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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92년 당시 안기부장 특보였던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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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복 전 안기부장 특보가 23일 '조갑제닷컴'에 쓴 칼럼을 통해 "1992년 8차 남북고위급 회담 때 내가 훈령을 조작했다는 주장을 한 '임동원 회고록'은 거짓"이라고 공격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이달 초 <피스 메이커>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펴냈다.  출판사인 중앙북스 관계자에 따르면 <피스메이커>는 초판 3000부가 10일만에 매진됐고 2판 2000부를 찍은 상태다.

이 책에는 '훈령 조작'이라는 장이 있는데 1992년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발생한 훈령 조작 사건의 전말을 상당히 자세하게 담고 있다.

당시 통일원 차관이었던 임 전 장관은 남북고위급회담 교류협력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안기부장(지금의 국가정보원장) 특보였던 이동복씨는 정치분과 위원장 겸 회담 대변인이었고 수석대표는 정원식 총리였다.

이 전 특보는 칼럼에서 "임동원은 그의 회고록에서 날조된 허구적 주장을 다시 들고나와 필자를 비방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이에 대해 임 전 장관은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1993년 12월 감사원 감사 결과 훈령 조작은 사실로 밝혀졌다, 이씨의 주장에 대해서 일일히 대응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고 일축했다.

실제 1993년 12월 22일 조간 신문들을 보면 "이동복 특보 훈령조작 판명, 감사원 발표"(<한국일보>) 등의 제목으로 감사원의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시의 훈령조작의혹 감사 결과' 소식을 전하고 있다.

또 사건에 대한 감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그 해 11월 이동복씨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당시 안기부장 특보 자리에서 해임됐다. 그의 주장대로 훈령 조작이 허위였다면 안기부장 특보에서 물러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훈령 조작 사건은 1992년 발생했으니 벌써 16년이나 됐다. 보통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남북 관계와 관련해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임동원 회고록이 전하는 훈령 조작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가짜 전문은 날아들고 진짜 전문은 묵살되고

임동원 전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 임동원 전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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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산 가족 상봉에 큰 기대를 걸고 8차 고위급 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키라고 특별 지시를 했다.

대신 북한은 비전향 장기수인 이인모 노인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이인모 노인의 송환 조건으로 ① 이산가족 상봉 ② 판문점 면회소 설치 ③1987년 납북된 동진호 선원 12명 송환 등 3가지 조건을 내걸되 앞의 2가지만 북한이 수용하면 이인모씨를 송환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해 9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에 동의했다. 임동원 당시 고위급회담 교류협력분과 위원장은 이를 이인모씨를 북한에 송환할 조건이 충족된 것으로 봤다.

17일 새벽 0시 30분에 이산가족 협상을 타결하겠다며 통일원장관·안기부장·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앞으로 청훈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17일 아침 서울에서 온 답신은 "3개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지 않을 경우 협의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불과 며칠 전 노태우 대통령이 재가한 방침과 확 달라졌는데 평양의 남측 대표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훈령을 지켜야 했고 이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협상은 결렬됐다.

서울로 돌아오자 당시 남북협상을 총괄 지휘한 최영철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이 "반드시 이산가족 문제를 합의하라고 재차 훈령까지 보냈는데 왜 아무 성과도 없었느냐"고 임 위원장을 추궁했다.

임 위원장은 "3개 조건을 모두 충족하라"는 훈령을 받았다고 의아해 했다.

당시 서울과 평양을 오고간 전문을 조사한 결과 17일 새벽에 이동복 특보가 "(임동원이 보낸) 청훈 전문을 묵살하고 '이인모 건에 관하여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고 서울에 있던 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에게 전문을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17일 아침 7시 15분에 서울에서 평양으로 "3개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전문이 발송됐다.

17일 오후 4시 15분에는 서울에서 당시 정원식 수석대표(당시 총리) 앞으로 "2개 조건만 관철되면 남북적십자 접촉을 즉각 재개하는 데 합의하라"는 내용의 전문이 평양으로 날아들었다.

이 전문은 대통령의 정식 훈령이었는데 차석대표인 임동원은 물론 수석대표인 정원식 총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즉 회담을 깨기 위한 가짜 전문은 평양의 우리 대표들에게 날아들고, 대신 회담을 타결지으라는 대통령의 진짜 전문은 묵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임동원 회고록 296쪽은 1992년 12월 21일 감사원의 '8차 남북고위급회담시의 훈령조작 의혹 감사결과' 발표를 요약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청훈 전문은 이동복의 지시로 안기부장 이외의 수신자들에게는 전달하지 않고 묵살되었고(청훈 차단), 이동복이 평양에서 가짜 훈령을 조작했으며(훈령 조작), 신속한 회신이 요구되는 청훈을 받고도 안기부장은 이유없이 지연처리했으며(처리지연), 진짜 훈령을 접수한 이동복은 고의로 회담이 모두 종료된 시각에 평양의 총리에게 지연보고했다(훈령 묵살)"

임 전 장관은 회고 288쪽에서 "이동복의 훈령 조작·묵살 사건은 일부 세력이 대통령의 훈령을 거역하고 남북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으로 민족 역사에 수치스러운 오점을 남기게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훈령 조작은 안기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된 것인데 이동복 개인의 사건으로 축소된 것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통일부-안기부의 영원한 입장차?

그런데 이 전 특보는 23일 조갑제닷컴에 올린 '남북 고위급 회담의 훈령 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했다. 이 글은 A4 용지로 무려 30쪽이나 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7일 아침 7시 15분에 서울에서 평양으로 "3개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협의하지 말라"며 발송된 전문은 서울에서 온 게 아니라 평양의 우리 측 상황실에서 만들어졌다.

17일 새벽에 임동원과 이동복이 서울로 보낸 전문은 당시 안기부의 실력자 엄삼탁 기조실장의 연락 두절로 17일 오전 10시까지 처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측 상황실은 서울에서 암호로 오는 전문의 해독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기존 협상 지침의 견지 또는 변경 양쪽으로 예상해 전문을 미리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17일 아침에도 서울에서 답신이 오지않자 이 전 특보가 '기존 협상지침 고수' 내용으로 된 예상 전문을 정원식 대표에게 전달했고 그는 "면회소와 이인모를 맞바꾸는 대북 접촉은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또 17일 오후 4시 15분에 온 훈령에서 말하는 2개의 조건은 임 전 장관이 말하는 2개의 조건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① 이산가족 고향방문 정례화 ② 판문점 면회소와 우편물 교환소 설치ㆍ운영 ③ 납북어선 동진27호 선원 12명의 송환 등 3개 조건을 관철시키되, "그것이 불가능하면 ①+②, 그리고 그것도 불가능하면 ①+③을 관철하라"는 것이었다.

둘의 설명이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한 남북문제 전문가는 "당시 감사원 감사 결과 임 전 장관이 이른바 판정승을 거둔 것"이라며 "훈령 조작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이동복씨가 특보에서 물러날 이유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전 특보가 항상 햇볕정책을 공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남북고위급 회담 때 생긴 임 전 장관과의 이런 악연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훈령 조작 사건을 분석한 신문 기사를 보면 남북 대화에 적극적인 통일부(당시 통일원)와 간첩 잡기가 본업인 안기부의 입장 차이가 훈령 조작 사건이 벌어지게 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현재 <경향신문> 편집국장인 송영승 기자가 1993년 11월 27일 이동복씨가 안기부장 특보에서 해임된 직후에 쓴 해설 기사는 "이 특보의 해임은 70년대 이래 전통적인 대북노선이 퇴진해가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며 "6공 들어 온건하고 신축적인 사람들이 대북정책에 간여하기 시작하면서 강온갈등이 끊임없이 표출됐다"고 분석했다.

이 기사는 이어 "지난해 이 특보가 당시 임동원 통일원차관을 '아마추어'라고 폄하하자 임 차관이 '70년대 프로보다는 90년대 아마추어가 낫다'고 맞섰던 논쟁도 그중의 하나"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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