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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한나가 마음이 아픈 남자들과 통화중이다. 우리 한나, 참 착해.
▲ 열심히 업무중인 한나.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한나가 마음이 아픈 남자들과 통화중이다. 우리 한나, 참 착해.
ⓒ 리얼라이즈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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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해줘, 응?"
"아, 언니 미쳤어? 싫어! 안 해!"
"그러지 말고 딱 열흘만 채워주면 언니가 돈 좀 더 챙겨줄게."
"아, 놔!"

멀쩡한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다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뛰쳐나간 그녀. 물론 1년 후 나도 글을 쓰겠다며 뛰쳐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이 언니의 라이프 스타일이 참 탐탁지 않았다. 꿈을 위해 사표를 쓴 것까지는 좋단 말이지. 그러면 꿈에나 매진할 것이지 아르바이트, 그것도 뜬금없는 전화방 카운터 아르바이트냐고요!

언니의 말은 그러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하루 24시간 중 15시간을 그림만 그릴 수 있어 참 좋다고. 그런데 언니가 천재적 재능을 가져 '슥삭' 그려내면 '샤샥' 팔리는 뭐 그 정도까지의 실력은 아니다 보니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게 되고 어느덧 은행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더라는 것. 밥은 먹어야 했기에 근무 시간과 급여를 고려해 선택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바로 전화방 카운터 아르바이트!

본능의 사각지대에 '귀'를 내주다

전화방…. 아는 오빠들만 찾아서 간다는 그 전화방! 10분 주차에 헐벗은 언니 전단지가 30장이 꽂힌다는 그 전화방! 채팅방 못 찾는 아저씨들이 손쉽게 이용한다는 그 전화방! 그 전화방 말이다.

뭐 본인이 직접 '섹쉬한' 음성으로 아저씨들 애간장을 녹이는 전장으로 나서는 건 아니고 카운터에서 연결만 하는 것이니 나름 지인인 나로서는 나서서 반대할 이유는 없다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징징대며 전화해대는 이 언니. 손님은 들어오는데 연결할 언니들이 적으니 카운터에 항의가 잦다는 것. 그러니 그냥 통화만 10분 정도씩 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위험천만한 발언, 사상, 마인드!

막말로 전화 연결을 해서 시사·경제·스포츠·세계평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자면 들어줄 용의'만' 있다고 치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뜨거운 본능이 이글거리는 아저씨들의 하악하악~ 거친 호흡! 욕구 불만에 가득 찬 채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다 하나만 잡혀봐라, 벼르고 벼르는 터질듯한 열정! 생각만 해도 환장할 노릇이지.

제 때 월급 나와주시고 퇴근하면 씻고 주무시기 바빴던 당시의 나로선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도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에라이, 이 죽일 놈의 빌어먹을 사랑'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1년여를 동고동락하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근무했던 언니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데 계속 거절할 수 없었다. 딱 열흘. 하루에 딱 1시간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난 그 험난한 본능의 사각지대에 귀를 내어주게 된다.

첫 통화 아저씨! 저는 트레이닝복 입고 잡니다

이 전화방의 시스템이라는 게 그렇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남자손님이 가게로 찾아가 방에 들어가면 카운터에서는 현재 통화 가능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방에 있는 손님과 통화를 연결해준다. 그리고 둘이 수화기 붙잡고 노래를 하든 판소리를 하든 놔둔다. 밖에서 약속을 잡아 만나든지 말든지 그 또한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다.

물론 전문적으로 일하는 언니들은 전화통화로 받는 돈보다는 '급 만남'으로 얻는 수익에 더 치중하게 된다더군. 광고와는 달리 언니들은 모두 고용된 형태라는 말이다(외로운 미시들이 아저씨 손님들처럼 찾아가는 게 아니란 말이오).

"지금 전화 연결할게. 대충 한 10분만 통화하다가 끊어. 미안, 정말 미안하다."

드디어 첫 통화. 무섭더군. 쫌.

수화기 저편에선 40대 중반 정도 되는 아저씨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개인 사업가이며 출장을 왔다가 밤도 늦고 해서 전화방에 잠시 들러본 것이라고.

"출장오셔서 밤이 늦었으면 숙소에 들어가 주무셔야죠."
"음? 쿨럭… 음… 뭐 그 전에 피곤을 좀 풀려고 와봤어요."

왜? 아니 왜 피곤을 풀러 전화방에 가? 피곤하면 사우나 가는 거 아닌가?

"지금 뭐 입고 있나?"

오호라~ 이 아저씨 점잖은 척 하시더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신다.

"'추리닝' 입고 있는데요?"
"……"

아저씨도 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침묵을 깨며 아저씨가 다시 물었다.

"잘 땐 뭐 입나?"

아니, 이 아저씬 남 입는 옷에 뭐 이리 관심이 많아?"

"'추리닝'이요…."
"하아……."

아저씨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아저씨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좀 더 과감하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늘 밤에 만날까?"
"자야 돼요."
"같이 잘까?"

언니에 대한 의리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백두산 천지 너머로 내동댕이쳐 버리고 시간을 보니 대충 10분도 넘었고 해서 난 어떻게든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남편이 옆에서 끊으랍니다!"
"컥!"

뚜- 뚜- 뚜-

간도 작은 아저씨 같으니라고. 그렇게 무서운 냥반이 이런 건 왜 했어~?

고민 청년부터 눈물 아저씨까지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병장 때까진 만났 거든요? 그런데 전역하니까 마음이 변했어요. 왜 이럴까요, 누나?"

하다 하다 이젠 고민 상담까지. 하긴 본능 욕구에 온몸을 불 태우는 아저씨들보다야 여자친구에게 다친 마음 하소연할 곳을 찾는 어린 녀석이 낫긴 하지.

"가장 최근에 양심에 손을 얹고 여자친구한테 실수한 거 없는지 생각해봐."
"별 건 없어요. 단지 제가 장난이 좀 심한 편이라 기다리느라 힘들었다는 여자친구의 투정에 괜히 고맙단 말 하기가 쑥스러워서 '얼굴이 무기니까 기다리는 동안 안전했을 거'라고 몇 번 했어요."

"몇 번?"
"예… 한… 열 번 정도요."
"에라이! 녀석아! 그럴 땐 말이야…."

어느덧 사랑 고민 상담이 되어버리는 이 화기애매한 분위기.

한 번은 지긋한 중년 아저씨가 전화통화 내내 울었다. 나이를 물어봐서 난 그저 스물여섯이라고 대답했을 뿐인데 깊은 한숨을 쉬더니 흐느끼기 시작하던 것. 그러던 아저씨의 곡소리는 점점 커져 10여분간 계속 되었다. 도대체 무슨 속병을 쌓아두었기에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나이만 듣고 저렇게 서럽게 울어대는 것일까. 아저씨는 그저 끊기 전에 한 마디 하셨을 뿐이었다.

"미안해요. 우리 딸이랑 동갑이네…."

물론 이런 본능에 휘둘리지 않은 통화는 몇 번뿐이었다. 어느 정도의 사람들은 적당선에서 화제를 돌려 사는 얘기나 좀 하다 끊을 수 있었지만 아주 강적의 본능맨들은 밑도 끝도 없이 '하악하악' 댔다.

내 참 금방이라도 "아저씨 딸내미가 내 또래일 거 같은데!"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지만, 그 놈의 의리가 뭔지 말이다. 그럴 땐 수화기를 내려놓고 개밥도 주고 인터넷도 하고 그랬다. "그래도 하는 동안은 열심히 해야 했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직접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훗….

미녀는 아니지만 나도 괴롭더라, 후후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몸은 뚱뚱하지만 목소리는 고운 한나가 전화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면이 나온 적 있다. 욕구불만인 성형외과 의사와 통화를 하면서 그와의 대화를 무기로 수술비를 깎는다는 영화의 감초같은 스토리.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인지라 현실에서의 전화 아르바이트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고 약속한 열흘을 대충 채우고 더는 못하겠노라며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인간과 인간이 대화함에 있어 정신은 없고 욕구 충족의 목적만이 존재한다는 건 참 삭막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인간은 뇌도 있고 심장도 있고 더불어 아랫도리도 존재하거늘 어찌 뇌와 심장은 로그아웃 상태에서 아랫도리만 접속을 시도한단 말인가. 얼마 전 다녀온 전국 일주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이 모텔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 열흘간의 아르바이트는 씁쓸한 여운만을 남긴 기억이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글



태그:#전화방,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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