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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책방이 있는 곳

 

필름을 찾고 맡기려고 서울 종로3가로 갑니다. 볼일을 마친 뒤 버스를 탑니다. 바지런히 움직였기에 갈아타는 버스삯을 줄일 수 있습니다. 버스는 성신여대역 앞에 섭니다. 가운데로 찻길이 난 버스타는곳. 건널목은 한쪽 끝에만. 버스가 퍽 많이 다니는 곳이고 사람도 많이 북적이는데, 건널목을 앞쪽과 뒤쪽에 하나씩 놓으면 한결 낫지 싶은데. 건널목 푸른불 들어오면 어차피 다른 차들도 못 지나가니까, 두 군데로 나누어 놓아도 되고. 차흐름을 헤아리는 데에서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서, 사람들이 오가기 좋도록 해 주면 더 나을 텐데.

 

 학교옷 입고 둘씩 셋씩 짝지은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 번화가를 가로지릅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오니 차는 뜸해지고 갑자기 조용해집니다. 몇 걸음 사이로 소리와 느낌이 크게 다릅니다. 안쪽은 옛집 그대로이고 바깥벽은 시멘트로 발라서 막음하고 쇠문을 매단 살림집들 촘촘히 자리하고 있는 골목길을 걷습니다. 용문중고등학교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헌책방 앞에 섭니다. 가게 앞에는 오토바이가 서 있고, 이 길을 따라서 학교옷 입은 아이들이 줄지어 내려옵니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일 텐데, 이 아이들은 자기가 학교 다니는 길에 헌책방이 있는 줄을 알고 있을는지, 모르고 있을는지. 헌책방이란, 문제집과 참고서를 사고파는 곳으로만 알고 있을는지, 자기 마음밭을 가꾸는 책을 만나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을는지.

 

 가까이 성신여대가 있고, 돈암동 언덕길을 따라가면 고려대학교가 나오는 이곳에는 예부터 헌책방이 많이 있었습니다. 왼쪽으로는 삼선교와 혜화동, 오른쪽으로는 길음역과 미아리로 해서, 골목골목 헌책방이 있거나 거리로 이루어지기도 했어요. 그러나 세상 흐름에 따라 동네 새책방이 문을 닫고, 사람들 책 보는 매무새가 달라지며, 책을 폐휴지로 분리수거하여 버리는 아파트 살림터가 느는 가운데, 헌책방이 하나둘 문을 닫습니다. 이제 돈암동 쪽에는 '신광헌책' 한 곳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킵니다. 책방 바깥 모습을 몇 장 찍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2) 사람은 개차반이어도 책은...

 

선풍기 한 대가 돌돌돌 돌아가고, 텔레비전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가방은 셈대 앞에 내려놓고 어린이책부터 둘러보면서 조금씩 안쪽 골마루로 파고듭니다. 손바닥책 <괴에테와의 대화>(에커만/홍경호 옮김, 문예출판사, 1974)를 만지작거리다가 시모음 <슬픈 장난감>(이시카와 다쿠보쿠/황성규 옮김, 한국문원,1996)을 집어듭니다.

 

1886년 2월에 태어나 1912년 5월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하이쿠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고작 스물일곱 해를 살았던 이분 시모음은 1960년에 <혼자 가리라>(김용제 옮김)라는 이름으로 우리 말로 옮겨진 적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 헌책방에서 세 가지 판으로 이분 책을 장만해 놓았고(일본말로 된 책들로), <슬픈 장난감>도 한 권 있지만 좀 낡았는데, 이참에 깨끗한 판을 보았기에 다시 집어듭니다. 예전에는 앞부터 읽은 이시카와 다쿠보쿠 님 시를, 이번에는 뒤부터 읽어 봅니다.

 

―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 하니 / 여동생의 눈이 슬프게도 / 나를 동정하누나

― 낮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베갯머리에 / 인형을 사다 놓고 / 홀로 즐거워하네

― 사 두었던 / 약이 떨어져 버린 날 아침에 도착한 / 친구가 보낸 수표의 슬픔이여

― 너의 부모도 / 부모의 부모도 닮지 말아라…… / 이렇게 아버지는 생각한단다 아가야

― 병원 창가에 가까이 다가가서 / 다양한 사람 / 건강한 걸음걸음 부럽게 바라보네

 

한 줄에 사람들 마음을 담는 시 ‘하이쿠’.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한 줄로 오롯이 빚어내는 문학인 하이쿠. 우리 말로 하자면 ‘한 줄 시’. 두 줄도 아니고 석 줄도 아닌 한 줄로 마음을 펼쳐 보이는 하이쿠. 배운 사람도 쓰고, 못 배운 사람도 쓰는 시 하이쿠. 노래가락이 되기도 하고, 입에서 툭 터져나오는 말이 되기도 하는 하이쿠.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을 담아내는 우리 시 문학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었으랴 싶습니다. 향가니 가요니 시조니 하는 문학은 누가 즐길 수 있었는가요. 오늘날 시는, 오늘날 수필은, 오늘날 소설은 누가 빚어내고 누가 즐기고 있는가요. 오늘날 문학에 담기는 삶은 어떤 사람들 삶이며, 오늘날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삶은 어떻게 꾸려 나가는 삶인가요.

 

 

―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기에 / 가만히 보니 / 눈물짓고 있구나 옆에 누운 환자는

― 농사꾼들의 대부분은 금주하였단다 / 살림 더 어려워지면 / 무엇을 끊어야 하나

― 팔고 남은 건 / 때묻어 더러워진 독일어 사전 하나 남은 이 한 권 / 저물어 가는 여름

― 새 책을 사서 밤중에 읽어 보는 / 이 즐거움도 /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네

 

글에 자기 삶을 담아내는 길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학교나 학원이 아니라, 시험점수 더 잘 받도록 이끄는 학교나 학원만 있는 우리 나라임을 되새겨 봅니다. 글에 자기 넋과 얼을 새겨내는 길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교사나 교수가 아니라, 어떤 문학 틀에 걸맞도록 책 짜임새를 갖추거나 이끌고 마는 교사나 교수만 넘치는 우리 나라임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문학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라에서는 문학을 즐길 수 있을까요. 한국땅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요. 한국땅에서 문학하는 사람은 어떻게 먹고살고 어떤 작품을 내놓으며 어떤 마음으로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깨동무를 하는가요.

 

― 적으로 미워한 친구와 / 오랫동안 손을 마주 잡았네 / 이별이라고 하기에

― 문득 느꼈네 / 고향에 있으면서 매일 들었던 정다운 참새 소리 / 삼 년 듣지 못함을

― 어떤 사람이 전차 안에서 침을 뱉는구나 / 이런 일에도 / 마음이 슬프구나

 

어느새 한 권을 후루룩 다 읽어냅니다. 짧게 마친 삶이 남긴 몇 안 되는 작품을 또 이렇게 후루룩 다 읽어내면 어쩌나 하고 생각하다가, 다음에 또 한 번 읽고, 거듭 읽고 되풀이 읽으면 되지, 하는 생각이 이어집니다.

 

<7광구의 대도박>(조갑제, 다락원,1981)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조갑제씨가 1979년에 펴낸 <석유사정 좀 환히 압시다>에 뒤이은 보고서로, "1980년 5월부터 여섯 달 동안 한ㆍ일 공동광구 시추와 원유 수송항로를 취재"한 이야기를 모아서 엮었다고 합니다.

 

.. 세계 석유 문제에 가장 정통한 사람 중의 하나인 미국의 전 CIA국장―전 국방장관―전 에너지장관 슐레징거는 79년 에너지장관을 그만두면서 이렇게 말했다. “70년대의 세계 에너지 문제에서 핵심은 미국과 소련의 세력균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1945년 우리는 스탈린에게 압력을 넣어 이란 북부로부터 소련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젠 그런 종류의 압력이 브레즈네프 씨로부터 나오고 있다. 소련이 중동 석유자원을 그 영향권 아래 두게 된다면, 그것은 1945년 이후 우리가 살아 왔던 이 세계의 종말을 뜻한다. 만약 미국이 중동의 이 문제에 등을 돌린다면 역사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중동에 원유 소모량의 불과 25%를 의존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이 이처럼 암울한 예언을 할 정도라면 97%나 의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람은 무슨 경고를 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첫 말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석유는 공기다. 안 마시면 죽는다 ..  (292쪽)

 

석유자원을 더 얻으려고 하는 미국이 세계 여러 나라를 들쑤시고 있음을 헤아려 보노라면, 조갑제씨가 지난 1970년대에 발로 뛰며 엮어낸 책들도 새롭게 빛을 보거나 값을 매길 수 있으려나 곱씹어 보다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서 온몸을 바쳐 이루어낸 열매는 높이 살 만하다지만, 지식을 다루어 펼쳐내는 자리에 선 사람 매무새와 말본새로 살펴보는 조갑제씨를 돌아보았을 때는, 글쎄, 글쎄다, 이런 책도 책이라고 해야 하나. 책은 책대로 따로 생각해야 하나. 사람은 이 모양이더라도 책은 다르게 엮어낼 수 있으려나. 사람은 개차반이더라도 '이 사람이 일군 땀방울'은 조개구슬이 될 수 있으려나.

 

(3) 책싸개

 

<어항 속의 도시>(박연구, 문예출판사,1976)라는 수필모음을 봅니다. <바보네 가게>로 이름난 박연구님이 두 번째로 낸 책이라는군요. 오호. 이런 책도 내셨구나.

 

..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채찍질하지 않는다. 하라고 성화를 해서 하는 공부는 별로 효과가 없기도 하지만, 공부만 우선으로 알고 무리를 하다가 건강을 해칠까 염려스러워서다 ..  (71∼72쪽)

 

몸이 거덜날까 걱정하고 몸이 나빠질까 근심하면서 아이를 다스리는 어버이는 우리 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요즈음 어버이들은 아이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첫째로 삼고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앞으로 돈 잘 버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는지요. 아이가 앞으로 마음 착하고 몸 튼튼하며 얼 씩씩하고 생각 곧바르도록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는지요.

 

.. 나에게는 도시 그 ‘바캉스’란 말부터가 비위에 거슬린다. 우리네가 지금 알고 있기로는 본래의 뜻을 떠나서 사치스런 용어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물놀이 용품의 품목만 나열해 보았거니와, 그것들을 갖추고 해수욕장에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이 물놀이를 즐기는 그 자체보다도, 이른바 경제적 여유를 과시하는 심리적 충족을 기하는 데에 더 뜻이 있다고 보아진다 ..  (70쪽)

 

 

책을 읽다가 덮으며, 나 혼자 꿈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지 않나 싶어서 피식 웃습니다. 돈이 무엇보다도 크거나 아름답다고 하는 세상에서 괜한 생각을 하며, 좋아하는 책마저 있는 그대로 못 읽거나 책 읽을 겨를을 허튼 생각에 빼앗기고 있지 않나 싶어 씁쓸히 웃습니다.

 

<허수아비의 여름휴가>(시게마츠 기요시/오유리 옮김, 양철북, 2006)라는 책을 봅니다. 집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집어듭니다. 조금 읽어 보고 살까 말까를 가늠하기로 합니다.

 

.. 저 아이들이 특별히 다루기 어려운 학생들은 아니다. 아주 평범한 아이들이다. 성적도 나쁘지 않다. 이 상태로 가면, 2년 후에는 그만그만한 수준의 대학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저 아이들이 내년에 학교에 없을 가능성도 있다. 몰려 있는 장소를 학교 복도에서 자기들만의 아지트로 바꾸고 집에 들어가지 않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에도 ‘이 상태로 가면’이란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  (31쪽)

 

‘계몽사 소년소녀 과학전집’ 가운데 하나로 나온 <곤충의 세계>(이병훈 엮음, 계몽사,1972)와 <식물의 세계>(최준철 엮음, 계몽사, 1972)를 봅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벌레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많지 않기에, 예전 책이라고 하지만, <곤충의 세계>를 집어들어 펼치는데, “보기에도 기분이 나빠지는 곤충을 들라면 사마귀를 빼놓을 수 없읍니다. 큰 눈을 부라리고 허리를 곤두세운 채 톱같이 생긴 두 앞다리를 번쩍 치켜든 사마귀의 협박적 자세는 풀섶을 지나가던 행인을 놀라게 하기 알맞습니다.(176쪽)” 같은 대목이 눈에 뜨입니다. 글쓴이는 왜 사마귀가 ‘보기에도 기분 나쁘진다’고 말할까요? 사마귀는 사마귀고 메뚜기는 메뚜기 아닐는지요. 자기 잣대로, 사람 잣대로, 학자 잣대로, 굳은생각 잣대로 벌레를 함부로 바라보거나 깎아내려서는 안 될 텐데요.

 

<古典文問題>(국문학교재연구회 엮음, 관동출판사)는 판권이나 머리말에 ‘어느 해’에 나왔는가를 밝히지 않아서, 언제 적 책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970년대 첫머리나 1960년대 끝머리가 아닐까 싶을 뿐입니다. 이 문제집은 저로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다만, 이 문제집을 싸고 있는 겉껍데기는 눈길이 갑니다. 일본에서 1950년대에 널리 유행했구나 싶은 ‘서양 어린이 캐릭터’를 잔뜩 모아 놓은 그림을 담은 종이로 책싸개를 삼고 비닐을 씌웠어요.

 

(4) 시 하나 읽으려고 책을 산다

 

‘황토시 동인’ 세 번째 작품집 <황토>(1982 여름)(배영사,1982)를 뽑아듭니다. 책에 시를 실은 분들 이름이 저한테는 낯섭니다. 낯선 분들 낯선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름이 낯설고 작품이 낯설다 한들, 이분들은 모두모두 시 하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올 한 올 엮어낸 시를 모으셨겠지요.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힙니다. 그러면서도 살아야 하는 것을 안 오늘은 왠지 술을 마시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막막한 날에 마시는 술은 고향의 맑은 샘물 같은 것일까요. 서울 하늘이 검게만 보이고 서울 사람들이 낯설어 보이는 오늘은 내가 하나의 나뭇잎임을 깨닫고 뜨겁게 뜨겁게 살고 싶습니다. 산다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문득 떠오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살아 보면 즐겁다는 것을 알으켜 줍니다. 산다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고향의 어머니와 푸른 보리밭이 떠오르고 샘물 같은 술을 마시고 싶어집니다.  (박영웅-산다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시를 쓴 분들 이름을 안다고 해서, 또는 시를 쓴 분들이 내로라할 만큼 알려진 분이라고 해서, 이런 분들 시가 더 훌륭하거나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시를 쓴 분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시를 쓴 분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분들 시가 더 모자라거나 형편없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어떠한 시이든 시입니다. 말 한 마디에 살진 열매를 안고 있으면 시입니다. 한 줄 두 줄 이어가는 동안 우리 가슴을 톡톡 건드리거나 쿡쿡 쑤실 수 있다면 시입니다. 시 이름을 모르고 시인 이름을 몰라도, 시맛을 느낄 수 있고, 시 읽은 마음을 다독일 수 있습니다.

 

‘손과 손가락 동인’에서 펴낸 시모음 <새 그림을 보며>(문촌,1980)를 봅니다. 이 동인시모음에 작품을 실은 분들 이름 또한 낯섭니다. 가만히 책장을 넘깁니다. 눈길이 멎는 자리가 있고, 그냥저냥 책장을 넘기는 자리가 있습니다. 잠깐 스치는 시가 있고,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다 가는 시가 있습니다.

 

 고모집 뒤주 뒤에 있던

 백항아리들 나는 알고 있다

 고모가 시집갈 때

 할머니가 나누어 주었다는

 모란 무늬 있는 백항아리를 나는 알고 있다

 집안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백항아리를 닦던

 깔끔한 고모를 나는 알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정신대에 보내고

 바늘 꿰기가 어렵게 됐다는

 항상 눈물이 괸 고모를 나는 알고 있다

 예수쟁이를 욕하던 고모가

 성경 끼고 매일 다니던

 장터에 있는 예배당을 나는 알고 있다

 교인들의 찬송가에 들러싸여

 먼 허공을 보며 임종하던

 고모의 모습을 나는 알고 있다

 고모부가 재혼한 뒤

 새로 들어온 여자가

 고물상에 팔아 버린

 먼지가 뽀얗게 앉은

 백항아리를 나는 알고 있다.  (김원호-백항아리)

 

시를 쓰면서 먹고사는 사람이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해 봅니다. 시쓰기로는 먹고살 수 없다고 느끼며 다른 일거리를 찾는 사람이 많을 테지, 하면서도 왜 시쓰기를 하는 사람은 시 하나로 먹고살 길을 열 수 없을까, 고개를 갸웃갸웃 해 봅니다. 대단한 벌이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대단한 벌이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루 두세 끼니 고맙게 받아쥘 수 있고, 몸뚱이 하나 누일 수 있으며, 문득문득 떠오르는 느낌을 적바림할 틈과 종이와 연필이 있으면 됩니다.

 

시쓰기 아닌 다른 일을 하더라도, 하루 몇 시간이나마 시를 생각하고 다른 이들 시를 즐기며 시 아닌 여러 가지 책도 맛볼 수 있도록 느긋한 터전이 마련된다면 … 시가 온몸 구석구석 파고들어서 시에 미치게 될 때, 시 하나로 미친 몸을 굴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다면… 삶이 곧 시가 되고, 시가 다시 삶으로 꽃피우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러나, 이런 터전이란, 이런 삶터란, 한 나라에 민주가 뿌리내리고 평등이 고루 퍼지며 평화가 두루두루 넘쳐야만 이루어지려나. 자유롭게 꿈을 꾸고, 따돌림이나 괴롭힘이란 깃들지 못하며, 푸대접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랑하고 믿음으로 어우러지는 세상이어야 비로소 시인이 시를 살포시 껴안게 되려나.

 

 

(5) 이제는 집으로

 

책값을 셈합니다. 고른 책을 가방에 챙겨넣습니다. 책방 문을 나섭니다. 오던 길을 거슬러 걸으며 전철역으로 갑니다. 뒷간에 잠깐 들렀다가 전철을 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 책방에서 고른 책을 하나하나 꺼내어 읽습니다.

 

책을 읽다가 잠깐잠깐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오며가며 헌책방에 들러 여느 교양책을 찾는 발길은 앞으로도 고이 이어질 수 있으려나.

 

수험서와 참고서와 처세책(자기계발서) 아닌 여느 교양책으로 마음을 살찌우려는 사람들은 언제까지 헌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으려나.

 

사람들이 헌책방에서 마음밥을 얻어 갈 수 있도록, 헌책방은 꼿꼿이 제 살림을 꾸리며 지켜 나갈 수 있으려나.

덧붙이는 글 | - 서울 돈암동 '신광헌책' / 02) 923-9960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태그:#헌책방, #신광헌책, #시집, #책읽기, #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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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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