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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조선일보>. 22년 전 난 <조선일보>를 열심히 배달했다.
 2008년의 <조선일보>. 22년 전 난 <조선일보>를 열심히 배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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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신문 구독자는 안 보겠다는데 지국에서는 강제로 신문을 넣으라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총무님! 0동 000호 '왜 자꾸 신문 넣느냐'고 오늘도 욕먹었어요."
"그러니까, 걸리지 않게 조심했어야지. 그냥 계속 넣어."
"그래도 그렇지, 하루 이틀 욕먹는 것도 아니고… 이젠 못 넣겠어요."
"뭐야? 이 녀석이. 무슨 수를 쓰든 집어넣어. 안 그러면, 알지?"

그랬다. 신문배달을 시작한 지 며칠 안 돼 세상물정을 모르던 그땐, 배달만 하는 내가 왜 중간에서 이래저래 욕을 먹고 구박을 당해야 했는지 영문을 몰랐다.

'<조선일보> 절대사절' vs. "그냥 계속 넣어"

1986년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운동을 하며 용돈도 벌 겸, 동네 아는 형을 따라 <조선일보>를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신문배달은 새벽 4시 30분경 지국을 출발해 아파트 단지를 다 돌고 나면 오전 6시 무렵에야 끝났다.

가뜩이나 잠이 부족한 나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큰 고통이었다. 또한 170여부 정도의 신문다발을 한 팔 가득 옆구리에 낀 채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눈을 뜨는 일과 묵직한 신문의 무게는, 인내력을 기르고 운동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나마 견뎌낼 수 있었다.

정작 힘든 건, "안 본다는 신문을 왜 강제로 넣느냐"는 구독자의 '절대 옳은 항의'를 받으면서도 "무조건 신문을 넣고 오라"는 총무의 '절대 이해 못 할 강요'를 따라야 했던 것이다. 당시 아파트 현관문에는 이런 문구를 적은 안내물들이 많이 붙어 있었다(이는 거의 모든 신문이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 절대사절'
'신문 절대! 절대! 절대사절! 신문 넣다 걸리면 죽음'
'신문사절! 이전 구독자 이사 갔음'

강제로 배달을 하다가 새벽잠을 깨고 불침번을 서던 구독 거부자와 마주칠 때면, 실제로 "야, 이 XX야, 신문 안 본다잖아" 등 갖은 욕설을 들어야 했다. 넣지 말라는데 악착같이 넣고선 구독료를 달라고 하니 화가 안 나겠는가마는, 극성스런 몇몇 이들을 제외하곤 이른 새벽 아파트 현관문 앞이나 부엌 창문 틈에 신문을 몰래 놓고 줄행랑을 놓으면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다. 그 다음은 총무가 알아서 했으니까.

신문 강제 투입에 경쟁 신문 구독자 빼앗기

나는 한두 달 월급을 받고 나서야 배달하는 신문 부수와 급여액수가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신문배달 아르바이트 비용이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신문 1부의 월구독료가 3천원이 조금 안됐는데, 1부를 확장할 때마다 3천원 안팎의 성과급이 붙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 급여를 대충 3~4만원(?) 전후라고 봤을 때, 신문 1부에 따른 성과급은 물리치기 어려운 액수였다.

그 당시 구독자의 '신문사절'을 무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신문을 강제로 투입하며 부수를 확장하기도 했다. 내가 일하던 지국의 경우, 아파트 동별로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 집들을 골라 무작정 신문을 넣었는데 그런대로 효과가 좋았다. 강제로 넣은 지 한 달이 지나면 총무님은 자연스레 그 집들을 방문해 이런저런 유인책을 내놓았다.

"<조선일보> 보시죠? 수금하러 왔습니다."
"예? 신문 넣으라고 한 적 없는데요?"
"아, 그래요? 배달 학생이 실수를 했나…. 그럼, 학생 노력도 있고 하니 6개월 무료로 넣을 테니까 이참에 <조선일보> 좀 구독하시죠?"

이야기가 잘 되면 구독계약이 이뤄졌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한 달 치 구독료를 챙겼으며,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안 넣으면 그만이었다. 총무님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나는 매달 몇몇 집들을 골라서 모른 척 신문을 넣었다. 지국에서 신문 10여 부를 여분으로 챙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뿌린 신문은 짭짤한 성과급으로 돌아오곤 했다.

신문 부수를 확장하는 데에는 다른 신문의 구독자를 빼앗는 방법도 있었다. 배달원들끼리 서로 다른 신문들을 빼 가며 배달사고를 일으키는 몰상식한 방법이었다. 서너 차례의 배달사고는 곧, "신문이 제 때 안 와서 못 보겠다"는 구독자의 불평전화와 함께 '신문사절'로 이어진다. 구독신문을 바꾸는 것은 당연한 수순.

강제구독과 구독자 빼앗기도 그랬지만, 월요일에 신문을 돌리는 일도 곤혹스러웠다. 월요일에는 학원 홍보물과 같은 전단지의 가짓수가 늘기 때문에 전단지를 신문에 끼워 넣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평소보다 신문도 무거워 배달 시간이 지연되기 일쑤였다.

<조선일보> '모범 배달원 상' 수상한 나를 부러워했던 학생들

운동 삼아 몇 달만 하리라던 신문배달은 급여를 받는 재미가 더해져 1년 정도를 계속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조선일보> 본사에서 수여하는 '모범 배달원상'을 수상, 5만원(?)의 장학금을 받으며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년씩이나 <조선일보>를 배달했던 나는 정작 <조선일보> 1면조차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어렸던 것도 이유겠지만, 그 당시 신문은 내게 '정보와 새로운 소식이 가득 담긴 그 무엇'이라기보다 그저 '운동을 하고 용돈을 버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배달을 하러 가며 탔던 버스의 요금은 운전기사에게 신문 1부를 건네면 됐고, 우유배달 아저씨와는 신문 1부와 우유 1개를 주고받으면 됐다. 또 주말을 이용해 신문 구독료를 수금하러 돌아다니다 보면(지국에서는 수금이 잘된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을 이용했다) 인심 좋은 집에서 우유며 과자 등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신문 확장 성과급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신문의 부수는 곧 돈이라는 건, 지국 운영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신문강제투입과 구독자 빼앗기가 대표적이었고, 그 외 전단지도 신문에 끼워 넣는 수량에 따라 금액에 차이가 났다.

<조선일보> 티셔츠, 땀 흘린 대가... 뿌듯했었다

이제 구독을 위해 던지는 미끼가 '0개월 무료'에서 '자전거 경품'으로 바뀌었다. 지난 2003년 1월 20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동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자전거 신문 판촉사원들이 트럭에 싣고 온 자전거를 내리는 모습.
 이제 구독을 위해 던지는 미끼가 '0개월 무료'에서 '자전거 경품'으로 바뀌었다. 지난 2003년 1월 20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동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자전거 신문 판촉사원들이 트럭에 싣고 온 자전거를 내리는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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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조선일보>'라는 글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배달하는 것이 자랑스러웠었다. 독자들에게 '따끈따끈한 정보'를 배달한다는 자부심은 아니었더라도, 졸린 눈을 비비며 땀 흘려가면서 노동한다는 것은 큰 보람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했다는 것이 뿌듯했었다.

하지만 지금이었더라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자문해 보면 '절대 아니다'는 부정만이 떠오른다. '정보를 다루는 신문의 기능'을 알기 때문이다. 신문사절을 무시하며 강제로 투입하는 등 운영방식이야 그 땐 모두 신문사들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 건 이미 신문으로서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흘렀다. 그런데 당시나 지금이나 <조선일보>의 운영방식은, 구독을 위해 던졌던 미끼가 '0개월 무료'에서 '자전거 경품' 등으로 바뀌었을 뿐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많은 비정규직 신문배달원들의 땀을 바탕으로 유지하는 신문, 발행 부수가 가장 많아 광고단가가 제일 높다는 신문, 강제투입과 신문사절 무시 등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신문.

2008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20여 년 전 나처럼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어둠을 뚫고 신문배달을 다녀왔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신문을 배달하고 있을까?

오늘에서야, 기억에서 잊히던 <조선일보> 배달 아르바이트를 떠올리며 나는 몸서리를 쳤다. 1986년도에 내가 땀 흘리며 발품을 팔며 수업시간에 조는 것도 감수하며 돌렸던 <조선일보>에는, 내가 제대로만 알았다면 배달하지 않았을 기사들이 많이 있었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기사 입니다.



태그:#신문배달, #조선일보, #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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