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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을 뚫고 대관령 고개를 넘어 삼척의 죽서루로

 비에 젖은 죽서루
 비에 젖은 죽서루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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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30분에 차는 현장 답사를 위해 삼척으로 출발한다. 대전에서 삼척까지는 쉬지 않고 가야 4시간 정도에 닿을 수 있다. 중간에 두 번 정도 쉬어가야 하니 낮 12시나 되어야 우리의 목표지점인 죽서루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세차게 쏟아진다. 나중에 확인할 사실이지만 이날 하루 동안 비가 200mm나 내린 지역도 있다고 한다.

차는 중간에 문막휴게소와 대관령휴게소에서 쉬고는 동해고속도로를 따라 삼척으로 들어선다. 삼척, 과거에는 실직국 또는 실직주라고 불렸던 곳으로 관동지역에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고도이다. 지증왕 6년(505)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로 임명되었으며, 삼척군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경덕왕 16년(757) 죽령현, 만경현, 우계현, 해리현을 관할하는 군으로 삼척군이 생겨났다. 고려 성종 14년(995) 잠시 척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현종 9년(1018)다시 삼척군으로 돌아갔다.

 죽서루 2층의 누마루: 이곳에서 우리는 죽서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죽서루 2층의 누마루: 이곳에서 우리는 죽서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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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제대로 구경도 할 수 없고 사진도 찍기가 어렵다. 우산을 받쳐 쓰면 사진기를 조작하기가 쉽지 않고 우비를 입으면 사진기가 비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서루가 정자인지라 그 안에 들어가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죽서루는 오십천 북쪽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로 북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죽서루에 대한 접근은 북쪽에서 가능하다. 죽서루를 보려면 주차장으로 쓰이는 바깥마당에서 안내소로 보이는 평삼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죽서루는 안마당의 절벽 쪽 단 위에 2층 누각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1층은 바위와 땅을 이용해 기단 형태로 만들어졌고, 2층에는 누마루가 놓여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길 수 있게 했다. 1층은 암반과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기둥이 13개이며, 2층은 20개이다.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에 숨겨진 이야기

 죽서루 안의 수많은 시제와 중건기
 죽서루 안의 수많은 시제와 중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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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층의 기둥을 돌아 2층 누각으로 올라간다. 2층 누각은 남쪽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남쪽으로 바위가 있어 바로 2층 마루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루에 들어가기 전 건물을 보니 남쪽 면이 세 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가운데 칸 위로 죽서루라는 힘찬 글씨가 보인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대 죽(竹)자에서 대나무가 솟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이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천정 서까래에 수많은 시제들과 현판 그리고 중건기가 걸려 있다. 시제는 고려 후기 대문장가인 이승휴부터 조선 정조 임금의 어제시까지 17점쯤 되고, 현판은 미수 허목과 이성조의 글씨 등 5점이나 된다. 중건기는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로부터 1991년 삼척시장 김광용이 쓴 것까지 6점이나 된다.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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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의 역사를 기록한 글 중에서는 미수 허목의 <죽서루기>가 단연 압권이다. 그것은 미수 선생이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며 또 서예가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후기의 명재상이었던 미수 허목(1595-1682)은 헌종 3년(1662) 이곳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썼다. 그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관동지방에 8경이 있으며 그 중 죽서루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둘째 죽서루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큰 시내와 깎아지른 절벽, 울창한 숲과 사람 사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죽서루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쪽 풍경
 죽서루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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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죽서루의 역사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조선 태조 3년(1403) 부사 김효종이 폐허 위에 누를 세웠고 세종 7년(1425) 부사 조관이 단청을 해 올렸다. 그런데 삼척시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 미수 허목이 김효손(金孝孫)을 김효종(金孝宗)으로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김효손이 태종 2년(1402) 정월에 삼척부사로 부임해서 태종 4년(1404) 2월에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서루는 누각 아래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누구의 글씨가 가장 좋은가?

미수 허목은 지방관으로 삼척에 와서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1660년(현종 1) 9월 노론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삼척부사로 내려간다. 이듬 해 1월 향약을 제정하고 리(里) 단위의 협의체인 이사(里社)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타산(頭陀山)과 동해 바다를 유람한 후 동해송(東海頌)을 지었다. 1662년(현종 3)에는 삼척의 모든 것을 담은 척주지(陟州誌)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미수 허목은 파직되어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간다.

 미수 허목이 쓴 제일계정(第一溪亭)
 미수 허목이 쓴 제일계정(第一溪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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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은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앞에 언급한 현판 중 하나인 '제일계정(第一溪亭)'을 썼고 <죽서루기>를 찬했다. 그런데 '시냇가에 있는 첫째가는 정자'라는 뜻을 가진 이 제일계정이라는 글씨가 정말 좋다. 여러 군데서 미수의 글씨를 봤지만 이처럼 호쾌하면서도 유려한 글씨체를 본 적이 없다. 누가 이걸 60대 중반 노인의 글씨로 보겠는가! 문장이면 문장, 글씨면 글씨, 정치면 정치, 못하는 게 없는 양반이 미수 허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곳에는 미수 허목의 편액 외에도 네 개의 편액이 더 있다. 숙종 36년(1710) 삼척부사였던 이성조(李聖肇)가 쓴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편액이다. 이 역시 행서체로 아주 잘 쓴 글씨이다. 이들 두 현판에 공통으로 보이는 루(樓)자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이성조가 쓴 제(第)자와 허목이 쓴 제(第)자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쓴 루(樓)자는 꽤나 다른데 다른 사람이 쓴 제(第)자는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글씨의 묘미라고나 할까?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죽서루 편액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죽서루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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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관동제일루 편액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관동제일루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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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필자를 알 수 없는 '죽서루' 현판이 남쪽 입구에 있는데 아주 단정하다. 이 정도는 한자 공부를 조금만 한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다. 또 하나의 편액은 동쪽 한 가운데 있는 이성조의 '죽서루' 편액 옆 칸 안쪽에 있는데 글씨체가 상당히 특이하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라고 적힌 이 편액은 헌종 3년(1837) 삼척부사였던 이규헌(李奎憲)이 쓴 것이다. 해선유희지소라면 바다의 신선이 노닐던 장소라는 뜻이다. 바다의 신선이 와서 놀 정도로 죽서루의 경치가 좋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 글씨체에 대해서는 좀 더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할 것 같아 전문가에게 물어보아야겠다. 그러나 두터움과 얇음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다른 작품에 비해 격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 같다.       

송강 정철이 노래한 죽서루

 죽서루 남동쪽의 용문바위
 죽서루 남동쪽의 용문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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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를 나와 우리 일행은 용문바위를 살펴본다. 죽서루 남동쪽에 있는 바위로 용문이라고 음각한 글씨와 성혈흔적이 남아있다. 성혈이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선사시대의 유산으로 고인돌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용문바위에는 문에 해당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오십천의 용이 승천하면서 이 바위를 뚫고 지나가 생겨났다고 한다.

죽서루 서북쪽으로는 1991년 2월에 세운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그의 <관동별곡>에서 죽서루를 노래했기 때문에 이곳에 표지석이 서게 되었다. 8각형으로 된 비석에는 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비로 인해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옛 사람이 그린 죽서루: 오십천과 태백산이 보인다.
 옛 사람이 그린 죽서루: 오십천과 태백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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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별곡은 선조 13년(1580)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지방을 여행하며 쓴 가사이다.

"진쥬관 듁셔루 오십쳔 나린 믈이/ 태백산 그림재랄 동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한강의 목멱의 다히고져/ 왕뎡이 유한하고 풍경이 못 슬믜니/ 유회도 하도 할샤 객수도 둘 듸 업다."

자연풍경 묘사, 왕과 서울에 대한 그리움, 객지에서의 감회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을 요즘 식으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진주관(삼척) 죽서루 오십천 흘러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한강변 남산에 닿게 하고 싶구나. 왕명에 따른 여정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나지 않으니, 그윽한 감회가 많기도 하고 나그네의 시름은 둘 데가 없구나."

죽서루기(竹西樓記)
미수기언(眉叟記言) 제13권 원집(原集) 중편 동우(棟宇) 조

 미수 허목의 82세 때 모습
 미수 허목의 82세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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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중에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이니, 즉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와 해산정(海山亭), 수성(䢘城)의 영랑호(永郞湖),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명주(溟州)의 경포대(鏡浦臺), 척주(陟州)의 죽서루,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인데, 관광하는 자들이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해변에 위치한 주군(州郡)들이 대관령(大關嶺) 밖은 동으로 큰 바다를 접했으므로 그 바깥은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 떠올라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 데는 모롱이진 큰 소[大澤], 또 어떤 데는 불거진 기이한 바위, 그리고 또 어떤 데는 우거진 깊은 솔밭으로 되어 있어, 습계(習溪) 이북으로 기성(箕城) 남쪽 접경까지 7백 리는 대체로 다 이러하다.

유독 죽서루의 경치만이 동해와 마주하여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과 태백산(太白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짙은 이내 속으로 바위 너설이 아스라이 보인다. 큰 시내가 동으로 흘러 꾸불꾸불 50리의 여울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맑은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별구(別區)의 아름다운 경치는 큰 바다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관광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고을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아도 누를 어느 시대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명(皇明)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3)에 부사(府使) 김 효종(金孝宗)이 폐허를 닦아 누를 세웠고, 홍희(洪煕) 원년(1425, 세종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올렸다. 그 뒤 46년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2)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했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25)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중축했다.

또 그 뒤 61년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太宗) 영락 원년 계미(1403)에서부터 청주(淸主) 강희(康煕) 원년 임인(1662, 현종3)까지는 260년이 된다. 옛날에 누 밑에 죽장사(竹藏寺)란 절이 있었는데, 누 이름을 죽서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이상을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삼는다."

東界多名區。其絶勝八。如通川叢石亭,高城三日浦海山亭,䢘城永郞湖,襄陽洛山寺,溟州鏡浦臺,陟州竹西樓,平海越松浦。遊觀者獨稱西樓爲第一。何也。蓋濱海州郡關嶺以外。東盡大海。其外無窮。日月迭出。怪氣萬變。海岸皆沙。或匯爲大澤。或矗爲奇巖。或鬱爲深松。自習溪以北。至箕城南境。七百里。大體皆然。獨西樓之勝。隔海有高峯峭壁。西有頭陀,太白。巍峨巃嵸。浮嵐積翠。巖岫杳冥。大川東流。屈折爲五十瀨。間有茂林墟煙。至樓下。層巖蒼壁千尋。淸潭脩瀨。灣洄其下。西日。綠波潾潾。澹灎巖壁。別區勝槩。與大海之觀絶殊。遊觀者其樂此而云云者耶。考官府故事。樓不知作於何代。而至皇明永樂元年。府使金孝宗。修廢墟起此樓。洪煕元年。府使趙貫。施丹雘。其後四十六年成化七年。府使梁瓚。重修之。嘉靖九年。府使許確。增作南檐。又其後六十一年萬曆十九年。府使鄭惟淸。復重修之。自太宗永樂元年癸未。至淸主康煕元年壬寅。爲二百六十年。樓下。古有竹藏古寺。樓有竹西之名。蓋以此云。仍誌之。以爲竹西樓記。(한국 고전번역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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