. 복직을 위해 투쟁한다고만 생각한다. 밤낮없이 일만 하는 딸이 64만 원 달랑 받아오는 걸 보고 '미친 짓'이라 했던 어머니는 "너, 왜 그러고 사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유씨는 어머니를 설득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녜요. 이곳은 다 그래요. 죽어라 잔업특근을 해야 80~90만 원 받아요."

그래도 '내 자식만큼은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만해라', '포기해라'며 지금까지도 유씨의 싸움을 말리는 어머니. 굴하지 않는 딸에게 이제는 '건강을 생각하라'는 말밖에 다른 말은 참고 만다. 단식 전에 유씨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씩 어머니를 만났다. '시집도 안 간 딸자식'이 새까맣게 말라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의 맘은 오죽했을까.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그 주역들은 죽어간다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5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오른쪽)이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66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오른쪽)이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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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66일.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1000일이 넘은 투쟁을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며 유씨는 머리를 흔든다. 지난 2005년 여름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기륭전자는 그 대가로 벌금 5백만 원을 물었기 때문에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밥 먹으면 되지 왜 그러나. 분회장과 나를 죽이는 것은 조합원들"이라 말하는 뻔뻔스러운 기륭전자를 향해 "이것은 적어도 사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최소한의 항변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묻는다. 법정 최저임금보다 10원이 많은 초봉 64만 1850원 받고 일하다 해고돼 햇수로 4년을 싸우느니 월급 좀 더 주는 다른 곳에 가서 일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4년이 흘러 최저임금이 다소 오르긴 했지만 지금도 다 최저임금 신세다. 파견이 아니면 단 한 군데도 취업을 할 수 없다. 기륭 또한 불법파견을 합법화하기 위해 3~6개월 단위로 해고를 단행해 왔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싸움에 870만 비정규직의 목숨이 달려있다 생각하면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유씨의 생각이다.

단식 60일을 넘기면서 이제는 앉아 있는 것도 수월치 않다. 기력이 없으니 사소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 마련된 비닐천막 안에 누워 있으면 체감온도가 40도를 훌쩍 넘는 것 같다. 더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도 안 해본 게 아니다. 심장이 빨래를 쥐어짜는 것처럼 아플 때가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아파서 사람이 죽는구나". 무서웠다.

효소와 소금, 물만 먹으며 버텨온 나날. 그나마 김 분회장은 단식 63일 되던 지난 12일 효소와 소금마저 끊어 버렸다. 다시 말해 무엇하랴만 "죽으라면 죽겠다"는 각오였을 터. 김 분회장은 이 같은 결정을 유씨와 의논하지 않았다. 의논을 해왔더라면 유씨는 극구 말렸을 것이다.

유씨에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앉아 있을 때, 말을 할 때는 늘 한 손으로 심장을 쓸어내리는 버릇. 유씨의 손동작은 보는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든다. 심장에서 손이 떨어지는 순간 '큰 일'이 날 것만 같은.

30여 분간의 대화가 끝난 뒤 유씨는 미동도 없이 옆에 누워 있는 김 분회장 쪽으로 몸을 돌려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단식을 풀 상황이 아닌데... 분회장이 잘못될까 겁난다"며. 그 모양을 지켜보면 이런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미안하지만 유흥희씨, 당신의 건강도 장담 못한다. 당신도 잘못될 수 있다."

최근 두 달여 동안 이들의 '몰골'은 확연히 달라졌다.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은 몸으로 희미하게 웃는 이들과 무관하게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은 그러나 한껏 풍요롭다.

공익광고 말이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의 주역이라며 '공순이'의 역사를 훑어주던 광고. 우리가 이전에 '공순이'라 불렀던 그들의 피땀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뤄냈다는 내용의 광고. "당신들은 대한민국의 산업역군입니다"라는 영광스러운 문장으로 끝나던 그 광고. 지금 이 시간, '대한민국의 산업역군'들이 낙엽처럼 바싹 말라가고 있는데도.


태그:#기륭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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