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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구두 한 번 닦아 볼래?"
"네? 무슨 구두요?"
"너 아르바이트로 청소시간에 선생님들 구두 한 번 닦아 볼 거냐구."

고1 때,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날 불러 대뜸 구두를 닦아보라고 권유를 했다. 그 권유에 난 거절 비슷한 말도 못하고 친구와 함께 청소시간마다 선생님들의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나의 첫 알바는 구두닦이였다

가난한 시골 학생이었던 난 작은 도시로 유학(?)을 갔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 품에서만 머물렀던 시골 촌놈의 첫 도시 생활은 하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숙 생활은 여섯 달을 넘기지 못했다. 몇 몇 친구들끼리 어울려 부모님 몰래 자취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집에선 하숙비를 받아 자취를 하는 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하숙비란 게 얼마 못 갔다. 누가 훔쳐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라도 한 잔 하다보면 금세 떨어졌다. 그래서 가난한 내 호주머니는 늘 비어있었다. 그렇다고 뼈빠지게 뙤약볕에서 허리 구부리고 농사짓는 부모님한테 돈을 달라는 용기는 더욱 없었다. 그러던 차에 담임선생님이 구두닦이 아르바이트를 권한 것이다.

7교시 종이 땡땡땡 치면 친구와 난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수거하고 건물 귀퉁이 한 쪽에 가서 침을 퉤퉤 받으며 구두를 닦았다. 친구와 둘이 구두 닦는 모습을 본 친구들은 지나가며 "야! 찍새는 누구냐?" 하며 놀리고 가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반들반들하게 닦아라. 알았어?" 하며 실실 웃고 지나갔다.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와 난 구두 닦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야, 쪼깨 쪽팔린다 야."
"임마, 쪽 팔린 게 대수냐. 엽전 한 냥이 귀한 판인디."
"그래도 이게 뭐냐. 우리 엄마가 아들놈 학교 가서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구두나 닦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생각만 해도 끔찍허다."
"그래도 별 수 있냐. 돈이 죄지."

그렇게 한 달 동안 손가락이 아프고 반들반들 할 때까지 구두를 닦고 받은 돈이 2만 원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구두 닦아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왠지 모를 뿌듯함이 복합적으로 물안개처럼 밀려왔다.

아무튼 나의 첫 알바인 구두닦이는 4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돈도 필요해 더 할 수 있었지만 한 마디로 얼굴 팔려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알바는 입주 과외선생이었다

고1이 끝나갈 무렵 나의 거짓 하숙생활은 발각되고 말았다. 나의 실체를 알고 난 후 부모님의 반응은 짠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니 굶지 말라고 하숙시켜 준 게 먼 놈의 자취한다고…. 니 그동안 얼매나 곯았으면 요로코롬 삐쩍 가물어 버렸다냐. 쯧쯧."

이 말에는 충분히 돈을 대주지 못하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2학년에 올라와서도 난 하숙 대신 자취생활을 선택했다. 물론 이번에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말이다.

다시 시작한 나의 자취생활은 먹다 굶다의 반복이었다. 어떨 땐 쌀이 떨어져 미숫가루와 라면만으로 1주일을 견딘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2학년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교무실로 날 불렀다. 그때가 5월쯤으로 기억된다.

"너 힘들지?"
"네?"
"너 내가 소개해주는 집에서 과외 한 번 해 보거라."

과외라니? 난 솔직히 과외란 게 뭔지도 몰랐다. 학원 근처에도 얼씬거린 적이 없는 촌놈이 과외란 말을 들어본 적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과외가 뭔데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촌놈의 무식만 탄로 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난 또다시 담임선생님의 반 권유와 추천으로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있는 집에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알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내가 받은 알바비는 수업료와 먹고 자는 것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나의 알바 생활은 12월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로 그때 당시는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아 모든 과외를 금지했던 시기였다. 당시 과외를 하다가 적발되면 무시무시한 처벌까지 감수해야 했던 시절 난 먹고 자면서 내 공부 하랴 주인집 아이들 공부 돌봐주랴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은 몸에 병까지 들어버렸다. 신경을 너무 쓴 탓인지 위장병이 걸렸고 나중엔 검은 변까지 봤다.

몸이 아파서야 난 그 집을 나올 수 있었다. 그때 난 알았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을. 그런데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지 난 지금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세 번째 알바는 잡상인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내가 한 알바는 여러 가지이다.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했다. 모래차에 삽으로 모래를 실어주는 일도 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 같은 아르바이트는 도매점에서 칫솔, 치약, 때타올, 비누, 수세미 같은 것을 떼어 팔았던 잡상인이라 할 수 있다.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친구와 난 휴가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일반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구입하여 팔기로 했다. 친구와 난 2만 5천 원씩 투자하여 5만 원어치의 물품을 도매점에서 구입했다. 우리가 파는 판매 가격은 구입한 가격의 3배였다. 그래도 시중 가격보다는 싼 가격이다.

물품을 구매하고 다음날 친구와 난 커다랗게 끈 달린 가방에 수세미, 칫솔, 치약 등을 가득 넣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러 다녔다. 그런데 장사가 잘 되었다. 방문한 집마다 물건을 팔아주었다. 주로 시골집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는데 첫날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조금은 가벼워진 가방을 어깨에 메고 친구 집에 오며 우리는 들뜬 말을 주고받았다.

"야, 오늘처럼 팔면 본전 뽑고 10만원 정도 남는 거 아냐. 이러다 우리 부자 되는 거 아닌 가 모르것다."
"흐흐, 부자는 그렇고 여행비는 충분히 뽑고 남겠다. 내일도 잘 돼야 할 텐데."
"암튼 우리 오늘 애 썼은 께 집에 가서 톡 쏘게 목이나 축이자 야."

그러나 우리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단 하루만의 행운에 그친 것이다. 김치국을 너무 일찍 마셨는지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발이 부르트도록 "수세미 사세요" "칫솔 치약 있어요" 해도 첫날의 십분의 일밖에 팔지 못한 것이다. 물건이 팔리지 않자 우리도 지쳐갔고 결국은 다 팔지도 못한 채 아르바이트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거창한 휴가계획도 가까운 바닷가에 당일치기로 가는 걸로 끝나버렸다.

이 글을 쓰고 있으려니 수세미 칫솔 치약 등을 함께 팔러 친구가 그리워진다.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 하다가 서른여덟의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세상을 떠날 무렵 친구의 딸은 여섯 살이었다.

황소만한 덩치에 몸 생각한다며 커피 대신 요구르트를 마셨던 친구. 물건을 팔기 위해 "니가 먼저 들어가라. 니가 먼저 들어가라" 서로 실갱이 하고 쭈볏거리다 마주보고 웃어버렸던 친구. 지금 덧니 위로 싱겁게 웃었던 그 친구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의 추억 응모>



태그:#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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