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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왼쪽)와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자료사진)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왼쪽)와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자료사진)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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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지난 1월 '미국 스파이 의혹사건'에 연루됐던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를 관리한 것으로 보이는 영문 문건을 확보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이(리)빈대사 관련 정책'이란 이름의 문건에는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에게 '암호명'(code name)을 부여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후 그를 관리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문건은 지난해 1월 검찰이 백성학 회장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해 얻어낸 수많은 자료 중 하나로 올 초 재판부에 제출됐다. 특히 이 문건은 현재 미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인 리처드 롤리스의 서울 사무실에서 발견된 일명 'D-47' 영어 번역문건과 더불어 '미국 스파이 의혹' 사건을 규명해줄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경인방송(OBS) 대주주인 백 회장은 13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리빈 전 대사와 관련된 문건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작성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검찰은 지난 11일 '국가정보 유출 의혹'과 관련 국회 위증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백 회장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결심공판에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해 국가정보를 다룰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국가정보 유출 의혹'을 일축한 바 있다. 

의심스러운 파일, '리빈에게 암호명 부여하고 귀국 후 관리계획 세워라'?   

검찰이 지난해 1월 초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얻은 '리빈대사 관리계획' 문건의 일부. 여기에는 '중국 복귀 후 리빈 대사 관리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주문이 들어 있다.
 검찰이 지난해 1월 초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얻은 '리빈대사 관리계획' 문건의 일부. 여기에는 '중국 복귀 후 리빈 대사 관리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주문이 들어 있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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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오마이뉴스>가 이번에 확보한 이 문건은 영문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백성학 회장의 비서가 사용하던 컴퓨터에서 발견된 것이다. 백 회장의 비서인 이아무개씨와 허아무개씨가 관리하던 문건으로 '이(리)빈대사 관련 정책(7.14)'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괄호 안에 있는 숫자는 이 문건이 작성된 2005년 7월 14일을 뜻한다. 작성자는 영안모자의 영문 이니셜인 'ya'로 기재돼 있다. 

'이(리)빈대사 관련 정책' 문건은 모두 5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리빈 전 대사 외에 <수용소의 노래>를 썼던 새터민 출신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와 거제도포로수용소·흥남철수 기념사업 등도 언급돼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흥남철수 기념사업은 모두 백 회장과 직접 관련된 사업들이다. 첫 번째 항목으로 등장하는 리빈 전 대사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Consult on management plan for Ambassador Li Bin
1) to decide a code name / how to deal business-related works / a management plan for Li Bin after he return to China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1. 리빈 대사 관리계획을 고려하라
1) 암호명 결정 /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다루는 법 / 중국 복귀 후 리빈 대사 관리 계획

         
백성학 회장 사무실 컴퓨터에서 나온 '리빈 대사 관리계획' 문건의 작성자는 영안모자의 영문이니셜인 'ya'로 기재돼 있다.
 백성학 회장 사무실 컴퓨터에서 나온 '리빈 대사 관리계획' 문건의 작성자는 영안모자의 영문이니셜인 'ya'로 기재돼 있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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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문건에는 '외신업무₩발신₩기타'라는 문서 경로가 적혀 있다. 영문으로 작성된 이 문건이 국내용이 아니라 해외용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백 회장의 미국 인맥이 두텁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문건이 미국 측에 보내졌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백 회장의 미국 인맥에는 존 볼튼(전 국무부 차관), 제임스 알 릴리(전 주한 미 대사), 리처드 롤리스(전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 젭 부시(전 플로리다 주지사, 부시 대통령 친동생), 단 그레그(전 주한 미 대사), 테레스 샤힌(전 대만대표부 대사), 다니엘 아놀드(전 CIA 태국 지부장), 존 사노(전 CIA 한국 지부장) 등이 포함돼 있다.

백 회장의 미국 인맥에 CIA, 국무부, 국방부 등에서 근무한 인사들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그의 미국 인맥은 지난해 1월 검찰의 압수수색을 통해 '목록'의 형태로 드러난 바 있다. 

하지만 영안모자 측의 한 관계자는 "우리 회사에서 리빈 전 대사 관련 문건을 작성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라며 "다만 검찰의 압수목록에 그런 문건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검찰이나 재판부에서는 그 문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지난 11일 결심공판에서 관련 심문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사라진 리빈... 정보 제공받은 '남한 인사들'은 누구?

'리빈 대사 관리계획'이 언급돼 있는 이 문건은 본국으로 귀국한 리빈 전 대사의 행적과 관련해 더욱 눈길을 끈다. 

리빈 대사는 지난 2001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주한 중국대사로 근무했다. 그는 '중국 외교부 안에서 한반도 문제에 가장 정통한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5년 8월 본국으로 돌아간 뒤엔 북한 핵 전담대사가 되어 6자회담 의장국 차석대표를 맡았고, 이후 외교무대에서 물러나 산둥성 웨이하이(威海)시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2006년 12월부터 리빈 전 대사의 행적이 사라졌다. 그리고 2007년 7월 21일 홍콩의 <명보(明報)>는 그가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중국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은 당시 <명보>의 보도를 인용한 <연합뉴스>의 기사 중 일부다.

"중국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중과 관련한 국가기밀 누설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 명보는 21일 리 전 대사의 혐의가 지난해 1월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 당시 한국, 일본 등지의 외신에 방중 계획 및 일정이 유출돼 보도된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명보는 당시 한국과 일본 언론이 김 위원장의 후베이, 광저우, 선전 방문 일정을 정확하게 보도했다며 리 전 대사의 기밀 누설 가능성을 전했다. … 리 전 대사가 귀국 이후 산둥성 웨이하이시 부시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북한 핵문제 전담대사로 6자회담에 참여한 전력 때문에 일부에서는 6자회담과 관련한 정보 유출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가 정기적으로 남한 인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왔다"고 보도한 2007년 9월 13일자 <워싱턴포스트>.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가 정기적으로 남한 인사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왔다"고 보도한 2007년 9월 13일자 <워싱턴포스트>.
ⓒ 워싱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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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2007년 9월 13일자 <워싱턴포스트> 기사다. <워싱턴포스트>는 '중국 사정에 밝은' 한 중국 관리의 말을 인용해 리빈 전 대사의 혐의를 이렇게 전했다.

"리빈 전 대사는 (일부) 남한 인사들에게 정보원이었는데, 그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폐쇄적인 북한 정부에 관한 리빈 전 대사의 깊숙한 내부정보를 활용했다. 그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주한 중국대사로 근무하는 동안 남한 인사들에게 김정일, 북한, 북중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제공했다."

그렇다면 리빈 전 대사로부터 정기적으로 정보를 제공받은 '남한 인사들'은 누구일까?

2004년 4월 김정일 위원장의 '극비 방중'을 특종보도한 곳은 <연합뉴스>였다. 하지만 당시 관련기사를 보도했던 박기성 <연합뉴스> 기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리빈 전 대사가 정보원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 <워싱턴포스트> 기사에서 주요 취재원으로 등장하는 중국의 한 관리는 "당국의 조사자들은 리빈 전 대사의 정보유출이 한 언론인에게 유출되는 것을 넘어섰음을 확인했다"며 "리빈 전 대사가 유출한 정보는 남한 관리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제공됐다"고 말했다. 

<명보>,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고려하면, 남한 관리를 포함해 리빈 전 대사로부터 정기적으로 정보를 제공받은 '남한 인사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특히 <워싱턴포스트>가 인용한 중국관리의 말, 즉 '리빈 전 대사의 정보가 미국에도 제공됐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리빈 전 대사와 미국을 연결해주는 '남한 인사'가 있다는 말이 된다.  

검찰은 왜 '리빈대사 관리계획' 문건 뒤늦게 제출했나?

그런 가운데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리빈 대사 관리계획' 문건은 매우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리처드 롤리스 등과 가까운 백 회장 사무실에서 발견된 이 문건에 '본국에 귀국한 이후에도 리빈 전 대사를 어떻게 관리할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찰은 지난해 초 백 회장 사무실 압수수색을 통해 이 문건을 입수해놓고 1년이 지난 올 초에서야 재판부에 이를 증거자료로 제출해 '은폐 의혹'이 일고 있다. 검찰은 '미국 스파이 의혹 사건'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이 문건이 어떻게 작성됐는지조차 조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신현덕 전 경인방송 대표는 지난 11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국가정보 유출 의혹 사건'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법원에 뒤늦게 제출한 수사기록에서 전 주한 중국대사 리빈 관련 정책문건이 슬며시 포함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며 "검찰이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 전 대표는 "이 문건은 당초 검찰이 복사해준 수사기록에는 빠져 있다가 '왜 수사기록 일부가 누락되어 있냐'는 변호인의 항의를 받고 뒤늦게 검찰이 제출한 압수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며 "검찰은 이 문건과 관련해 어느 누구도 조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 전 대표는 "백성학 회장 비서 컴퓨터에서 발견된 영어로 쓰인 이 문건에는 리빈 대사의 코드네임을 결정하라고 했고, 리빈 대사를 관리할 계획까지 들어 있었다"며 "백 회장이 어떤 일을 했고, 이 문건이 어디로 보내졌을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신 전 대표는 "리빈 전 대사는 중국에서 한국과 미국에 국가정보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외교관직을 박탈당하고 체포되어 현재도 행방을 추적하기 어렵다"며 "검찰이 리빈관련 문건을 수사하지 않은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 전 대표는 이날 결심공판에서 검찰로부터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선고공판은 오는 10월 2일 열린다.


태그:#백성학, #리빈, #미국 스파이 의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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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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