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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주 : 칸티. 제 친구의 이름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인도 사회의 달리트들에게는 달리트를 달리트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첫 출발점입니다. 반대로 보면 각자의 이름이 아닌 카스트로 호명하는 것, 이것이 'untouchability(불가촉성)'의 시작이지요.

 

개인으로서 정체성은 카스트 제도에 기반을 둔 달리트라는 정체성에 의해 사물이 되고 집단이 되어 사라집니다. 카스트로 호명하여 그의 천한 신분을 확실히 각인시킨 뒤, 달리트들에게 차별과 폭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호명에 의한 억압에서 끔찍한 살인에 이르기까지, 불가촉성과 차별의 스펙트럼은 측정할 수 없게 넓습니다.

 

칸티는 제가 파키스탄과 접한 인도 중서부의 구자라트에서 달리트들에 관한 현장조사를 실시하는 동안 함께 일해준 친구입니다. 몇 달 동안의 조사를 끝내고 난 어느 날, 또 다른 인도인 친구와 함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칸티는 처음엔 영어로 말하다가, 지난 시절 당한 차별로 인한 설움 끝에 울면서 힌디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절절한 사연은, 제 목소리보다는 칸티의 목소리로 직접 전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래는 칸티의 목소리로 전하는 달리트의 삶에 관한 두 편의 이야기 중 2편입니다.>

 

달리트 주제에 감히?

 

1988년 인도 정부는 우리 마을 달리트들에게 식량 배급 상점을 운영할 허가권을 할당해주었어요. 아버지는 고작 초등 4년 교육밖에 받질 못해서 행정 공무원이었던 삼촌이 그 신청서를 작성했죠. 그 때부터 아버지는 우리 마을에서 식량 배급 상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우리 가족이 더욱 가난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당시 가족의 유일한 수입이라곤 마을의 상층카스트네 논에서 일해서 받는 게 전부였어요. 그것도 1년 내내 하는 게 아니었지요. 아버지가 상점 운영 허가권을 받게 된 뒤부터 더 이상 논일을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매일 저녁 늦게까지 상점을 열어야 했죠.

 

논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이젠 없어졌어요. 그 전엔 아버지가 어머니·할머니·누이들을 데리고 논일을 하러 다니셨어요. 아버지가 가장이었는데, 여자들이 가장 없이 여기저기 논일을 하러 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결국 다른 가족들의 논일도 전에 비해 줄어들게 되었어요.

 

식량 배급 상점은 한 사람만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은행에서 대출을 해서 가게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투자하셨어요. 대출금이 너무 많아서 혼자서 갚기엔 역부족이었어요. 아버지는 상점 운영을 위해 다른 동업자가 필요했어요. 삼촌 중의 한 분이 그 역할을 해주구요.

 

상점에서 나오는 이익은 충분하지가 않았고, 그 이익금은 이후 10년 동안 상점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재투자되었어요. 이 10년의 기간이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가 되었어요. 실질적으로 상점을 운영해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가족들의 논일만 줄어든 셈이었죠.

 

아무것도 없었어요. 게다가 당시 나는 학교에서 공부했으니 가족들이 내 교육비도 감당해야 했어요. 상점이 운영되면서, 마을에서 식량배급 카드를 소지한 사람들의 절반이 구매 상점을 변경하는 신청서를 제출했어요. 달리트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식량을 구매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점의 구매자가 상당히 줄어들고 말았어요.

 

마을의 이장은 상층카스트 출신이었어요. 이장은 고의로 식량배급 카드 소지자들의 등록 상점을 변경했어요. 카드 소지자들은 어느 상점에 가서 식량을 사야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죠. 그들은 아버지에게 불평하기 시작했어요. "어이, 너 나를 속이고 있는 거지? 내 이름이 여기에 등록되어 있지 않잖아." 처음 배급카드 소지자들의 이름은 아버지 상점구매자로 등록이 되어있었는데 어느 날 등록되어 있지 않은 걸 보고 아버지가 그들을 속였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사실은 이장이 변경한 것이었는데.

 

아버지와 삼촌은 상점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절차나 운영 방식을 몰랐어요. 이장이 실제로 뭘 하는 것인지 그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 서류를 작성해주신, 마을의 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삼촌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계셨죠. 그러나 삼촌은 공무원인지라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장이 하는 일이 그릇된 일이라는 걸 공개적으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상층카스트인 이장이 두려웠고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아버지와 삼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갔어요.

 

상점을 운영하는 상반기 동안 우리는 정말 여러 난관에 부딪혔어요. 달리트는 상점을 운영해서는 안 되었던 거죠. 이 일도 지금까지는 상층카스트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어요. 상층카스트들은 달리트가 식량배급 상점에 대한 허가권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달리트들에게 허가권을 일정하게 할당하는 건 정부의 정책이니까요. 그래서 상층카스트들은 상점을 운영하는 달리트들을 방해해서 결국 운영을 힘들게 만드는 거지요.

 

대학의 방학이면 집에 돌아와 지냈어요. 집에 있으면서 가족들과 함께 논일을 나갔어요.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논일을 해도 집에 음식은 충분하지 않았어요. 우린 너무 가난했어요. 집에는 마실 물과 딱딱한 로티(인도식 납작보리빵)가 전부였어요. 불평을 할 수도 없었어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요.

 

마을의 달리트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다

 

대학 숙소에서 달리트 출신 학생들과 함께 우리의 문제와 관련해 일하고 있었을 때 마을에서 사람들이 우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우리와 함께 고소장을 작성하고 청원서를 준비했어요. 상층카스트 사람들은 우리가 활동을 못하게 협박했지만 숙소는 안전했어요.

 

사람들과 함께 고소장이나 청원서를 작성할 때 나브사르잔(Navsarijan Trust, 비폭력 방식과 법률 구조를 통해 달리트 권익을 보호하는 단체로 1989년 설립됨) 설립자인 마틴 맥완의 글을 읽게 되었어요. 내가 이미 달리트를 위해 일해야겠다고 결심한 때였죠. 사회봉사를 위한 일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더 이상 대학의 시험에 신경을 쓰지 않았죠. 공부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 제 본업이 되었어요.

 

1993년 즈음 거의 공부를 그만뒀죠. 내가 속한 달리트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열정에 타올랐어요. 마틴 맥완의 글을 읽고 나서 난 그를 찾아갔어요. 그리고 물었죠. "내가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을까요?" 1998년 나는 나브사르잔에 가입했고 마을에서 인권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이론에서 실천으로

 

내가 처음으로 맡게 된 일은 데발리야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어요. 그 마을 달리트 공동체를 위한 수도관에 관한 사건이었죠. 달리트들이 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같은 마을의 상층카스트들이 그 수도관을 잘라버린 거예요. 난 마을의 달리트들과 함께 싸웠어요. 그러자 상층카스트 사람들이 보이콧을 강행하기로 결정했지요. 이 문제는 거의 3~4년 동안 지속되었어요. 나는 달리트들과 함께 고소문을 작성하고 집회를 조직했어요. 외부에서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사하고 갔죠. 이 싸움은 구자라트 전체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었어요.

 

어느 날은 중앙정부의 정보과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우리를 방문했어요. 그들 중 한 사람이 저와 같은 달리트 공동체 출신이었어요. 몇 가지 조사를 한 뒤, 그는 내게 델리에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제안했어요. 그가 내게 국가인권위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었어요. 가능하면 빨리 청원서를 제출하라고 했어요.

 

우리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했고 위원회는 우리 손을 들어주었죠. 인권위원회의 권고안은 무려 21페이지에 달했어요. 인권회가 권고안을 제시하더라도 대개는 간략하게 보내거든요. 우리는 이 권고안을 공공 문제에 관한 사건으로 고등법원으로 가져갔어요. 고등법원은 실제로 인권위원회의 권고안에 모두 찬성해주었죠.

 

이 일을 통해 어떻게 달리트들의 권리를 위해 일해야 할지, 보통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법기관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지 배우게 되었어요. 마틴이 또한 나와 같은 인권활동가들에게 정기적으로 강연을 했어요. 달리트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과 필요한 수단들에 대한 것들이었어요. 모두 다 달리트들이었어요. 마틴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론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기회를 갖게 된 거에요. 그건 성공적이었어요.

 

두려움과 용기 사이에서

 

가족들은 내가 달리트들을 위해 일하는 걸 두려워해요. 부모님들은 지금도 조심하라고 말씀하시지요. 특히 상층카스트들 조심하라고. 하지만 난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현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카스트 차별이 잘못되었으며 그 차별을 금하고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처음엔 저도 두려웠어요. 하지만 시간이 차차 흐르면서 조금씩 용기를 갖게 되고 결과를 얻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건 불가능해요. 나는 사회의 규범이 가장 열악하고 끔찍한 차별의 형태를 내재하고 있는 사회 환경 속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러한 규범에 완전히 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차별이란, 우리가 그것이 현존한다는 걸 모르는 한 그 속에서 상대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녀석이죠. 그러나 일단 우리 자신이 차별을 당하게 되면 더 이상 편안함 잠을 이룰 수 없게 돼요. 그건 그 안에서 나와서 우리를 불태우는 내적 불덩이 같은 거예요. 나는 내 안에 있는 그 불덩이를 끄집어내서 다른 이들에게 비추려고 하고 있어요. 그들도 나처럼 불덩이를 끄집어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언젠가 그 불덩이들이 카스트 제도를 태워 없애버리도록. 3천년 동안의 카스트 억압은 2008년 오늘날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폭로될 거예요. 이게 정보 소통의 힘이지요. 정보 소통은 지식이에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열쇠이지요.

 

사회에 대한 싸움은 집에서부터

 

우리 공동체에서는 15세나 18세가 되면 결혼을 해요. 난 이런 결혼 관습에도 싸웠어요. 난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서른두 살까지 싸웠는데, 우리 집안에서, 특히 부모님들이 정말 반대가 심했어요.

 

부모님들은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모든 일들에 반대하며 싸우는 아들이라고. 결혼도 하려 하지 않는다고. 내 남동생은 말했죠. "형이 결혼하지 않으면 나도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가족으로부터 압박이 심했어요. 결국 결혼하기로 결정했죠. 우리네 관습처럼 결혼할 상대를 고르거나 집안을 보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나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면 그냥 결혼해야지 생각했거든요. 아내는 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만 공부했어요. 난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사는 게 행복하답니다.

 

장인은 부모님들께 불만이 많으세요.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아들더러 달리트 인권 관련된 일을 그만두게 해. 늘 군수나 이장, 파텔(상층카스트), 다바드(상층카스트)들하고 싸우기만 하잖아. 모든 사람들하고 싸움만 하고 있네. 우리 딸과 애들도 돌봐야하는데 다른 사람들하고 싸우고만 있으니. 만일 뭔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내 딸은 어찌해?"

 

사람들은 몰라요. 우리 달리트 공동체 대부분은 마을 의회에서 일하는 관료들과 직접 말할 용기가 없어요. 나는 구자라트 주 정부의 관료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질문도 하고 논의도 해요. 이게 바로 교육과 지식의 힘이지요.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 사는 내 개인적인 생활은 안전하지 않아요. 나는 현재 구자라트의 대도시인 아흐메다바드에 살고 있고, 아내는 여전히 내가 살았던 마을에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함께 살면 좋겠는데, 아내에게 도시는 위험하고 낯설지요. 내 싸움의 대상인 상층카스트들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내가 도시에서 가족들과 함께 따로 산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요. 내게 복수를 하려고 가족들을 공격할지도 모르지요. 그게 인도 사회의 경찰과 사법 제도이지요. 우리들을 보호하지 못하지요. 그런 면에서 내 가족들은 마을에서 사는 게 훨씬 안전해요. 아이들도 너무 어리고.

 

나는 나브사르잔에서 일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구자라트 주 전체를 관할하는 간사가 되었어요. 처음에 마을 단위의 활동가였는데. 가장 풀뿌리 활동가가 마을 단위 활동가이고, 그 다음이 지역활동가(district), 몇 지역을 통합해서 관할하는 활동가, 그리고 주 전체를 담당하는 활동가가 있어요. 난 마을 활동가에서 바로 주 전체를 담당하는 활동가로 '급승진'한 셈이지요.

 

단지 인간으로서 살기

 

우리가 하는 일의 핵심은 달리트들과 같이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우리는 인간이니까 스스로 생활할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훈련도 받아야 하는 거구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카스트가 사회에 끼치고 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향에 관한 연구는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많은 책이나 자료들은 표면에 불과해요. 그래서 나브사르잔과 같은 단체들이 그 중간의 간극을 채우는 거지요. 사람들이 동등하며 서로 동등하게 대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일이며 우리 자신의 삶이지요.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일어설 거예요. 카스트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대를 만들어낼 겁니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도 자라고 한 세대 두 세대가 흐르면 우리의 일이 카스트에 의한 차별과 폭력을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인도가 시작된 곳, 카스트가 시작된 곳에 그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거지요. 그렇게 될 겁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태그:#달리트, #카스트, #나브사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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