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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별(Lone Star)'이 그려진 텍사스 주 깃발과 주 경계를 합쳐 만든 이미지.
 '고독한 별(Lone Star)'이 그려진 텍사스 주 깃발과 주 경계를 합쳐 만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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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유일한 제국' 미국은 줄곧 국제사회를 무시해 왔다. 교토 의정서 비준 거부, UN 분담금 체납,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유화 등의 예가 그것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세계 자유와 평화를 위한다면서도, 안으로는 자국 이기주의에 함몰된 미국의 모습이다. 이는 중국 중화사상에 빗대 가히 '중샘사상(中Sam사상, Uncle Sam은 별무늬 테를 두르고 실크햇을 쓴 키크고 마른 사나이로 미국정부를 상징)'이라 부를 만하다.

물론 이런 미국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있기는 하다. 북한·이란·이라크(미국 점령 이전)·베네수엘라·리비아·쿠바 등이다. 이들은 부시의 골프장 카트를 대리운전해 주는 대신 부시를 '악마'라고까지 지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부시 정권에 의해 '악의 축' 낙인을 받거나 '미친 독재 좌파정권' 쯤으로 치부돼 국제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직접 언급은 안 했지만 부시에게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국가는 모두 광의의 '악의 축'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시가 참 난처한 일이 생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미국 내에서 그 악의 축이 생겨나고 만 것이다.

"대통령이 주 정부에 명령할 권리 없어"

부시의 사형 집행 중단 명령에도 불구하고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는 멕시코 국적 죄수의 사형을 강행하겠다고 나섰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보내면서까지 생각을 바꿔 보려 했지만 주지사는 5일 예정된 조 메들린(33)의 사형 집행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일개 주지사가 미국 최고 통수권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발단은 이렇다. 1993년 당시 18세이던 메들린과 그 친구들은 텍사스 휴스턴시 한 공원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소녀 엘리자베스 페나(16)와 제니퍼 어트먼(14)을 집단 윤간하고 잔인하게 목졸라 살해했다. 이듬해 메들린은 사형 선고를 받고 텍사스 교도소에서 지금까지 복역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형사법 제도에서는 간단하게 끝날 것 같던 이 사건이 복잡한 국제 문제가 됐다. 2003년 메들린과 멕시코 정부가 미국 정부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기 때문.

메들린은 비록 어릴 때 이민을 와서 미국 생활과 영어에 능통했지만 사건 당시 국적은 멕시코였다. 메들린의 변호인과 멕시코 정부는 미국 사법당국이 외국인을 체포할 경우 그 사실을 즉각 해당 국가의 외교 기관에 알려야 한다는 1963년 '영사 업무에 관한 비엔나 협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세계 각국 15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ICJ는 멕시코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고 심리 끝에 2004년 메들린을 포함한 미국 내 외국인 사형수 51명에 대한 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부시 대통령은 ICJ의 결정에 따라 사형 집행이 임박한 메들린에 대한 집행을 중단하라고, 이전에 자신이 주지사였던 텍사스주 정부에 명령했다.

하지만 릭 페리 주지사는 "텍사스주 정부는 텍사스주 헌법과 법률만 따를 뿐, 연방 정부가 다른 국가와 체결한 어떠한 조약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며 부시의 명령을 일축했다. 지난 3월 미 연방 대법원까지 "부시 대통령이 주 정부 사법 행위에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라며 "오직 미 국회가 제정하는 연방 법률에 의해서만 주 정부가 비엔나 협정에 따르도록 할 수 있다"며 텍사스의 손을 들어줬다.

부시가 미국 내 '악의 축'에게 단단히 한 방 먹는 순간이었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몇몇 연방 하원의원들이 주 정부가 국제조약을 따르도록 강제하기 위한 법률안을 국회에 상정했지만 메들린의 사형 집행이 중단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중론이다.

메들린(화면 아래쪽 중심부에 있는 사진 속 인물)은 멕시코 국적의 미국 내 사형수로 5일 사형 집행이 예정돼 있다. 사형 집행을 중단시키려는 부시 대통령과 집행을 강행하려는 텍사스 주지사 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메들린(화면 아래쪽 중심부에 있는 사진 속 인물)은 멕시코 국적의 미국 내 사형수로 5일 사형 집행이 예정돼 있다. 사형 집행을 중단시키려는 부시 대통령과 집행을 강행하려는 텍사스 주지사 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 댈러스모닝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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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들이 낳은 연방정부-주정부의 딜레마

메들린 사건은 연방 정부와 주 정부로 구성된 미국의 특수한 정치 구조에서 비롯됐다. 독특한 연방(United) 국가인 미국은 한 마디로 50개의 독립 국가가 모인 나라라고 볼 수 있다. 50개 주(State)에는 각각 독립적인 헌법이 있고, 자치적인 행정·입법·사법 기구도 갖추고 있다. 연방 정부는 단지 국제 사회에서 미국을 대표하며, 외교와 주 정부 간 문제만 다룰 뿐이다.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런 독특한 체제를 구상한 것은 왕이 통치하는 영국의 중앙집권적 체제에 대한 반발의 결과였다. 중앙집권제 하에서는 개인과 개별 주의 자유가 침해되기 쉽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국제 사회가 활성화되지 않은 20세기 초반까지는 이런 체제가 미국이 자랑하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튼튼한 버팀목이 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국제 사회가 활성화되면서 연방 정부가 맺은 국제 조약을 주 정부는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국제조약을 주 정부가 따라야 한다면 연방 정부에 대한 예속화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따르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미 연방정부의 대표성이 문제될 수밖에 없다. 연방을 구성한 이유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이런 미국의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메들린 사건이다.

문제의 중대성을 보여주듯 미국 내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도 메들린 사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메들린의 변호사인 도널드 도노반은 <댈러스모닝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텍사스 주지사는 미국 대통령이 미국인 전체를 대표해 다른 국가와 맺은 조약을 따라야 한다"며 "이는 처음부터 미국 헌법에 내재적으로 암시돼 있었고, 지난 200년 동안 법원에 의해서도 인정돼 온 사실"이라고 밝혔다.

휴스턴대 로스쿨 데이비드 다우 교수도 "(국제조약을 따르지 않겠다는 텍사스의 결정은) 다른 국가들을 자극해 비엔나 협정을 무시하게 만들 수 있다"며 "이는 해외에 살고 있거나 여행하는 미국인이 체포됐을 때 연방 정부가 해당 미국인을 보호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댈러스모닝뉴스> 등 몇몇 신문은 사설을 통해 주지사가 사형 집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주지사 대변인인 앨리슨 캐슬은 "이 사건은 미성년자를 집단 윤간하고 처참하게 살해한 한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며 "우리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바 없이 우리 시민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다"며 사형 집행 재고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미 연방 대법원 재판에서 텍사스 주를 대변했던 변호사 척 쿠퍼는 "국제 조약의 내용이 (연방 정부에 대한 주 정부의 자율권을 보장한) 미국 헌법 내용을 위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판사인 안토닌 스칼리아도 "미국법에 따라 판결하는 미국 법정에 어떤 근거로 ICJ가 개입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거들었다. 피해자 어트만양의 아버지는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국제 법정이나 UN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사형 집행을 중단하는 것은) 멕시코가 원하는 것이지 텍사스가 원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텍사스 사람들은 사형 집행을 원한다"고 말했다.

카우보이식 독립심과 저돌성을 뒷받침하는 경제력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
ⓒ http://www.yannon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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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주지사가 '제국의 황제' 부시 대통령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텍사스의 역사적인 특수성과 현재의 막강한 경제력 때문이기도 하다.

'텍사스 카우보이'가 상징하듯 텍사스 문화는 강한 독립심을 바탕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1836년 당시 강대국이었던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텍사스 공화국'을 세우고 10년 가까이 독립국을 유지했다. 1845년 미 연방에 포함된 뒤에도 노예 제도를 유지하며 연방에서 탈퇴하려는 남부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이 한사코 미시시피강을 장악하려 했던 이유도 텍사스에서 미시시피강을 통해 남부군에게 전달되는 막대한 보급품을 끊기 위해서였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도 줄곧 남부군의 후예인 민주당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했다. 텍사스에서는 197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화당 출신 주지사가 나올 수 있었다.

물론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텍사스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평등보다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공화당으로 기울었다. '텍산'이라 불리는 텍사스 사람들은 정부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한다. 주 정부에 바치는 개인 소득세가 없는 몇 안 되는 주라는 점이 단적인 증거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캘리포니아주에 이어 두 번째로 GSP(주내 총생산)가 높은 주라는 점도 텍사스 주지사가 부시 대통령에게 대들 수 있는 이유. 2007년 기준 텍사스의 GSP는 1조1419억6500만 달러로 한국 GDP보다 높고, 텍사스주만 따로 떼 놔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목축·면화업을 기반으로 했지만, 20세기 초에 시작된 '검은 황금' 석유 개발과 최근 댈러스·휴스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는 하이테크 산업 등이 텍사스를 더 이상 '카우보이 주'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엑손 모빌, 델 컴퓨터, AT&T,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아메리칸 에어라인, 록히드 마틴 항공 부분 등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본사가 즐비하고, 미 항공우주국(NASA) 등 각종 국책 연구기관이 들어찬 텍사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최근 미국의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 속에서 캘리포니아나 뉴욕 등의 부동산이 급락하는 반면, 텍사스 부동산은 보합세이거나 오히려 값이 오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경제력에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막대한 정치자금은 연방 정부가 텍사스를 무시하는 행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 사람들은 성조기는 알아도 자신이 살고 있는 주의 깃발이 어떤 건지 잘 모르고 산다. 성조기만큼 주기를 많이 꽂아 두는 주를 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텍사스에서는 텍사스의 상징인 '고독한 별(Lone Star)'이 그려진 주기를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만큼 자부심과 독립심이 강한 주라고 할 수 있다.

미 연방을 탈퇴해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곤 하는 주가 바로 텍사스다. 텍사스는 부시를 무시하는 '악의 축'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고루 갖췄다.

출처 : GSP는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Bureau of Economic Analysis, BEA), GDP는 국제통화기금(IMF).
 출처 : GSP는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Bureau of Economic Analysis, BEA), GDP는 국제통화기금(IMF).


태그:#텍사스, #부시, #악의 축, #릭 페리, #미국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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