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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촛불집회 모습
▲ 7월 5일 촛불집회 모습 7월 5일 촛불집회 모습
ⓒ 양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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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촛불논쟁 특집기사 '거리정치인가 정당정치인가?' 여섯번째 순서로 14일 구영식 기자가 김원 박사의 주장을 '아직도 진보정당 실험할 게 남아있나'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김원 박사의 주장 가운데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어 글을 쓰게 되었다.

'거리정치'와 '정당정치'는 대립하는가?

일단 그의 주장을 검토하기에 앞서 '거리정치'와 '정당정치'를 대립시키는 이분법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이 주제는 촛불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가장 문제 설정이 잘못된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기성 정당정치가 촛불 국면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혹은 한국의 미발달된 정당 체제의 한계가 현재의 국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거리정치'와 '정당정치'를 대립시키는 것은 하나의 특수한 현상을 놓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일명 '거리정치'로 표현되는 대중들의 투쟁이 큰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들의 욕구와 열망을 담아내고 방향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적 틀 자체가 부재했거나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이루어진 현재도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은 여전히 한국 정당 체제의 주요 변수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은 '거리정치'와 '정당정치'의 대립을 부각시켜야 할 때가 아니라 이 둘 사이의 선순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진보적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의 정당 체제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전략 수립이 절실하다.

김원 박사의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

김원 박사가 6월 중순께 발표한 글에서 "아이들의 촛불을 보며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환호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 1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만나 "촛불시위를 주도한 중고생들을 '촛불세대'로 규정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을 보내자고 주문한 것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김 박사는 또 그 글에서 촛불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를 언급하며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다시 인용을 하면 이렇다.

"한 달 전 뉴타운 건설에 열광했던 집단이 갑자기 촛불 속에 자신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한국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거리의 정치가 순간 잦아들면서 일상으로 대중들이 돌아갈 때,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는 다시 강력한 흡인력을 보이며 대중을 빨아들였다. 이 점에서 촛불로 한국 시민사회의 풀뿌리 보수주의가 변화했다고 판단한 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이런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거리정치'의 휘발성을 적절하게 지적했고,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토대의 완고함을 환기시켜주었다. 그는 또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깃발을 내세워 일방통행적인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대중운동으로 전화하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오히려 대중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 거기서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다. 새로운 대중정치 공간의 형성은 진보진영 전체의 과제다. 문제는 어떤 형식이 부여된 어떤 구체적 공간을 매 계기마다 만들 것인가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이 공간과 정당정치 사이의 매개를 확보하는 일이다.

침착하고 냉정하지 못한 결론, '정치적 허무주의'

그러나 김 박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약을 감행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회운동과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이 촛불시위로 분출됐다"며 촛불시위가 한국사회에 두 가지 성찰을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우선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는 더 이상 한국사회의 변화는 기존의 제도화된 정당이나 정당정치를 통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촛불은 촛불이고 제도정치가 시민사회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앞으로 한국사회의 변화는 촛불시위든 거리정치든 대중지성이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기존의 사회운동 패러다임을 고집했을 때 사회운동이 대중과 소통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대중의 호민관'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대중을 이해할 수도 없고, 대중이 복무할 수 있는 언어공간도 확보할 수 없고, 그들을 사회적·정치적 변화의 장으로 끌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대중의 호민관으로서 역할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사회운동 활동가들도 이번 촛불시위에서 그런 점을 학습했다고 본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문제설정과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의 주장은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의 역할이 끝났다는 '정치적 허무주의'로의 퇴행으로 읽힐 수 있다.

그는 나아가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중의 판단과도 부딪힌다. 대중들이 투표와 선거에 참여해 자신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정당정치는 대안으로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앞서 그가 주문한 침착하고 냉정한 시선을 정작 본인이 망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금은 정당정치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할 때가 아니라 정당정치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때다. 정당정치를 강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대중들의 열망을 통제해야 한다거나 의회의 틀로 가두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당정치가 이러한 대중들의 역동성을 흡수하며 정치적 의지를 결집시키는 유효한 틀로 사고되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김 박사의 단정적인 주장은 이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변화를 꾀하는 것과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를 의문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후자는 관념적일뿐만 아니라 공상적이다. 국지적인 시도는 있었을지언정 보편적인 제도가 된 적도 없고, 될 수도 없다.

현대 사회에서 대의제 민주주의 자체와 정당정치를 넘어선 보편적 정치제도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했다. 이는 자본주의를 타도했다고 선언했던 몰락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갈파하며 이를 새로운 형태의 귀족정 혹은 과두정이라고 비판한 <선거는 민주적인가>의 저자 버나드 마넹도 대의제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와 단순 대립시켜 후자를 찬양하며 현실 가능한 정치 프로젝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작년이 87년이 20년 되는 해였다. 좋은 정당, 진보정당의 실험을 더 할 게 남았나? 더 이상 거기에 목을 매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파산 선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나? 대중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문제를 자기문제로 표출하기에는 정당은 너무 낡았다. 그런 것들이 명백한데 계속 (진보)정당에 목을 매야 하느냐? (진보) 정당이 대안이라고 얘기해야 하느냐?"

아직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행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왜 그런가?

먼저 현실의 시대 규정으로부터 출발하자. 바로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포스트 민주주의'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유지되고 자유권에 대한 본질적 침해도 없기 때문에 파시즘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의 기초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정치 체제를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정의하자.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반(反)국민성이 드러나고 있는 역설이 바로 '포스트 민주주의'의 적나라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는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이명박 정부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하는 말일 수 있다.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의 퇴조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의 세계사적 규정이기도 하다.

'포스트 민주주의'의 등장 배경으로는 여러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포디즘으로부터 포스트 포디즘으로의 이행,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로부터 주주자본주의로의 이행, 금융시장자본주의의 전면화, 공공성의 약화 내지 축소, 지구화와 초국적 자본에 의한 국민국가의 역할 축소, 사회 국가의 해체 혹은 약화 경향 등이다.

그리고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가 보여주고 있는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기존 정당 체제의 붕괴, 특수주의와 협소한 이해관계가 지배하고 있는 노조운동, 정치와 경제의 분리 및 경제의 정치화, 정치광고가 지배하는 정치언어, 경제 포퓰리즘 및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 공공연하고 합법적인 로비스트 네트워크의 발달 등.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 저항 또한 새로운 모습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촛불시위에서 그 대표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저항의 핵심 의제가 모든 사회적 의제로 확대되는 경향, 먹을거리 안전을 포함한 안보 개념의 확장과 정체성 담론의 부상, 탈정치의 정치 등이 그것이다.

'탈정치의 정치'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 이는 아직 저항의 형태에 적절한 형식이 부여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 저항이 나름대로 이어지고 발전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정치 현실을 변화시킬 힘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중정치 공간을 더욱 확장하는 것과 함께 이것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구체적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그리고 이것의 중요한 전제는 이명박 식의 우파 대안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넘어 좌파 대안을 창출하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이것을 매개로 새롭게 대중정치를 구성해야 하고, 서로 대안을 향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저항과 대안을 매개할 새로운 정치력 절실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들의 주권의식은 한층 진화했다. 주권의 기초에 대한 정부의 공격과 이에 대한 방어를 통해 주권의식이 급격히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를 적절한 형태로 담보하지 않는다면, 퇴행이 일어날 수 있다.

한편, 지난 7월 5일 대규모 촛불집회에서의 국민승리 선언은 적절한 형식화를 담보하지 못한, 그리고 실제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의 선언으로 자기기만적인 것이었다. 더욱 심하게 말하면, 이는 더 이상의 정치적 형식화가 불가능한 상태에서의 신앙고백에 지나지 않았다. 신앙고백으로는 물질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 다음날부터 우리는 시청광장을 빼앗겼다.

저항과 대안을 매개할 수 있는 정치력이 절실하다. 이것은 우파 혹은 중도파 정당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진보정당이 대중정치 공간을 확장시키고 대안을 창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의 진화된 주권의식과 사회적 의제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정권퇴진을 주장하거나 국민소환제를 도입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들의 거대한 열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고 현실적 경로도 될 수 없었다.

주창자들도 레토릭을 넘어선 구체적인 정치적 주장과 행동을 조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산 쇠고기 3불(안 사고, 안 팔고, 안 먹기) 운동을 부각시키려는 흐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퇴행이다. 소비자운동이 국민주권운동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왕의 전제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로 이용되었던 '마그나 카르타'를 부활시키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촛불시위에서 적극적으로 부각된 6가지 의제(쇠고기, 교육, 의료, 민영화, 방송언론, 대운하)의 요구를 담은 현대 한국판 '마그나 카르타'를 작성해 보자. 촛불시위를 이어가며 각각의 의제에 대한 요구안을 폭넓은 토론을 통해 만들자.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끝까지 압박하자. 그 결과에 따라 촛불시위의 승리를 논하자.

진보정당이 이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진보정당의 실험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정당 체제의 변화를 앞당기자.

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태그:#촛불집회, #촛불시위, #국민주권,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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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정치학 박사.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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