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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호바람에서 만든 다양한 부채들
 죽호바람에서 만든 다양한 부채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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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김주용 대표 아버지가 운영하는 부채공장은 50만개의 부채살을 만들어 전국에 공급했다. 그 덕에 '구례살집'으로 통했다. 전국에서 거의 남아있지 않은, 우리 대나무로 부채살을 만드는 집이다.
 1980년대 후반 김주용 대표 아버지가 운영하는 부채공장은 50만개의 부채살을 만들어 전국에 공급했다. 그 덕에 '구례살집'으로 통했다. 전국에서 거의 남아있지 않은, 우리 대나무로 부채살을 만드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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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곡식을 팔아 첩을 사고 오뉴월엔 첩을 팔아 부채를 산다'고 했다. 선풍기에 밀리고 에어컨에 치어 기념품가게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던 부채가 다시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집 대나무는 팔자가 좋아요" 대나무에 무슨 팔자 타령인가. "대숲에 부는 바람이 기가 막히잖아요, 우리 집 대나무는 그 바람을 부채가 되어 고스란히 나누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부채장이 말이다.

바람 속에서 자란 대나무가 바람을 나누어 준다. 대나무 팔자치고는 제대로 풀어먹고 사는 셈이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펄밭에 처박혀 있거나 깊은 광에서 갇혀 지내야 하는 대나무 팔자도 있으니 말이다.

'딱 1년만'으로 시작된 부채와의 인연

지리산 아래에 터를 잡은 부채장이를 만났다. 명함에 '3대째 부채장이 죽호(竹好) 김주용'이라 적혀 있다. 김주용(32) 대표는 할아버지(김복렬, 1996년 작고), 아버지(김창균, 1949-2005)를 이어 3대째 부채 일을 하고 있다.

지난 2002년 1월 1일 '딱 1년만'이라며 마음을 다잡고 자취방 짐을 꾸려 구례로 들어왔다. 아버지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중국산 수입품에 부채공장들이 문을 닫자 부채살을 가져가던 단골공장들이 줄지어 도산했다.

공장이 잘 돌아갈 때도 단골들이 결제를 해줄 때까지 결제를 요구하지 못하던 아버지였다. 스트레스까지 겹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게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아버님은 끝내 일어서질 못하시고, 직접 부채 제작을 할 요량으로 제작한 기계 한 번 사용 못하고 떠났다. 원하지 않는 대물림이었다.

김주용 대표 아버지가 사용했던 대나무를 다루는 도구들
 김주용 대표 아버지가 사용했던 대나무를 다루는 도구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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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호바람(대표 김주용)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사라진, 우리 대나무를 삶아 색깔을 내는 부채공장이다.
 죽호바람(대표 김주용)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사라진, 우리 대나무를 삶아 색깔을 내는 부채공장이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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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를 만드는 사람들은 봄에 작업을 하고 여름에 판매한다. 가을과 겨울에는 대나무 고장에 머물며 재료를 마련해 전주로 가져갔다.

합죽선을 비롯한 부채장인들이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할아버지 집에 머물며 부채 재료를 준비했다. 대나무 산지라면 담양을 꼽지만 부채용 대나무는 지리산 자락에서 자란 대가 제격이다.

당시 장인들은 대나무 고르기·자르기·삶기·색깔내기, 부채살 뽑기, 한지 붙이기 등 모든 작업을 직접 했다. 요즘 준비된 재료로 완성품만 만드는 장인과 격이 다르다. 나중에는 할아버지가 직접 부채재료를 준비해 전주 장인들에게 보냈다. 이렇게 김 대표 집안이 부채와 인연을 맺었다.

때아닌 화재에 중국산 부채까지

부채는 크게 '접선'과 '단선'으로 구분한다. 접선은 합죽선처럼 접는 부채를, 단선은 손잡이가 있는 부채를 말한다. 합죽선은 겉대만 사용하고 속대는 필요 없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를 활용해 방구부채살을 제작했다. 부채 작업이 분업화되면서 방구부채살을 요구하는 공장도 늘어났다.

한때 50여명의 마을주민들과 함께 부채살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구례에서 아버지가 부채살을 공급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주문이 들어왔다. 일 년이면 50만개의 살을 전국 공장에 공급했다. 그 덕에 단골들 사이에 '구례 살집'으로 통했다.

구례에서 부채살을 공급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부채공장이 문을 닫는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1986년 정부의 부업단지 지정을 받아서 공장도 갖췄다. 이제 자리를 잡는가 싶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로 공장은 잿더미가 되었다. 공구 하나 건질 수 없었다. 대신 융자만 빚으로 남았다. 엎친데 겹친다고 1990년대 초반에 플라스틱 부채가 등장했다. 단골 공장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더구나 중국산 대나무 부채살 수입에 아버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말았다.

부채바람 꿈을 꾼다

대나무 삶기와 세척하기, 대나무 삶는 기계는 김주용(오른쪽 대나무를 삶는 사람) 대표 아버지가 직접 제작했지만 한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쓰러지셨다.
 대나무 삶기와 세척하기, 대나무 삶는 기계는 김주용(오른쪽 대나무를 삶는 사람) 대표 아버지가 직접 제작했지만 한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쓰러지셨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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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선을 만들고 있는 김주용 대표 어머니(정말남, 1954년생)
 태극선을 만들고 있는 김주용 대표 어머니(정말남, 1954년생)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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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는 현재 5만~6만개의 한지부채를 제작해 화방, 필장, 지엽사, 교재용으로 공급하고 있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 완성부채를 만들고 있다. 대학에서 기계를 전공한 김 대표는 공장 일을 시작하면서 공장기계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부채를 만드는 대부분 기계들은 부도 난 공장에서 대금 대신 제공한 것들이다.

김 대표는 고집스럽게 우리 대나무로 살을 만들어 부채를 제작하고 있다. 직접 대나무를 고르고, 살을 깎고, 자루를 만든다.

여기에 한지까지 붙여 완성품을 만드는 유일한 공장이다. 대부분 부채공장들이 수입살로 제작하거나 중국에서 완성품을 가져다 손잡이만 붙이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김 대표가 약속한 1년은 이미 지났다. 그 사이에 식구도 늘었다. 아내와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만 욕심이 생겼다. 요즘 부채살·재료·전통문양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여기에 방구부채를 넘어 합죽선을 만드는 일도 넘보고 있다. 이제 부채로 승부를 걸 생각이다. 작은 전시장과 판매장, 그리고 공예인의 꿈을 품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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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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