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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이명박, 옆엔 쇠고기. 자, 발차기 시작!"

 

젊고 활기찬 사범의 구령에 따라 태권 소년 소녀들이 차례차례 발차기, 돌려차기, 옆돌기, 앞돌기, 격파 등을 선보였다. '촛불 초딩'들의 태권도 솜씨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대단했다. 마치 손자나 자녀의 장기자랑을 지켜보는 어른들처럼 촛불문화제에 모인 제주시민의 표정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4·3 평화기념관 보러 갔다가 촛불문화제에 푹 빠져

 

제주도의 밤은 조금 더 늦게 찾아온다. 그래서 7시 30분이 되어서야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7시가 살짝 넘어가자 시청 부근 찻길에서는 풍물소리가 신명나게 울려퍼졌다. 촛불문화제가 예정된 어울림 마당까지 풍물놀이를 하며 행진하는 참가자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표정 하나 하나에는 즐거움과 평화가 가득히 묻어났다. 피켓도 정성스럽게 만들어 들고 가는 중이었다. "협상무효, 전면재협상"이라는 구호와 함께 '범국민 승리 선언'을 한 7월 5일 제주의 푸른 밤은 촛불로 밝게 빛났다.

 

서울에서 몇몇 지인들과 함께 4·3 평화기념관 등을 둘러보기 위하여 지난 주말 짧은 일정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나는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아침부터 촛불문화제 시간만 기다렸다. 시청 근처에서 일행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중 시간이 되자 어울림마당으로 먼저 뛰어 나왔다.

 

 

태권 소년·소녀에 이어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어린 꼬마들이 졸래졸래 무대로 나왔다. 아이들에게 노래와 율동을 지도한 교사는 "대한민국에는 아이들에게 본받을 만한 위인으로서의 대통령이 없다"면서, 어른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말하며, 꼬마 천사들과 함께 나란히 섰다.

 

"혼저옵서예"라는 제주도 말로 시작된 노랫말이 한양 손님을 온 마음으로 반겨주고 안아주는 듯 하여, 기분이 들썩들썩 흥분되었다. 마이크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고 큰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사내 아이의 돌출행동과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는 옆의 형, 그리고 꿀밤을 몇 대 맞고서도 좋다고 웃기만 하는 어린 영혼들의 모습 하나 하나가 곧 평화공동체 그 자체였다.

 

"선장이 잠에서 깰 때까지 촛불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어 지난 6월 27일 엄청난 탄압 이후 꺼져가던 촛불에 종교계가 다시 힘을 실어주었던 것처럼 제주도에서도 불교계, 기독교계 등에서 적극적으로 발언에 나섰다. 한 스님은,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한 뒤, "안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지요?"라며 대한민국 정치의 현재를 '선장이 잠자고 있는 상태'에 비유했다.

 

그는 선장도 잠자고 승객도 잠자고 있을 때 어린 학생들이 촛불을 들었고, 그제서야 승객들도 조금씩 깨어나는데 선장은 여전히 잠을 깰 줄 모른다고 비판했다. 지금까지의 촛불은 선장을 깨우기 위한 준비단계였을 뿐이니 선장이 깨어날 때까지 계속 깨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노래패와 율동패의 힘찬 문화공연으로 촛불문화제는 한층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중앙로까지 행진하는 동안 끝까지 화기애애하고 비폭력 평화주의로 문화제를 이어나갔다.

그들 사이에는 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도 없었다. 찻길로 나와 경찰과 함께 평화롭게 행진하던 문화제 참가자들은 처음부터 어디로 행진할 것인지 방향을 정하지도 않았다.

 

행진을 하는 도중 "우리 어느 쪽으로 갈까요? 직진? 아니면, 사람들이 좀더 많은 쪽이 어디죠?"라고 물으며 행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민주적인 의사진행을 거쳤다. 이렇게 선동자도 없이 모두가 가족처럼, 공동체처럼 어우러진 제주의 촛불문화제는 서울만큼 큰 함성과 고조된 분위기는 없었지만 그들의 목소리 자체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제주의 촛불문화제는 가족잔치처럼 즐겁고 아기자기하였으나 분명하고 힘있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다.

 

가족 잔치처럼 즐겁게, 그러나 분명하고 힘있는 제주도의 촛불 

 

 

누군가 촛불문화제를 마무리하며 뒤쪽에서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다. "우리 언제까지 촛불문화제 하는 거우까?" "끈질기게 하는 거우다. 끈질긴 사람이 이기는 거우다."  

 

한국현대사 최대의 비극이자 제노사이드였던 4·3을 이겨내고, 평화를 써나가는 섬 제주에서 보낸 촛불의 밤은 참으로 행복했다. 술집에서 만난 사람과도 그냥 아무렇게나 합석해서 곶자왈의 생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제주도의 환경과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술 한 잔 따라 건배하고 명함을 나누었던 그 제주도의 깊은 밤은 진정 아름다웠다. 


태그:#제주, #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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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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